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11): ‘사랑 기계’의 악몽

갑자기 내 방안에 희디흰 말 한 마리 들어오면 어쩌나 말이 방안을 꽉 채워 들어앉으면 어쩌나 말이 그 큰 눈동자 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백마 안으로 환한 기차가 한 대 들어오고 기차에서 어두운 사람들이 내린다 해가 지고 어스름 폐가의 문이 열리면서 찢어진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시커먼 그녀가 뛰어나오고 별이 마구 그녀의 발목에 걸린다 잠깐만 기다려 해놓고 빈집에 들어가 농약을 마시고 뛰어나온 그녀 뛰어가면서 몸 속으로 들어온 백마를 토하려 나무를 붙들지만 한번 들어온 말은 나가지 않는다 말의 갈기가 목울대를 간지르는지 울지도 못하고 딸꾹질만 한다 말이 몸 속에서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그 희디흰 말이 몸 속에 새긴 길들을 움켜쥐고 밤새도록 기차 한 대 못 들어오게 하면 어쩌나 농약이 성대를 태워버려 지금껏 말 한마디 못 하고 백마 한 마리 품고 견디는 그녀에게 물으러 가야 하나 어쩌나 여기는 내 방인데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스리 말 한마리 우두커니 서 있으니 어쩌나

— 김혜순, <백마>
(<<불쌍한 사랑 기계>>, 1997)

 

***

 

하고 신비한 초현실주의적 풍경화를 그리는 김혜순 시인의 <악몽>은, 그것을 처음 읽는 순간 그 강렬함에 감전된 이후 내 머리 속에 박혀버린 드문 시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감전된 느낌을 설명해보고 싶었으나, 그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찾은 것은 금년에 새로 나온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를 읽고나서, 그리고 그녀의 앞선 시집들을 다시 훑고나서였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긴하다. 특히 <<우리들의 음화>>(1990) 이후의 시편들은 그 상상 세계가 매우 중층적이면서도 동적이어서 그것을 자세히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연구’의 수준을 요하는 듯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 직감에 의존한 몇가지 단서들만을 소묘해보려 한다.

 

■ ‘사랑 기계’로서의 몸
위 시가 스스로 해명하고 있듯이, 첫줄의 ‘방안’은 ‘몸 속’을 일컽는다. 그리고 그 몸이 곧 사랑 기계이다. 그것도 불쌍한 사랑 기계이다.
왜 기계인가? <<달력 공장>>의 <다시, 불쌍한 사랑 기계>에 의하면, 기계적으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너는 밤마다 이 기계를 하러 오”고 “너의 손이 닿자마자 기계 전체가 살아난다”. 언뜻 자조적으로 보이는 이 표현은, 그러나 이 기계가 “너를 먹고 먹을 뿐”인, ‘너’를 죽이는 기계라는 묘사로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그 몸은 “문 없는 기계”다. 엄밀히 말하면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는 기계-방이다. ‘너’는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가 없다. 위 시에서 말을 품은 ‘그녀'(결국은 ‘나’지만)의 몸이 그렇듯이.
그런데, 그렇게 ‘너’만 갇히는 것도 아니다. 위 시의 ‘나’가 방에 갇혀 있듯이, 사랑 기계 자체도 갇혀 있다. 갇혀 있음은 시인에게 단절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불쌍한 사랑 기계>>의 <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로 돌아와 보면, 그 기계(들)는 ‘비’라는 “물로 만든 철조망”(‘불쌍한’이라는 형용사를 염두에 두면 그 비는 눈물일 수 있다)에 갇혀 “쇠줄에 묶인 개처럼” “짖고” 있다. “전화기를 붙잡고”. 그 기계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라고 호소하지만, 그건 “몽유병자”의 짓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상황은 이렇다. ‘너’ 혹은 ‘그 사람’은 시적 화자의 호소는 듣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고 바꾸려 하지는 않고, 밤마다 그녀-기계를 하러 와서 그 속에서 죽는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겨울 나무>(<<불쌍한…>>)라는 시의,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 없는 일일 거야, 아마.

 

라는 구절을 보면, 아마도 그와의 사랑은 깨어져 있어도, 그 사랑의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몸에 찍혀진 후, “나를 자꾸 상처로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문신>, <<달력 공장>>). 몸이 그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은 왜 이다지도 깊은 거니”(같은 시)라고 반문하는 그녀는 몸의 삶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녀에겐 슬픔마저도 “말할 수는 없어도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이다(<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달력 공장>>).

