Currently Browsing: 안방 초대 문인

[2월의 칼럼] 0과 1 사이 |유희경|

0. 오전엔 뭐라도 쏟아질 것 같더니,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 공중은 그저 적막한 예감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있다. 따뜻해 보이는 구름이 조금씩 몸집을 민다. 짧게 햇살이 잠시 창가를 비춘다, 사라진다. 며칠 전 폭설의 흔적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창가 어디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그리고 긴 긴 침묵. 아무 일도 없었지만 무언가를, 나는...

[1월의 칼럼] 아침 – 자연 |조연호|

1. 기억을 생각의 지옥이라고 쓴다. 마찬가지로 초인을 인간의 괴물이라고 쓴다. 2. 떠오른 것은 구름이라기보다는 구름적이었다. 산책길의 꽃들은 꽃이라기보다 원예적이었고, 자아는 상태라기보다는 형상적인 것이었다. 반려(伴侶)와 산책을 하다 젊은 나이에 숨진 한 사람에게 나는 팔과 다리로 엮은 꽃바구니를 선물했다. 촉지(觸肢)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내가...

[12월의 칼럼] 이 별의 재구성 |안현미|

E 얼마 전 15년 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개발 논리에 의해 강요당해서였지만 뭔가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는 초식동물 같은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낯선 공기와 낯선 출근길과 낯선 버스 노선도…… 낯선 것 투성이의 낯선 일상이 심지어는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건 아마도 38년을 사용해도 문득 문득...

[11월의 칼럼] 퍼즐 |최규승|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이 작업은 시작된다. 그러저러한 안부를 물은 뒤, 시간 날 때 술 한잔하자는, 상투적인 약속을 하고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느닷없이 그것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어떤 사람의 서재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서재에 그것들이 다 모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 사람들의 서재에 산재해 있지 않을까. 수집벽이...

[10월의 칼럼] 빛의 통로 |이영주|

누군가는 인도를 다녀왔고 누군가는 이태리를 거쳐 튀니지로, 누군가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으로 사라졌다. 나는 매일 매일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방, 옥탑방으로 갔다가 하늘에서 가장 먼 방, 내 안으로 들어온다. 전기가 깜박거리다 꺼진다. 오랜 시간을 항해하던 아버지가 들어와 내 안의 전기선을 통째로 갈아엎는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쯤을 항해하는지 모른다....

[9월의 칼럼] 폐허 |김근|

외주제작사 PD로 일하던 M은 낮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전화해 김광석의 <나른한 오후>를 불러 달라고 했다. 휴가 나온 동생과 영화를 보고 막 나온 참이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동생에게 면회 한번 가지 않았다. 그의 휴가 마지막 날 오후, 나는 동생을 불러 근무 시간에 종로에서 영화를 봤다. 황사가 심한 날이었다. 과장되게...

[8월의 칼럼] 매미는 뭘 먹고 사는가 |김승강|

등나무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며 앉았다. 장마 끝이라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그런지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인데도 힘들었다. 어제 과음을 한 탓도 있다: 어제 저녁에 이상한 사람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는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셨다. 술김에 담배도 여러 대 얻어 피웠다. 땀이 샘처럼 솟는다. 멀리서 매미소리가 들린다. 매미소리는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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