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 음악의 총체적 복원을 꿈꾸는 까닭

얼마 전, 책방을 배회하다가 한 구석에서 우연히 <<신중현, Rock>>(다나 기회, 1999)이란 책을 낚았다. 신중현의 자서전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그의 구술을 글로 옮겨 정리한 듯한 그 책에는 부록으로 씨디 한 장이 딸려 있었다. 신중현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한 권을 구입해 골방으로 돌아왔는데, 씨디를 틀었을 때, 나는 뜻밖에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 속에는 지금으로선 구할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노래 네 곡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1) ‘Add Four’의 <빗속의 여인>: 이 노래의 최초 판본으로, 1964년에 녹음된 곡(2: 43);
2) ‘The Men’의 <아름다운 강산>: 이 노래의 최초 판본으로, 1972년에 녹음된 곡(6: 42);
3) 김정미의 <봄>: 이 노래의 최초 판본으로, 1973년에 녹음된 곡(4: 52);
4) 원형본 <미인>: 대중적으로 편곡된 3분짜리 ‘엽전들’의 곡의 원형을 이루는 것으로, 신중현 개인이 보관하고 있던 1974년 녹음본(4: 16)
등, 어린 시절에 내가 라디오나 음악 다방에서 최초로 만났던 신중현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노래들이었다. 보존 및 재생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잡음도 섞이고 소리의 굴곡도 매끄럽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마치 옛 엘피 판을 듣는 것처럼 추억을 아련하고 달콤하게 자극하는 바람에, 미친듯이 신중현의 음반들을 뒤져 거의 밤이 새도록 그의 노래들에 빠져들었었다. 맥주 캔을 거푸 까면서.
그러나 ‘Add Four’의 다른 노래들이나(내 기억엔 <커피 한 잔>의 최초 판본도 그 밴드 것이었는데, 아니었나?) 김정미의 다른 노래들(정말이지 그녀의 <봄비>가 간절하게 듣고 싶다)은 들을 수가 없었다. 내게 엘피도 간직되어 있지 않고 시중에 씨디로 복원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술기운에, 도대체 이 나라에 예술적 자산을 보존하고 보급하려는 최소한의 문화 의식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건가 하는 한탄과 울화마저 치밀었다(시야를 확대해 보면, ‘고급한’ 문학 쟝르인들 뭐가 다르랴).
‘Add Four’는 말의 바른 의미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록 밴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유일한 음반 하나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The Men’ 의 <아름다운 강산>은 다양한 리메이크 버젼들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이 명곡의 시발점으로 신중현 자신이 가장 만족스런 원형본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김정미의 음반도 한국 대중음악사에 싸이키델릭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예일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신중현이 자기 음악적 편력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음악적 성취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우리는 제대로 접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도대체 그것들은 어디서 썩어가며 손상되고 있는가…
신중현의 음악을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얼마전 완료된 한대수나 산울림의 음악 복원 작업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신중현 음악의 복원이 시도된다면, 그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훨씬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의미망을 얽는 작업으로, 진정 앞으로의 우리 문화적 역량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만하다. 우선, 고정된 한 사람 혹은 한 팀의 아티스트(들)가 자신(들)이 만든 곡을 자신(들)이 실연해 녹음하여 순수한 하나의 원형으로 간직되고 유지되어온 한대수나 산울림의 경우와는 판본의 다양성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 차이들이 대부분 독자적으로 간직되고 비교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신중현이 자기 이름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은 80년대 이후다. 60-70년대를 주도한 가수 중심의 대중음악계 풍토 속에서, 이전의 그는 주로 박인수, 펄 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장현, 김정미 등의 가수 뒤에 숨어 있었고, 밴드 활동에서도 대개 리드 싱어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악보를 건네주고 리메이크를 허용한 경우–가령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를 제외하고는, 그의 음악들은 대개 그의 연출 아래 제작되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게 지적해두어야 할 사항이다.
