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10): 죽음의 삼인칭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덕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기형도, <여행자>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

* * *

기형도 시인은 때이른 죽음과 함께 신화로 축성되었으나(쓸모없는 탄식이겠으되, 정녕 그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가!), 젊은 문학적 신화가 흔히 그렇듯, 그 안에서는 그의 독서 체험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평론가 정과리도 지적하고 있는바,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비유, 정황, 구문 등에서 다각적으로 드러나는 이성복 시인의 영향이다(평론집 <<무덤 속의 마젤란>>, pp. 95-96). 하지만, 여기서 내가 찾고 싶는 것은, 그 영향을 넘어서 무엇이 기형도 시인을 기형도 시인답게 만들고 있느냐는 물음의 한 대답이다.
내 판단에, 기형도 시인을 이성복 시인과 가장 가깝게 만들고 있는 점은 시적 구성 방식이다. 기형도의 유고 시집과 이성복의 첫 두 시집을 비교할 때, 특히 어떤 시적 감응을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정경화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두 시인 공히, 그 장면 제시의 세부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는 지극히 초현실적 혹은 비현실적인, 아주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준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턴가 두 시인의 길은 갈라지고 종래엔 그 흐름의 지향점이 아주 멀리 벌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갈라짐이 인칭의 사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요컨대, 처음엔 삼인칭 일인칭의 동시적 얽힘을 한 화면으로 정경화하여 제시하는 방식에서 공통성이 느껴지지만, 이성복 시인이 점차 그것을 일인칭으로 수렴시켜 나가는 반면, 기형도 시인은 거꾸로 삼인칭에 수렴시켜 나가는 데서 전혀 다른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차이는 결국 두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인간 관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성복의 시들이 가족이나 연인과 불화할수록 더욱 그 불화 속에 들어가 얽히며 끝내 그 불화의 삶을 견디고 뚫고 나가려 하는 것과 반대로, 기형도의 시들 속에서 그들은 먼 추억으로만 남게 되거나 아예 소멸해버리는 것도 그런 시각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성복에게서나 마찬가지로 기형도에게서도 고통스런 “위험한 가계”의 기억(<위험한 가계·1969>), 시에 입문시켜준 “떠돌이 사내”의 기억(<집시의 시집>), 허망하게 잃은 “가엾은 내 사랑” 의 기억(<빈 집>) 등, “추억거리는 많”지만, 이성복과는 다르게 그 추억은 철저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추억에 대한 경멸>).
이 차이로부터 인칭 사용의 차이가 나온다. 처음 차이를 구상화하는 것은 이인칭이다. 이성복은 고통스러워도 버릴 수 없는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획득하겠다 듯, 갈수록 처절하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연인 등을 가리키는 이인칭에 집착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기형도의 이인칭은 구체적 대상을 버리고(또는 잃고), 점점 기쁨, 이별, 탄식, 희망, 공포 등의 추상으로 환원된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등). 그 과정 속에서 ‘우리’란 “한때의 아름다운 불씨”로 먼 과거로 말려나게 되고(<폐광촌>), 기어이는 “빈 집에 갇”힌 일인칭만을 남긴다(<빈 집>).
삼인칭은 이제, 그 홀로된 일인칭 앞에 낯선 자의 틈입처럼 떠오르리라. 아니, 그것은 틈입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음을 보여줄 뿐인데,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다. 예를 들어, 같은 안개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성복 시인의 <자연>과 기형도 시인의 <안개>를 보자. 이성복 시인의 경우엔,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던 ‘그’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 “무엇인가를 밀어졌혔”는데 “그건 문이었고”, “그가 일으키는, 나는, 물결이었다”고 진술된다. 반면, 기형도 시인의 안개 속에서, ‘그'(‘그들’)는 “앞서간 일행이 천천히 지워져 갈 때까지”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단지 “서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복의 ‘그’는 어쨌든 ‘나’에게로 다시 다가와 접촉하고 작용하는데, 기형도의 ‘그’는 결코 ‘나’에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혹은 ‘나’가 ‘그’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늙은 사람>)

공원에서 한 늙은이를 바라보며 적고 있는 이 구절은 얼핏 자기만의 완강한 세계가 있어 그의 틈입을 거부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런 말 자체가 정반대의 마지막 안간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그 늙은이처럼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나 또한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에 있다는 독한 깨달음이 엄습할 것이기 때문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그러니까 어쩌면, 단지 내가 그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가 나를 떠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
(<오래 된 서적>)

다시 그러니까, 나도 그도, 모두가 서로서로를 피하고 자기 속에 유폐되는 관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오후 4시의 희망>을 보면, 한 방 속에 있는 ‘그’ 와 ‘나’가 제각각 어떻게 “예정된 모든 무너짐” 속으로 빠져드는가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삼인칭의 ‘그’는 여기서 ‘나’의 다른 모습에 다름아니다. 이 글 머리에 베껴 놓은 <여행자>는 바로 그 구별이 무화되는 자리에 위치한 시이다.
위 <여행자>의 첫 행은 ‘그’에 대한 객체적 묘사로부터 시작되는 듯이 보이고, 그 연장선에서 4행의 ‘나’는 ‘그’의 내면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3행의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진술은 그 절대적 결정을 유보시키는데, 6행에서 “그는∼” “나는∼”이 겹쳐진 뒤에는, 7행의 “중얼거린다”의 생략된 주어는 ‘나’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고, 8행에 이르면 “그럴 수도 있다”는 판단의 주체가 비로소 숨겨져 있던 ‘나’로 드러난다. 내가 나를 그로 보면서 그의 내면인 나의 목소리를 이중으로 뒤집어 발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끝에 이르러 주어 ‘나’는 생략되어 있다. 그나 다름없는 ‘나’는 굳이 ‘나’ 일 까닭이 없으니까.
요컨대 그가 나고 내가 그다. 그와 나 사이에는 차이는 없다. 이것은 물론 황지우가 “너는 나다”라고 말할 때 표명되는 인간적 연대감과는 전혀 반대인, 몰개성으로 무형질화되는 인간관의 명제이다. 그-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무엇이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알 수도 없는 사이에(<여행자>), 어느새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물 속의 사막>)라고 탄식하는 익명의 존재로, ‘그’로 전화된다. ‘나’의 의식 속에서 ‘그’가 ‘나’를 완전히 먹어버린 것이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병>)

위 시의 “낯선 풍경화”를 “낯선 사내의 얼굴” 또는 “낯선 그의 얼굴”로 바꾸면 기형도적 문맥은 더욱 분명해진다. 주어를 잃고 그가 되어버린 나, 나는 애당초 삶의 주체가 아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여행자>)를 사용했던 것은 내가 아니다. “나의 육체를 사용했던” 것은 “이별들” “흘러가버린 기쁨” “무책임한 탄식들”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 등(<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나 밖에서 오는 어떤 추상적 힘들이다. 앞서 이인칭의 사용이 그 추상들을 향해 모두어져 간다고 했던 것도,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마주보아야할 마지막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감추고 있는가
(<어느 푸른 저녁>)

에서 적시되는 어떤 ‘법칙들’, 내 의지를 넘어서 나를 지배하는 힘들이다. 그런 깨달음 앞에서 삶의 환상에는 종지부가 찍히고, ‘나-그’에게는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절규만이 남는다(<여행자>). 그때, 어차피 나나 마찬가지인 그도, 내가 “검은 페이지”엿듯 검게 다가온다. 죽음의 직접적인 그림자처럼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백야>)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