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12): 지독한 상징–흑염소의 시학

문학동네로 올라가는 명륜동 도로변에 바오로 흑염소 사당 하나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당 앞 거리에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검은 흑염소 한 마리의 울음이 낮게, 아주 낮게 깔려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몇 날인가 계속 불타는 아궁이 위 항아리 속에 담겨진 채 불타다 불타다 물로 변해버리는, 비명을 지르다 지르다 침묵으로 변해버리는 그 물– 침묵의 울음소리. 몇 날 며칠을 불에 태워져야 순하디순한 물, 흑염소탕으로 변하는 흑염소의 에고(ego). 그 아궁이 불을 보살피는 사람이 연금술사인가, 그 항아리 안에 든 흑염소, 혹은 흑염소의 혼, 혹은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자신이 자신이 연금술사인가, 아니면 그 거리를 지나면서, 낮게 깔린 자욱한 안개 같은 그 검은 울음소리의 그물에 매번 발목이 사로잡히는 내 자신이 연금술사인가.
저 20세기의 상점으로 변해버린 바오로 흑염소 사당. 저 몇천 년 전의, 저 이방의 상징이 아직도 살아 “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증거한다.
상징이란 지독하게 살아낸, 살아 달이고 우려낸 삶의 이미지이다. 살아내지 않은 것은 상징이 될 수 없다.
— 최승자, <바오로 흑염소>
(시집 <<연인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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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었던 비평가 김현은 ‘뜨거운 상징’이란 표현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었다.

말은 쉬우나, 몸으로 버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버티지 않는 한 버팀은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상징은 (…) 여러 사람의 공감·반발·저항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뜨거운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 전집 16권, pp. 124-5)

그로부터 10년 뒤, 최승자의 마지막 시집 속에 실린 위의 시는 이제, 시 그 자체로 김현의 그 ‘뜨거운 상징’을 ‘지독한 상징’으로 변형시켜 이야기하는, 시로 시론을 밝히는, 시에 대한 시로 읽힌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들을 새삼스런 시선으로 돌이켜보면 유난히 시나 시인에 대한 시들이 많은데, 이 시에서 그 중요한 한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감이다.
온몸으로 살아낸 지독한 상징으로서의 시, 최승자 시인은 그것을 흑염소탕에 비유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도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과도 같은(이 표현은, 시가 종교적 깨달음이나 초월 이전의 삶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로 향해 가는 삶을 사는 사울의 몸을 희생-염소로 삼아, 그 살을 끓이고 끓여서 그것의 정수인 약물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시작(詩作)인 것이다. 그때 시는 “침묵의 울음소리”이고, 침묵을 소리로 만든다는 점에서 시작은 연금술과도 같은 것이 된다.
그러면 시인이 곧 연금술사인가? 위의 시는 그 물음을 하나의 물음으로 제기하고 있다. 화자로서의 시인은, 흑염소탕을 끓이는 시인이 연금술사인지, 흑염소로서 시적 대상이 된 사울이 그런지, 아니면 흑염소의 울음소리를 듣는 독자가 그런지를 스스로 되묻는다. 그런데 가만 따져보면, 그 셋은 이미 뒤섞여 있다. 울음소리의 “그물에 매번 발목을 사로잡히는 내 자신”은 그 울음소리-시의 독자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해 위의 시 <바오로 흑염소>를 쓴 시인이다. 그리고 사울이라는 “이방의 상징”은 “아직도 살아 ‘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증거”하는, ‘나’의 분신이다. 그 셋은 셋이지만 하나이며 하나면서 셋인, 또다른 연금술적 존재(들)인 것이다.
‘나’ ‘너’ ‘그’ 등의 분리가 삶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한 생각으로서의 인류사> 속에 비교적 명료히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런 객관적 성찰보다 시인을 “발칵 깨[우는]” 생각은 “모든 특별한 관계는 카니발리즘입니다”라는 것이다(<러스코의 추억>). 상대의 살을 먹어 내 몸의 일부로 만드는 삶, 서로의 살과 살을 섞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그 꿈을 극단으로 몰고나갈 때, “자웅동체”(<유카 나방이>)의 존재를 이루고 싶다는, “저 두 마리의 새는 내 안에서 울고 있나”(<연인들 2>)라는 물음을 희원으로, 더 나아가 선취된 환상으로 바꾸는 새로운 상상적 연금술이 번져나간다.