요컨대, 가수를 자기 식으로 다듬어 자기가 의도하는 곡 해석을 끌어내고 자기가 직접 연주 팀을 이끌며 그 바탕의 의미를 부여해 나감으로써, 누가 부른 노래를 들어도 결국은 그의 음악적 색체가 스며나와 끝내는 전면으로 떠오르도록 만든 것이 그의 천재성 중의 하나였다. 그런 관점에서, 가수는 그의 연출 아래 움직이는 배우와 같고, 그 배우들의 연기는 그의 음악적 편력 혹은 진화의 역사와 사회 공간을 새기게 만드는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들로 신중현이라는 이름 아래 복무한 셈이 된다.
물론 이 말은 그들의 개개인의 독자적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관점의 변경 속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신중현’이라는 시공적 전체 속에서, 거기 속한 개체들은, 통시적으로는 한 사회의 어떤 집단의 의식을 대변하며, 공시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변화에 어떻게 음악적으로 대응하는지를 알려주는 의미소가 된다. 당연히 그것은 신중현이라는 한 개별적 예술가의 차원에서도, 통시적으로는 누구를 통해 그의 의식·무의식의 어떤 부분이 도드라지는가를, 공시적으로는 어떤 음악적 변화의 생애를 겪으면서 동시에 엮어나가는가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구체적으로, 김추자와 김정미는 60년대의 끝자리와 70년대의 첫자리의 미묘한 ‘다름’을 각각 구현한다.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보여주는 발랄함은 아주 단순한 기쁨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죽음의 전쟁에서 ‘살아온 것’ 그 자체를 기리는 원초적 즐거움을 일종의 한풀이 신명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 뒤에는 세상이 거짓과 배신으로 차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삶을 구하고 싶다는 소박한 청원이 밑받쳐져 있다(<거짓말이야>, <아니야>, <늦기 전에> 등). 그러던 것이 70년을 넘어서며 김정미의 ‘데카당스’로 바뀐다. 거기에는 비속한 세상에의 절망에 갇힌 어두운 꿈이 서려 있는 것이다.
김추자가 60년대식 산업화의 끝자리에 서린 여러 복합적 감정을 역접의 형태로 노래한다면, 김정미는 70년대 초의 돌이킬 수 없는 절망감을 퇴폐적으로 감싼다. 김추자가 60년대말의 다수 대중의 다소 단순한 정서를 반영한다면, 김정미는 70년대 초에 분열하기 시작하는 정서적 집단들 중에서 어떤 특수한 경향을 대변한다. 김추자의 <봄비>와 김정미의 <봄비>를 비교할 때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후자의 싸이키델릭한 음감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며, 이는 당시의 신중현이 보다 전위적인 특정 엘리트(?) 집단의 의식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 했다는 진단을 이끌어내게 한다.
간-텍스트적으로 시야를 잇자면, 김정미의 <봄비>는 ‘The Men’의 <아름다운 강산>과 내통한다. <아름다운 강산>이 퇴폐적이라구?–하며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선희의 노래나(그녀의 노래는 너무 씩씩하다), 하다못해 ‘신중현과 뮤직 파워’의 노래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The Men’ 최초 노래는 다르다. 관악기와 전자 건반 악기를 통한 느리고 장중한 도입부를 거쳐(Deep Purple의 <April>을 연상시킨다), 베이스와 드럼의 둔중한 배경 아래 신중현식 특유의 가늘고 날카로운 가성 합창–백 보칼로 빈번히 등장하는–으로 바람 소리 같은 보칼을 이끌면서 결정적 순간에 저음의 바리톤 솔로 보칼을 제시하고 긴 기타 연주로 맺음되는 이 버젼은, 그 가사가 희원태로 제시되는 것이지 현실태로 그려지는 것이 아님을 소리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더욱 어둡게 느껴지고 꿈의 퇴폐성이 역설적으로 부각된다.