 

■ 말과 달
말(馬)은 흔히 남성성을 상징한다. 김혜순 시인에게 있어서도, 가령 <<우리들의 음화>>(1990)의 <장롱>에 나오는 “숫말 같은 아버지”의 이미지와 <<달력 공장>>의 <나는 나의 그림자 속에 심겨진…>이라는 시의 “아버지, 내 몸에서 나와 주세요”라는 구절을 연결시켜 떠올리면, 위 시의 ‘그녀’ 몸 안에 든 말이 남성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아버지’는 곧이곧대로의 아버지는 물론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어지면서 차츰 풀리겠지만(일례로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은 존재의 복수태를 잘 보여주는바 ‘나’는 무수한 ‘나’들인데, ‘너’-‘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여러 모습을 한 ‘그’ 중의 하나이다. 그 ‘그’ 는 “이십 년 전의 그놈”(<명왕성>, <<달력 공장>>)으로부터 시작되어 줄기차게 출몰하는, 이십 년 전에 사랑을 부수고도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로서, 하나이면서 다수이며 다수이면서 하나인 그이다.
20년 전의 첫 시집 <<또 다른 별에서>>(1981)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조짐이었다.

 

피투성이 걸래, 그 사람이 멀어진다
기다리던 신랑이 멀어진다. (<기다림>)

 

그 조짐은 두번 째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너는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욕설과 증오가 반죽이 된
하나의 찬란한 이름이 되었다 (<사연>)

 

그때부터 “상습적 자살”을 꿈꾸게 되는 그녀의 가슴에는(<상습적 자살>), “비상 먹은 달”이 떠오른다(<일몰>). “완벽한 죽음의 얼굴”인 그 달은 “우리의 깊은 잠을” “밤 처녀의 혼령을 / 웃으며 빨아 먹는” 무서운 달이다. 달이 여성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상의 하나라면, 이 달은 여성의 불모성을 표상하는 달이다.
그런데 놀랍다. 어떤 느닷없는 반전이 <<아버지가 세운…>> 속에 치솟는다. 과연 무엇이, 이 시집이 끝나기 전에, 그녀로 하여금, 그 “완벽한 죽음을 향하여 / 온 생명 다해 빛을 퍼붓”게 만드는 것인가(<내가 달을 비춘다>). 분명치 않지만, 그것 또한 몸으로 스며드는 그 무엇, 어쩌면 몸 그 자체의 어떤 욕망이다: “스민다, 뱀이 / 내 몸 속으로 // (…) // 스며들어온 독이 / 나를 일으켜세워 / 걸어가게 한다 / 금단의 나무 밑으로”(<오늘의 이브>).
그래서이리라, 시인이 그 시집의 맨 끝에서 <다시>라는 제목으로, “큰 달 떠오르는 저녁”에,

 

새 몸주님 떠오시라
(…)
너른 태반가에
돗자리 깔아 놓았으니
돌아와 누우시라
정말 또 한 번 속아주고 싶은
새 몸주님

 

이라고 무당처럼 청원하는 것은. 이때의 새 ‘몸주님’은, “또 한번 속아주고 싶은”이란 구절로 짐작하고, 다음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의 “나는 검은 강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아직 안 나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지는 해 속에서 그가 너울너울 터져나왔다”(<저녁 달>)라는 구절로 확신컨대, 전혀 새로운 ‘그’가 아니다. 그녀는 막 태어난 “핏덩어리 시계”(<핏덩어리 시계>, <<불쌍한…>>)처럼 거듭난 ‘그’를 기다릴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다시 돌아온 그가 새로운 ‘애인’처럼 다가오는 그가 아니라(‘애인’이란 어휘가 <<불쌍한…>>부터 등장한다), <<음화>> 속의 표현을 빌면 여전히 “다시 태어나기 싫은” 그, <<불쌍한…>>의 표현을 빌면 “노인”으로서의 그, “살갗 주름 사이 마다 / 죽음을 재운 징그런 그”(<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3>)라는 데 있다. 노인으로서의 그이므로, 그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인즉, “내 몸에서 나와주세요”라고 외치게 되는 숫말로서의 그에 다름아니다.
잠시 솟구쳤던 새로운 열망의 새로운 좌절로 인해 시인의 고통은 더욱 심화되는바, 위의 <백마>는 바로 그 깊은 추락의 자리에서 빚어지는 악몽이다.

 

■ 검은 거울과 푸른 거울
위 시에는, 말이 들어올까 두려움에 떠는 ‘나’와 나가지 않는 말을 품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가 병렬적으로 교직되어 있다. “시커먼 그녀”는 “내 사랑하는 검은 거울, 그림자”로서의 또 다른 나이다(<현기증>, <<불쌍한…>>). ‘나’가 음습한 검은 거울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삶의 궤적 탓이겠으되:

 

나, 검은 거울 속 그 나라에 사로잡혔네 (<빙의>, 같은 시집)

 

그 검은 거울 속의 고통은 푸른 거울과의 대비로 인해 더욱 진하게 드러난다. 필시 “아, 푸른 거울!” 하고 느낌표를 단 “하늘” 거울은 이상적 꿈을 반영하는 거울이다(같은 시). 그것이 비추는 것은 “태양”의 꿈이고, 완전한 교감의 합일의 꿈이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까맣게 일어선다 오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더 강하게 느끼는 ‘그’는, 바람-공기처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넘나듬을 막는 거대한 백마이다.

