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13): 보이는 쉼표와 보이지 않는 쉼표 [두번째]

* 앞 글에서 계속
■ 4행
돌연하게 시선의 방향을 바꿔 두 개의 공간 이미지를 제시하는 4행의 언어 호흡 자체는 아주 간략하다.

1-(4-1)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
1-(4-2)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 //

이런 단순 리듬에 거의 이의가 없어 보이는 만큼, 이 행의 문제는 전적으로 이미지 문제로 수렴된다. 이 두 이미지의 병립은 대립항이 아니라 유유상종의 쌍이다. 그 둘은 유리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닫힌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게다가 그 공간 속의 두 사물, 자동차와 전화는 공히, 다른 공간 사이를 몸이나 소리로 이어주는 기계들이다.
그러나 자동차는 갇혀 있다. 부스의 전화도 “숯검댕이 낀”이라는 묘사 때문에, 그리고 전화를 거는 사람에 대한 묘사가 없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는 왠지 소통이 안되고 있는 듯싶다. 두 이미지는 그러므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이 보이긴 보이면서도(유리) 실행되지는 못하고 닫힌 곳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당연히 이 느낌은 시인의 시선-언어가 포착해낸 몫이다. 그 이미지는 이를테면, 시인이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한 의식-마음의 대리 표상인 것이다. 내리는 눈을 피하고 있는 시인이 자동차 전시장이나 공중전화 부츠처럼 유리에 갇힌 어떤 공간–예컨대 커피숍 같은– 속에서(<<희망의 나이>>의 <사랑 노래 2>에서는 “지하도 질척한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와 소통하고 싶다는 숨은 욕망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막막함 사이에서, 시적 성찰의 시간을 맞고 있음을, 이제 파악할 수 있다.

■ 5행
5행의 호흡 구조는 다시 1행으로 돌아간다.

1-(5-1) 눈이 내린다(,) / 무너질 듯, / 내 몸을 파묻지 않고(,,) //
1-(5-2) 그 눈, / 그 바깥에 네가 있다 //

다만 ‘무너질 듯’이라는 부사적 표현의 애매함이 잠시 단정을 유보하게 한다. 능동형의 이 표현이 뒤의 ‘내 몸을 파묻지 않고’에는 결코 걸릴 수 없으니 ‘눈이 내린다’와 연결되는 건 확실한데, “하늘이 무너질 듯, 눈이 내린다”면 모를까, “(눈이) 무너질 듯, 눈이 내린다”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색한 까닭이다. 그래도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나는 시인에게 이 표현의 재고와 수정을 요청한다).
어쨌든 여기서의 초점은 점점더 거세지는 눈발이다. 이는 1행의 3-(1-1)과 대비되어 더욱 또렸해지는바, 거기서의 ‘내 뺨에 부딪치지 않고’는 ‘내 몸을 파묻지 않고’로 크게 증폭되고 있다. 이 순간에 유념해야 할 사항은, 그것이 시인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충동, 자기 파괴 욕망의 분출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미 눈을 맞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으니까. 그런즉 ‘내 몸에 파묻지 않고’는 오로지 시인의 사념에 불과한 것으로, 시인의 사념이 여기서 한층 흉폭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에 대한 우리식 상상의 단서는 바로 위의 4행에 심어져 있는 듯하다. 눈발 저쪽에 사랑하는 ‘너’를 멀리 놔두고 눈을 맞지 않는 이쪽 자리에 갇혀 바라보기만 하는 ‘나’, 그런 나의 무력감에 대한 또 다른 자아의 자괴감과 분노가 그렇게 자기를 파묻어버리고 싶다는 일종의 파괴 욕망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 6행
2행과 흡사한 호흡 구조로 돌아가는 6행에서, 쉼표는 마지막 파격과 뉘앙스를 만들어내며 시를 마감한다. 1, 2, 5행에서 ‘그 눈’ 뒤에 위치한 쉼표가 ‘그 바깥에’ 뒤로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결과다.

1-(6-1) 눈이 내린다(,) / 말살하듯, //
1-(6-2) 네 육체가 화려하다(,,) //
1-(6-3) 그 눈 그 바깥에, / 네가 있다 //

2행의 2-(2-1)과 6행의 1-(6-1)이 우선 다른 점은 부사적 표현이 1-(6-2)에서 옮겨져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살하듯’이 능동태형이므로 통사 구조상 당연한데, 이에 따라 1-(6-2)의 ‘네 육체’가 부각되는 효과를 낳는다. 나아가, 이미 지적했듯, 1-(6-3)에서 ‘그 바깥에’ 뒤로 이동한 쉼표가 그 다음의 ‘네가’에 강세점을 찍음으로써, 마치 화룡점정과도 같이 그 부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눈은 화자의 ‘내 몸'(5행)을 파묻는 대신 ‘네 육체’를 ‘말살하듯’ 퍼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육체’는 더욱 화려하게 드러난다는 역설적 묘사로 시는 끝맺음되지만, 이 순간, 독자의 의식은 거꾸로 시의 전반부로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특히 2행을 되새기게 되는 이유는, 거기서 도시의 술어였던 ‘화려하다’가 여기서는 ‘네 육체’의 술어가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앞에서도 물었었지만, 그러니까 도시가 곧 ‘너’인가?
나는 이 역시 그렇다고 본다. 지금까지 읽은 너-사랑-육체-도시로 사슬을 이루는 이미지의 연관성도 그렇고, 김정환 시인이 이때까지 노래한 사랑의 대상이 늘 역사, 사회, 민중 등의 거대 담론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시적 전력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특히 이 사랑의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이때까지의 사랑이 너무 추상적이었다는 반성에 기인한 것일까? 시집 전체를 자세히 검토해야 알겠으나, 일별해보아도 ‘육체적 정신'(<다시, 그 후>), ‘육화되는 것'(<피살>) 따위의 표현들이 도처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확인된다. 시인은 최근, 이념과 같은 추상의 틀을 벗어나는 ‘난해한 육체'(<다시, 그 후>)의 문제에 강하게 감전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볼 때, 도시가 사랑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의미심장하다. 거칠게 말해서, 이때까지의 시인에게 도시란 투쟁의 대상에 가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시의 문맥을 따르자면, 의식을 통해 헤어졌던 그 도시가 어떤 구체적 육체성을 지닌 대상으로서, 사실은 자기가 사랑했던 연인과도 같음을 어떤 회한과 더불어 고백하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이 시에서 도시가 눈발 저편에 어떤 거리를 띠고 자리잡은 대상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시인이 그렇다고 시를 읊는 자리는 실상 그 도시 안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이상의 이해와 무관치 않다. 도시를 이념적으로 거부하려 해도 자신의 삶이 애당초 그 안에 육체적으로 놓여 있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러, 그런 실존적 숙명에 대한 ‘나’의 정직한 자기 응시는 한편으로 무력감과 갈등과 자해 욕망을 빚어낸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것일까…
이 시에 담긴 묘한 아이러니 하나도 거기서 얽혀 나온다. 시인의 한 마음이 원하는 것처럼 자연인 눈은 도시를 ‘말살하듯’ 쏟아지는데(이 자연은 예찬의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저 자연이다), 인공인 도시는 오히려 그 너머에 화려한 몸으로 드러나 시인의 다른 마음과 몸을 자극하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