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2): 석류와의 키스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 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 나희덕, <石榴>
(<<현대문학>> 1월호)

* * *

이즈음, 나희덕 시인의 시가 무르익고 있다. 언제부턴가 여러 지면을 통해 꽤 많은 그녀의 시들을 접하고 있는데, 태작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이 시 <석류>는 그 풍요의 비밀이 일종의 관능적 열림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읽힐 수 있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시들은 얼마나 단정했던가…
이 시에서 여성인 시인은 남성적 화자로 변신해 있다. 남성인 화자가 여성인 석류에게–석류로 비유된 어떤 여성적 존재에게– 중얼대고 있는 것이다. 2연의 묘사를 보면, 석류는 이를테면 처녀성을 완강히 지키고 있는 ‘너’를 닮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너’를 상상하며 남성적 힘을 발휘해 그 “굳은 껍질”을 벗긴다. 그럼으로써 ‘나’는 ‘너’의 입을 열고 혀와 혀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나’가 궁극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입 속의 말”이다, “새의 혀처 보이지 않는 말”(새는 혀가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육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말, 즉 시이다.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의 등가물과도 같은 시, 순결한 처녀성을 관능으로 바꿔 육체적 언어로 교감하는 시… 아무튼 그 시는, 첫 시집 <<뿌리에게>>(1991)에서,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침묵하는 새의 노래는 무엇일까 (<수화(手話)>)

라고 읊어졌을 때 암시된 시와는 뚜렷한 대척점에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시를 뜻한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너”야말로 바로 이때까지의 ‘나’–시인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동안 단정한 여성적 시를 쓰던 그녀는 여기서, 자기 속의 남성을 발동시켜 여성인 자신을 열면서 그 남성성과 여성성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마침내 자웅동체를 드러낸 시인! ‘그+그녀’가 쓰는 성적 연금술의 시!
……그런데 그 열림은 “뒤늦게, 그러나 아직 늦지는 않게”라는 어떤 아슬아슬한 시간적 경계 위에 서 있다. 너무 오래동안 순결한 여성성에만 갇혀 있었다는 회한의 표현일까? 아무튼 그것이 나이먹음 혹은 젊음의 조락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가 더 최근에 발표된 <어두워진다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그 욕망이 자연 그 자체임을 해명하는 시도 있는데 그 제목은 <허락된 과식>이다(둘 다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려 있다).

뒤늦게 깨달았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석류’를 ‘석녀(石女)’로 겹쳐 읽었던 것 같다. 무의식 속에서, 나는, 제아무리 순결한 그 무엇도 자폐 속에 갇혀 있으면 불모성에 다름 아니라고 여겨온 것일까?
그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며 다시 시를 따라가자면, 그 불모성을 넘어 자기를 열고 남을 적셔주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생산적인 교감을 얻기 위해서는, 쓴맛과 울음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타이밍을 놓쳐서도 안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