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시 읽기

나는 소설을 쓰면서도 소설 읽기보다 시 읽기를 훨씬 즐긴다. 이건 등단 이후에 점점더 심해진 취향으로, 어쩌면 내 소설 쓰는 태도와 관계가 있을런지 모르겠다. 80년대의 사회적 상황과 결부된 글판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을텐데, 솔직히 나는 그 무렵의 소설에 강요되다시피한 ‘리얼리즘’식의 소재 중심주의, 이야기 중심주의가 너무도 껄끄러웠었다.
시라고 그 시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들은 독특한 시적 ‘비상’ 혹은 ‘침잠’을 통해 문학과 삶의 숨통을 터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도 그런 등가물을 꿈꾸고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시적인 것’을 끌어들여 소설 세계를 재구축하고 싶었다(아시다시피,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나는 시에 내놓고 빚을 졌다).
그런데 그때, 거꾸로, ‘소설적인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시를 풍요롭게 만들려 했던 동세대 시인들이 있었다. 이때의 ‘소설적인 것’이란 물론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시간이므로, 글이 길어지거나 이어지면 자연히 그 밑바탕에 깔리게 마련이다. 시라 할지라도 가령 서사시의 경우가 그렇지만, 그러나 이야기 능력의 우월성이 산문 쪽으로 이양된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이미지와 언어 자체의 질감에 의존하는 현대시는 거의 본질적으로 시간에 저항한다. 그렇다면 시를 쓰면서 ‘소설적인 것’을 양분으로 삼으려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며 시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인가? 내가 주목한 시인들은 그 ‘시간’을 다시 잘게 분할시켜 그 파편의 벽돌로 공간의 집을 지었는데, 그 공간은 흔히 시집이라는 ‘책’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즉, 한 권의 시집이 공간화된 시간의 구조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집들을 소설적으로 읽는 재미란 단순히 시간적 서사를 재구성해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일차적인 시간적 서사–시이기 때문에 이 또한 단선적이지 않지만–가 어떻게 해체되며, 대신 심상적 서사 즉 이미지의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어떤 유동체와도 같은 상상적 언어 공간이 구성되고 있는가를 산문화시켜보는 것이리라.
김정환의 <<황색 예수전>>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그 시집은 예수의 일대기를 이야기 구조로 갖고 있으나, 그 이야기는 별로 중요치 않다. 그 시간의 매듭들에서 어떤 시적 언어가 솟아올라 공간적 기둥을 이루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황지우의 <<나는 너다>>나 박남철의 <<반시대적 고찰>>처럼, 분명히 ‘소설적인 것’을 품고 있는데도 너무나 심한 해체 때문에 그 재구성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곱씹으며 상상을 채워가는 즐거움이 따로 있지만…
8   0년대에, 내게 그런 시 읽기를 암시해준 첫 시집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였다면, 그런 시 읽기를 만끽하게 해준 시집 또한 그의 <<남해금산>>이었다. 저 ‘치욕’의 시대에 더럽혀진 어머니/애인의 심상들과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을 앓는 ‘나’를 통과의례의 여정 속에서 노래하고 있는 <<남해 금산>>은, 결국 그 전체가 거대한 탈-시간적 악몽으로 화한, 지극한 초현실적 ‘록(Rock) 오페라’처럼 들린다.
이에 대응하듯,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은 그렇게 더럽혀진 여성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절규하며 방황하는 모습을 일종의 ‘모던-폭(Modern-Folk) 컨셉트 앨범’처럼 구상화하여, 이성복의 시집과 묘한 대조적 짝을 맞춘다. 이 시대적 고통은, 나중에, 김혜순이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뚜렷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 상상력에 의해 어느 정도 전복될 것이다. 이 시집은 80년대 너머로 과감히 자기를 끌고나가는 새로운 90년대식 형태의 ‘얼터너티브-록(Alternative-Rock) 컨셉트 앨범’에 비유할만 하다.
90년대에도, 그러한 시적 기류를 이어간 뛰어난 시인들이 포착된다. 가령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은 끝없이 버림받는 여인의 행적기로 최승자의 맥을 이으며 그것을 변형시켜 8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정서적 다리를 놓았고, 유하의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더럽혀진 사랑으로부터 순수한 사랑을 꿈터올리는 과정을 압구정동/하나대의 이원적 공간 구도 속에 펼쳐 이성복·황지우 등을 흡수하면서도 새로운 90년대적 자아 혹은 욕망을 뚜렷이 떠올렸다.
‘욕망’은 90년대의 가장 큰 주제였다. 채호기는, 죽은 애인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그 애인의 몸이 되기 위해 게이로 변한다는 환상적 서사 위에서, <<슬픈 게이>>를 통해 그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90년대 후반기에, 그 욕망의 불가해성은, 서사화하려 해도 서사화되지 않는 탈현대적 삶의 모습으로 성기완의 <<쇼핑 갔다 오십니까?>> 속에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극단적 파열의 자리에서, 김태동의 <<청춘>>이 내뿜는, 이 역시 감각적으로는 소설적인데, 도무지 복원할 수 없는 어떤 원초적 목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새 세기에도 소설적 시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집들이 나올까? 나온다면 그건 어떤 형태로일까?

 

……아, 당연한 소리지만, 소설적 시 읽기를 제공하는 시집들만이 좋은 시집은 아니다. 이건 내 시 읽기 취향의 한 영역일뿐, 나는 홑편의 시들이라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은 그 나름으로 다 좋아하며 즐길 줄 안다. 부디 오해 없으시길.
* 이 글은 <<동서문학관 소식>>지(2000년 봄)의 ‘독서 편력’ 란을 위해 쓰여진 후 다시 수정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