<아름다운 강산>은, <빗속의 여인>이나 <봄비>도 그렇지만, 많은 판본으로 끝없이 재생되었던 곡이다. 이선희나 이문세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신중현이 직접 연출한 것들만을 실증적으로 제시해도,
1) 신중현의 기타 연주곡(?)–나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2) The Men(1972)–위에서 묘사한, 가사가 들어간 최초 판본;
3) 엽전들(1973)–<미인> 정서 시대. 같은 밴드의 다른 버젼이 하나 더 있다고 함;
4) 뮤직 파워(1980)–그에 대한 해금이 이루어 진 직후의 ‘훵키(funky)’한 댄스 풍으로 색체가 밝아졌는데, 여기에도 두 버젼이 있다고 함;
5) <<무위자연>> 앨범본(1994)–전통적 장타령 풍이 느껴지는, ‘무위자연적’ 느낌의 버젼
들이 있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데, 이것들의 의미와 위상을 종횡으로 구조화·배치시키며 그 전체적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는 400여곡을 작곡했고, 그가 이끈 가수는 장미화, 송만수, 임아영, 바니걸즈 등등 무수한 유·무명인들이 나열된다). 과연 그 모두를 하나의 역동적 구도 속에 조직화해낼 수 있을까? 버릴 수 없는 꿈이지만, 솔직히 이야기해, 당장은 그저, ‘Add Four’면 ‘Add Four’, 김정미면 김정미 하는 식으로나마 그 음반들이 재생되어 즐길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다…

신중현 음악의 총체적 복원을 꿈꾸는 것은 유한계급이 골동품을 모으는 것 같은 단순한 호사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대중음악의 속깊은 조류과 그 파장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나아가 그 전체적 이해 틀을 재구성하는 일과 관계된다. 그가 우리 대중음악의 가장 전위적인 실험을 주도해 왔기에 이 과제는 한층 중요하다. 그의 광범위한–그러나 감추어진–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제 그 실험을 특이한 예외가 아닌, 보편적 능력의 하나로 바라보고 정립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그는 언제나 시대를 10년쯤 앞서 갔었다. ‘Add Four’의 노래가 호응 받은 것이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가 ‘뜬’ 후였듯, 그의 많은 노래들의 원곡은 흔히 한참 후에 후속 버젼을 통해 확인받고 거슬러올라가 듣게되는 경로를 거쳤다. 그런 경험이 신중현을 신중현답게 하고 지금과 같이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온 자양이었다고 이해하는 것도 일면의 타당성은 있겠으되, 그렇더라도, 그의 경험 다음 단계에 서 있는 자들로서는, 그것을 다시 겪을 필요 없는 공유 자산으로 의식화하고 보편화하여 거꾸로 우리 음악을 10년쯤을 앞당길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앞의 것은 빨리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새로운 경지를 펼쳐나가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일 것이므로, 그렇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의미 있는 아티스트들이 대중의 무시 속에서 ‘언더’ 세계를 오래 헤매야 할테니까 말이다. ‘언더’란 ‘엎’ 세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항 의식이지, 그 자체가 예술적 지향점은 아니다. ‘언더’는 지금의 ‘엎’과 ‘언더’를 경계를 기어이는 허물어내고 그 둘을 더 큰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 –그것이 반항이다–를 다지는 공간이지, 경계를 더욱 나누고 한 켠에 스스로를 가두려려는 공간은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이 아니라, 아니어야 한다.
덧붙여, 신중현의 음악을 총체적으로 복원시키는 류의 작업은 우리 문화의 소모적인 과정을 상당량 제거해 줄 수 있다. 예컨대 표절 문제 같은 것. 요즘엔 악의적인 경우도 많아졌으나, 표절 문제의 태반은 무의식적 기억으로부터 온다. 언젠가 막연히 들었던 소리 요소들이 자기도 모르게 살아나와 본의 아니게 그것을 베껴버린 게 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자료들이 옆에 열려 있어 언제나 다시 들으며 ‘연구’할 수 있으면, 그런 부작용은 사라진다. 이 또한 의식화를 통해 자기 검증의 장치를 마련해 놓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려는 치열함이 오히려 앙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의식’은 예술의 충분 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 조건이기는 하다. 내가 신중현 음악의 총체적 복원이라는 문제에 빗대어 표명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의식적인, 보다 세련된 문화 기반에 대한 꿈이다. 그런 기대가 문학을 포함한 우리 예술이나 삶의 온갖 영역에서 기어이 실천되기를, 나는 간절히 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