 

■ 들어옴(들어감)과 나감(나옴)
다시 위의 <백마>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나’는 이미 말 안에 들어가 있는데, 나는 내 안에 말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말은 우두커니 서 있다. 검은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정녕 그 말이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더 나아가 나를 나로부터 나가지도 들어지도 못 하게 만들면 어쩌나, 의심스럽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것인가.
시인의 푸른 거울 속의 꿈은 단순히 수동적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다. 시인은, 그가 내게 들어오는 만큼 나도 그에게 들어가고자 한다. 그 상호적 양상과 그것이 원하는 상승의 이미지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잠들려고 하면 내 몸 속의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출구를 찾아라>)

 

온몸으로 두근거리는 내가
잠든 너의 몸 속을
한밤중 소리 없이 오르고 있다 (<서울의 밤>)

 

내가 그 속에서 그의 일부가 되고, 동시에 그가 내 속에서 나의 일부가 되는 것. 하지만, “출구를 찾아라”라는 외침 속에는, 들어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다시 나와야만 비로소 사랑의 행위가 완성된다는 야릇한 속뜻이 숨어 있다. 다시 나가야(나와야) 사랑이 완성된다? 여기서 시인의 상상은 “다시 태어나려고요”라는 희원으로 길을 뚫는다(<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달력 공장>>). 사랑하는 사람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다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위 <백마>에서 “몸 속으로 들어온 백마를 토하려” 하는 ‘그녀’의 모습은 임신한 여자의 고통스런 출산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그게 악몽의 거울로 화하는 까닭 그 백마가 끝내 아가로 새로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상관된다. 아가가 태어나지 못하듯, ‘그’가 ‘나’의 안에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가 내 안에서 죽음은 곧 나 역시 죽음을 품고 죽음을 뜻한다. 반대로, 출산을 전제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태아”가 되는 것, “귀처럼 웅크린 몸에 탯줄처럼 / 늘어진 이어폰을 꽂고 전속력으로 / 그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귀>).
그 배면에는, “왜 이리 나이 먹어서도 그 새파란 시절로, / 그리로 자꾸 돌아가는지”라고 내뱉을 때의 그 마음을 몸의 현실로 받아들이려는 강렬한 열망이 숨어 있다(<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만큼>, <<달력 공장>>). 이 열망은 아주 오래 전부터, 다소 의뭉하게 드러났었다. 가령 <<아버지가 세운…>>의 <딸을 낳던 날의 기억>은 출산의 순간에 떠오른 의식(?)의 거울 속에 “나보다 젊으신” 어머니,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 등이 비춰지면서 딸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 / 조그만 어머니”가 되는데, 이를 통해 나 딸의 딸이 되는 전도된 상상 세계를 펼쳐보인다. 그것이 신생의 상상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신생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가는, 몸 속으로 들어온 말을 토해내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농약을 마시는 ‘그녀’의 영상 속에 진하게 얼룩져 있다.

 

■ 끝말: 다시 악몽을 넘어서?
<백마>는 시인의 그러한 절망적 열망을 가장 가장 처연한 시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는 뛰어난 시다. 시집 <<불쌍한…>>은 그 이미지들의 무정형적 움직임들로 가득 번져 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어둠은 <<달력 공장>>에서도 그 표층을 덮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정말이지 이상하다. 우리가 <<달력 공장>>을 헤매다 보면, 이 또한 그 근거를 찾기 힘든 채 그대로, 희망을 거쳐 더 어두워진 좌절 속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시인의 열망이 싹트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몸이 남모르게 꾸는 꿈은 그다지도 강한가. “모두 몸 밖으로 나가겠다는” “안달”(<자전거>)이 끓어오름을 느끼며, 그것이 다시금 헛된 환상이더라도, “마치 너를 처음 만난 것처럼 / 눈을 휘둥그레”(<잠 들기 전의 예고편>) 뜨는 ‘나’! 정녕,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는” 새로운 “저 지독한 희망”(<뇌>)은 어디서 솟구치는 것일까? “느닷없이, 봄이다!”(<아수라, 이제하, 봄>)라는 단말마는…
그 대답을 위해서는 다음 시집을 기다려야 할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