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새로운 심연

TV 방송이 온통 올림픽 중계로 들떠 있던 지난 9월말의 어느 날, 대체 얼마만이었던가, 참으로 오랜만에 게으름을 떨치고 미술관을 찾았었다. 또 뭉게작거리다가 ‘백남준의 세계’ 전람회를 놓칠까봐 문득 마음을 다잡고 발길을 내딛은 것이었는데,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최근 레이저 예술이 보여준 기묘한 심연에 새로운 감동의 눈을 떴기 때문이다.
전시된 상당수의 작품은 이미 몇 년 전에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보았던 것들이었지만, 그것들 또한 최근 작품들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새롭게 보였고, 백남준 예술의 독자적 역사랄까, 그런 문맥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었다. 현대 미술이나 비디오 아트에 대한 충분한 소양이 없어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에만 의존한 것이긴 해도 말이다.
솔직히, 나는 백남준의 초기 퍼포먼스 작업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비디오로 기록되어 남아 있는 그 작업들은 이번 전시회에서도 틀어주고 있었는데, 일상의 틀에 기습적인 충격을 주려는 의도는 알겠으되, 좀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고, 일회적 해프닝 이상으로 다가오는 감동의 여운과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가 독창적인 예술가임을 분명히 시위한 것은 역시 비디오 작품들, 특히 70년대 중반의 작품들을 통해서이다. 70년대를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그 무렵부터 비로소, 단순히 새로운 예술적 매체를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 이상으로, 독자적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감수성이 작품 속에 투영된다는 데 있다.
그 무렵의 작품들은 적어도 두 가지 예술적 의도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TV와 같은 새로운 매체를 반-인간적인 문명의 위협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감동과 명상의 가능성을 여는, 인간이 부리고 향유해야 할 예술적인 것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연장선에서, 그것들을 인간 및 자연과의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TV 정원> 등에 대규모로 펼쳐진 이 의도는 아마도 60년대의 ‘상호 작용’ 개념에서부터 싹튼 것이리라.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아직 너무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다. 역설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동적 영상을 사용함에도 느낌은 반대인 탓에 나온 것인데, 왠지 그 영상들은 대부분 화면 속에 평면적으로 갇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실물의 부처 조각과 그것을 비추는 정지된 TV 화면의 대면을 명상적으로 맞세워 놓은 <비디오 부처>나 TV를 들여다보는 ‘생각하는 사람’의 패러디인 <TV 로댕> 같은 소품이 우리 마음 속에 더욱 큰 동적 파장을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무렵의 백남준 식 전자파가 그려내는 영상들은 그런데, 전자파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지는 몰라도, 너무 방향 없이 방사적이어서 시각을 쉽게 어지럽히고, 또 너무 건조한 물질성을 띠고 있다. 사실, 그 앞에 오래 서 있으려면 육체적 피로가 금방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 실제의 물과 입체 공간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비디오 영상을 사용하면서도, <비디오 물고기> 시리즈나 <몽고 텐트> 전혀 다른 공간적 깊이를 얻고 있다. 여기가, 아마도 백남준이 위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쳐 고뇌한 모양이구나,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긴 띠로 이어지는 <비디오 물고기>는 TV 화면 앞에 수초와 물고기들이 흔들리는 어항을 놓음으로써 비디오 영상을 깊은 곳으로 밀어 넣으며, 그것이 그 앞의 물이나 생명의 실체와 겹의 관계를 이루게 만든다. 한편, <몽고 텐트>는 실제로 쳐 놓은 몽고 텐트 안에 돌부처들을 둘러 앉혀 놓고 그 배면의 천막에 영상을 비추는데, 천막은 전자파를 방사하는 게 아니라 빨아 들이고, 때로 검은 돌부처 위에 드리우는 영상은 그 입체의 굴곡 위에서 변형되는 이미지들을 신비롭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의 시간을 건너, 그는 전혀 새로운 돌파구를 열고 레이저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 사이에 그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 등, 일종의 범세계적 집단 창작이며 이벤트인 위성 네트워크 프로젝트들을 실험하지만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러 시간에 걸쳐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충돌시키며 동시에 스며들게 만들려 했으나, 연결의 매듭들이 산만했고 시간이 갈수록 집중력도 떨어졌다.
레이저 작업은 우선, 그 체험 이후 그가 장인적 창조 작업으로 돌아온 것을 뜻한다. 그리고 전자파의 무방향적인 방사성과 감각상의 건조성, 깊이의 부재를 레이저라는 새로운 질료(?)의 창조적 활용을 통해 극복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물과 거울의 방이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비디오 물고기>의 물과 어항처럼 영상과 양립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분리의 한 형체로 새로운 체험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는 떨어지는 물과 솟구치는 빛의 찬란한 결합이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내리는 인공 폭포의 여러 수직적 물줄기들을 거슬러, 지그재그로 대각선을 그리며 엇갈리는 두 줄기 레이저 빛은 수시로 색감을 바꾸면서 폭포의 단면 구도에 상승의 역동성을 부여하는데, 파열하는 물방울들은 직선의 레이저 빛줄기를 흔들며 점점이 반짝이는 수도 없는 보석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흡사 한편으로는 상승과 하강, 다르게는 영원성과 순간성이 어떻게 서로에게 의존하며 맞물린 전체로 융화하는가를 보여주는,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 자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고 들어가려는 어떤 거대한 문처럼 보인다. 과연 이 작품의 전체적 형태는 거대한 문이다.
그 물과 빛에 젖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보일까? <삼원소>는 어쩌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원통, 삼각통, 사각통 속을 유리의 방으로 만들어–마치 어린 시절에 들여다보던 요지경처럼– 그 안에 레이저 빛줄기를 반사하게 만든 이 작품들은 지극한 기하학의 소산이다. 그러나 기하학의 의식을 넘어서서, 엇갈리는 광선들은 온갖 신비로운 문양을 빚어내고, 더불어 거울 효과에 의한 원근법을 통해 저 깊은 곳으로 수렴되어 들어간다. 아득하고 검은 우주의 심연으로! 그때, 광선의 문양들은 우주의 저 끝을 향해 우리를 안내하는 하나의 길고긴 관(管/棺)-통로가 된다.
아, 저토록 깊은 우주 앞에서 고작 이 자리에 있는, 필사의 숙명을 지닌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심연 앞에 선 인간, 그러나 거기서 돌아서지 말고 그 끝을 향해 여행해야 하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