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바다」, 내 청춘의 시

미당이 죽었다…
미당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놀라운 시인이라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인간적 결함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가 놀라운 시인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고, 다시금 그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문학 사이의 이 신비로운(?)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끌린다. 지금, 여기서, 미당의 삶은 그 자체가 문학적 사유와 상상의 대상으로 놓여 있다.
내가 보기엔, 인격이 곧 문학일 확률은 2할도 안된다. 그러나 인간성과 문학성 사이를 잇는 그 복잡한 함수 관계, 그것이 곧 삶 전체의 두터움을 증거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진짜 꼬락서니의 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한 인간의 행태를 윤리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이 사회나 역사라면, 사랑이나 연민의 이름으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 또한 문학이며, 그 둘은 등을 맞대고 붙은 채 태어난 기묘한 쌍생아와도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미당의 시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내 청춘과 함께 있었다. 그 무렵의 그는, 언제나 내 옆에서 내 삶의 다양한 국면들에 다양하게 휘감겨 들었던, 손꼽던 몇 시인들 중의 하나였다. 들끓는 물-불 같던 젊음의 혼돈을 뚫고 나가는 길 위에서, 나는 그의 시에 많은 마음빚을 졌다.
그의 시들의 8할은 ‘하늘’로 덮여 있으나, 그보다도 그의 ‘바다’ 시들을 오히려 더 좋아했던 이유 역시 그 때문이리라. 그 바다는 가령,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에서 보듯, 하늘의 ‘바람’이 낮게 내려와 뒤엉키는, 광막한 실존으로 펼쳐지는 그런 바다이다. 그리움도 조수로 보여주고, 존재의 한 매듭을 난타하는 종소리로 들려주는 그런 바다!

1)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조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2) 잔치는 끝났다더라.

(……)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행진곡>)

그의 바다 시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제목의 <바다>이다. 그 시는 젊음의 모습 그 자체를 그대로 온전히 시적 언어로 전화시키고 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낯선 시간 속으로>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시는, 다시 읽어보니, 거의 어떤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 자체로, 모든 느낌-말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 그냥, 천천히 그 시를 베껴보기로 마음 먹는다. 세속의 온갖 인연을 끝낸, 시인으로서의 미당을 내 식으로 깊이 추모하기 위해…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물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이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위에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알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위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알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