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ly Browsing: 안방 초대 문인

[봄맞이 신작시] 앵무조개 | 나희덕 |

  앵무조개, 앵무조개, 앵무조개, 앵무새처럼 며칠을 중얼거린다.   앵무새의 부리를 닮은 앵무조개. 새의 성정을 타고나 바닷물 속에서 살아가는 앵무조개. 한 번도 짠물을 벗어나지 못한 앵무조개. 그러나 모래에 처박혀서만은 살 수 없는 앵무조개. 날개도 빨판도 없이 물결에 둥둥 떠다니는 앵무조개. 구십 개의 촉수로 먹이를 찾고, 위험할 때는 어룽거리는...

[봄맞이 신작시] 집들이 | 윤병무 |

겨울, 집 팔고 전세로 이사했네버려도 버려도 가득한 짐들짐들의 꽃책상을 거실 가운데 자리 잡았네      첫 손님은 열 시에 찾아온 햇빛내 맨발 옆에 햇살이 앉네안녕하세요 차를 차려놓듯 공손히왼발을 햇볕에 내놓네홀로 혼혼한 우주를 건너온 다스한 손님발등의 강줄기 같은 푸른 혈관이 부푸네      일제히 하늘을 겨냥한 활대 같은세탁소용 옷걸이에 매달린...

[봄맞이 신작시] 익산 주먹 | 서효인 |

      눈을 뜨면 고향일 것 같아, 꿈은 대부분 이뤄지지 않고 기차는 진작부터 천천히 달렸다. 이리가 고향이라는 선배는 죽을 때까지 맞아본 적이 있느냐 물었다. 선배는 일제 때부터 있었던 곡물 창고에서 한가마니에 담긴 쌀 알갱이만큼 두들겨 맞았다. 눈을 뜨면 죽었을 것 같아 꼭 눈을 감고 있었지. 다시 눈을 감았다. 익산을 넘어가면 매 맞는...

[3월의 칼럼] 쿠바의 향 | 구광렬 |

   나라마다 고유한 것으로 치부되는 향이 있다. 보통 그것은 특산물이나 의식주 등 생활문화 아이템에서 비롯된다. 콜럼버스가 ‘지상의 낙원’이라 극찬했던 쿠바의 향은 어떨까.    쿠바의 향은 일차적이거나 독자적이질 못하다. 후각적이라기보다는 청각적이며 청각적이라기보다는 시각적, 촉각적이다. 다음을 상상해보라. 왼 손엔 시가가,...

[2월의 칼럼] 언제나 첫 만남 | 조연정 |

  그리 길지 않은 글인데도 이 첫 문장을 쓰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매번 이렇다. 나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고 생각하는데 언제나 이렇게 배워본 적 없는 일을 처음 하는 사람 마냥 막막해진다. 분명 쓰고 싶어서 쓰겠다고 한 글일 텐데 막상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상투적인 표현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할 말이 있기는 한...

[1월의 칼럼] 잘린 시야 | 백민석 |

 —우리의 내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하나 나온다. 등장인물의 창조에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너무 독특해서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그런 캐릭터다. 제목에도 쓰인 바틀비라는 인물인데, 움직임이 매우 제한적이다.   허먼 멜빌은 바틀비를 사무실 칸막이...

[12월의 칼럼] 문학적 영감에 대응하는 방식 | 강영숙 |

목욕탕에서 한때 아주 유명했던 운동선수 B를 만났다. 커다란 회색 방주(方柱) 두 개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만났다기보다는 몸을 닦고 있는 그녀 앞의 은색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본 게 전부였다. 맞는구나! 그녀는 대단한 선수였다. 지금도 그녀의 뒷모습은 로댕의 토르소처럼 강건해 보였다. 그녀는 국민에게 기쁨과 자긍심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남산 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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