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3): 몽환 속에 우두커니

어둠 속에 나뭇가지는 비를 맞고 있다 공간의 틈을 열며
나뭇가지는 비를 맞고 있다
나는 우두커니 비를 맞으며 흰 여자를 생각한다

어둠 속에 나뭇가지는 비를 맞고 있다
공간이다 흰 덩이를 이고 나는 허우적이며 헤엄을 쳐가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뭇가지의 비를 만져보고 있는 것이다
— 김태동, <어둠 속에 나뭇가지는 비를 맞고 있다>
(<<문학과 사회>>, 2000년 봄호)

* * *
김태동 시인이 <<문학과 사회>> 봄호에 발표한 네 편의 시에도, 그의 첫 시집 <<청춘>>을 뒤덮고 있는, 피로 질퍽이는듯한 캄캄한 밤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번 시들에서는, 청춘이 오히려 죽음의 지름길인양 절규하던 원초적 외침은 잦아들고, 그 대신 같은 상황을 묘사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시각적 거리가 나타나고 있다. 위의 시는 특히 그의 시에 특유했던 말의 휩쓸림이 문득 어떤 정지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을 하나의 몽환처럼 보여주고 있다.
위 시의 정황은 <<청춘>>에 실려 있는 <천국>이란 시의 그것과 놀랄만큼 유사하다.

형호야 나무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 나무에 죽은 할머니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 죽은 내 동생 형호의 영혼이; 하얗게
깃들여 있다 비가 오면, 손을 대는 내 몸으로 적셔오는 빗물
영혼의 춤은 귀신처럼 푸른 인광이 쏟고 나는 흔들리며
빗물 더듬는다 형호야 (1연)

나무, 비, 하얀 영혼, 비를 만지는 나… 등, 두 시의 이미지들은 고스란히 겹치지만, <천국>의 ‘나’는 “푸른 인광”에 “흔들리며” 2연부터 특유의 외마디 소리들을 쏟아내기 시작하고 마지막 연에 이르면 “검게 신음하며” “미쳐”가는 반면, <어둠 속에…>의 ‘나’는 끝내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아마도 “생각한다”는 상태의 발견에 있을 것이다. 위의 시에는 두 번 “생각한다”는 어휘가 반복되는데, 처음엔 그저 “떠올린다”
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두번째 것은 거의 “판단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휩쓸림에 몸을 맡기는 대신 성찰을 시작한 것이다. 시인은 비를 맞는 나무를 즉각 “피 흘리는 나무”(<천국>)로 전이시키지 않고, 비를 맞는 나뭇가지 사이로 열리는 “공간의 틈”을 통해 “허우적이며 헤엄을 쳐 가(는)”는 나를 저만치 바라본다.
그때 “익사”를 향해 허우적이며 휩쓸려가는 <천국>의 나는 어떤 강박 혹은 악몽에 시달리는 어떤 ‘나’로 대상화된다. 성찰의 거리를 띠우고 바라보니, 그 ‘나’는 몽환 속의 나인 것이다. 그걸 깨닫자, 세상은 문득 아련하고 아뜩해진다. 이쪽의 나는 그 몽환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새삼스러운 사실이 또한 그 정황 자체를 몽환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것도 몽환이 아닌가 하는 의혹 속에서 나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나뭇가지의 비를 만져보는 것이다…
이 희한한 적요의 상태를, 시인은 대마초를 피우며 듣는 사이키델릭 음악처럼 언어의 묘한 반복과 변주 속에 구축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생각한다” “사람이다” “만져보고 있는 것이다”로 이어지는 세 문장의 종결 방식은 그 몽환을 독자의 내면 속에 크 확대시킨다. 생각이 사실을 일깨우고 그 사실을 동시에 접촉의 행위 속에서 확인하는 그 평범한 움직임이 마지막 “것이다”
에 의해 새삼스러움의 새삼스럽지 않음이라는 과정으로 드러나며, 역설적으로 이 시의 몽환성을 음악화시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