내 눈빛이 네 흙의 눈빛과 만나니
너 비로소 하늘빛으로
살아, 날아오르는,
이 빛의 혼인, 축복의 환한 빛,
(<연인들 1>)

이 시적 환상은, 그 동안의 최승자 시인에게 익숙한 독자들로서는 너무나 이질적이기까지하다. 그래서 시집 끝에 놓인 이 돌연함 혹은 반전(<연인들> 연작 3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지만, 그 점은 일단 제껴 놓도록 하겠다. 그 대신, 그런 꿈이 보다 낮게 끌어내려져, “일생을 온몸으로 채우[고]” “때우[는]”(<상경>) 실제 삶의 차원에 얼룩져 나타나는 모습을 살핌으로써, 우리가 잘 아는 최승자 시인에게로 우선 돌아갈 때, 우리가 만나는 구절은 이런 류의 것들이다.

통과하라, 나를.
그러나 그 전에 번역해다오, 나를.
내 침묵을 언어로,
내 언어를 침묵으로.
그것이 네가 내 인생을 거쳐가면서
풀어야 할 통과료이다.
(<번역해다오>)

실제 삶 속에서의 ‘너’는 나를 통과해 가버리는 너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씌어진대로 읽히고 싶지 않”(<흔들지 마>)은 ‘나’를 새롭게 다르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존재로서의 너이다. 여기엔, 시인의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며 겹쳐져 있다.
시인이 꿈꾸는 것과는 반대로, ‘너’는 ‘나’를 지나간다. 아니,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젊음이 젊음답게 맺히기도 전에, “오 개새끼 / 못 잊어!”(<Y에게>, <<즐거운 일기>>, 1984)라고 느낌표를 붙였을 때부터, “세계가 일평생이 상처였고 / 그 상처 안에 둥우리를 튼 / 나의 현재 또한 상처”(<다스려야 할 상처가>, <<기억의 집>>, 1989)였다. 맨 위의 <바오로 흑염소>가 말하는 시가 왜 “검은 울음소리의 그물”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시인은 같은 시집의 <둥그런 거미줄>이란 시에서,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은 망상(網狀) 조직이다”이라고 말한다. 삶으 공간은 온통 고통의 거미줄이 쳐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한가운데는,

그 망상의 중심 하나, 맹목점(盲目點),
보편의, 눈먼 장미 한 점.

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그 맹목점, 눈먼 장미 한 점–눈멀었지만 아름다운 중심점–이 바로 시가 아닐까. <<즐거운 일기>>의 <시인>이란 제목의 시에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 거미줄을 치고 있”다고 적힌 것과 상상력을 연관 시키자면, 그렇다. 시는 고통으로 눈먼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장미랄까.
이르건대, 그러니까 시는 절망적인 희망이다. 시인 자신이 “오 쓴다는 것, 써야한다는 생각에 /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워드 프로세서>, <<내 무덤, 푸르고>>, 1993) 깨닫는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시는 내가 죽어도, 아니,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 “우리의 삶”(<서역 만리>) 속에서, “먼 길을 걸어 나는 기필코 그대들에게, / 비로소 최후로 닿고 싶다”(<미망 혹은 비망 12>)는,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처절한 희원인 셈이다(문득, 김수영이 생각난다).
그렇게 보면, 시는 “아직 열리지 않은, /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시 혹은 길 닦기>, <<기억의 집>>, 1989). 그 길의 궁극적 이상은 어쩌면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 “그때 비로소 /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 새로 하나 트이[는]”(<미망 혹은 비망 8>)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그 길 위에서, 얼마나 “희망은 길고 길고 질기며 / 절망은 넓고 깊은 것”(<미망 혹은 비망 15>)인지를 얼마나 몸의 삶으로 겪고 견뎌내야 하는가…

■ 곁소리
다시 최승자 시인을 읽다보니 지난번 김혜순 시인의 경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데, 두 시인은 여성 특유의 공통된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최승자 시인이, 버림받음에 대해,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Y를 위하여>)

라고 처절하게 노래할 때, 이 진술은 김혜순 시인이 비슷한 시적 상황에서 보여주는, 받아들임·죽임·다시-낳음(출산)의 상상력과 거의 완벽하게 겹쳐진다. 이 문제는 요즘의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을 상상력의 구조 문제로 심화시킬 때 다루어볼만한 문제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