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에 대한 짦은 생각

지금부터 몇 시간 전, 추석 날 저녁 7시, 서태지의 복귀 공연 녹화 프로그램을 보았다. 여러가지 추억과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방송이었다. 왜 여러가지 추억이었냐 하면 내 청소년 시절의 클리프 리챠드 내한 공연이나 텔레비젼으로 본 초기 비틀즈 공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며, 왜 여러가지 상념이냐 하면 요즘의 문화 일반이나 문학 현상의 문제에까지 생각이 번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은 짧은 몇 마디만 적겠다.
이 프로그램에서 본 가장 큰 놀라움은, 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은퇴’를 선언한지 4년 이상이 지났는데도(요즘 같이 순식간에 흐르는 대중문화 상황 속에서 4년여라니!), 아직도 그에 열광하는 젊은 ‘매니어’ 층이 광범위하고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서태지가 그들의 마음 깊은 어떤 응어리를 사회적 표면으로 드러내고 폭발시키는 데 대해 아직도 유효한 음악적 기재임을 증명하고 있다. 헌데, 내 의심은 그 기재가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열려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얼핏 볼 때, 서태지는 음악적 감각은 더할 수 없이 명민해 보인다.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세대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고통과 표현 욕구를 나름대로 읽고 있었고, 또 그것을 자기 식으로 형태화했다. 그런데 혹시, 이 부분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개인으로서 자기 식의 형태화를 감행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수의 청소년 대중에 파급되었을 때는 문제의 모양이 달라진다. 자신을 스스로 형태화하지 못하는 대중은 주어진 형태의 모델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 주어진 형태에 자신을 의존하는 순간, 그것으로 모든 의식의 초점이 모아지며 다른 비정형의 문제들은 그 순간 지워져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서태지의 자기 형태화는 랩과 록을 결합한 하드코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랩의 요소가 강조되었고, 그 다음엔 반대 급부로서의 록이 강조되었지만, 그가 처음부터 두 요소의 결합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혐의(?)는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게 내 느낌이다. 이번 음반과 공연은 그 두 요소가 말 그대로 ‘하나된’ 하드코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지극히 치밀하고 엄밀하게 계산된 음악적 운행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그 ‘계산’이 과연 하드코어적 음악 정신과 어울리는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거칠게 말하자면, 하드코어는, 거칠게 음악적으로 세상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번 공연은 너무도 세련되어 있다. 격렬함마저 미리 계산되어 있다. 나는 세련된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어쩌면 지금 나이의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하드코어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의 명분 혹은 내용과 형식이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이고, 이제 그는 그런 문제와 마주칠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번 공연은 너무 자기 식으로 세련되어 있어 너무 화려하다. 방송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현란한 무대 장식도 그랬거니와, 그는 놀랍게도 립싱크를 이용했고 어떤 현장적 파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틀에 맞춰 소리와 몸짓을 사용하는 마이클 잭슨 식의 쇼에 불과했다. 효과적인 파급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그것은 하드코어 정신의 배반이 아닐까? 그는 오래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여기 식의 하드코어 음악이 ‘언더’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듯 싶다.
……그의 능력을 믿기에, 나는 진정한 그의 자기 버림, 좌절과 변신, 끝없는 유랑 혹은 비껴-가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가장 위험한 것은 그가 자신 속에 계몽주의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 덧붙이는 말: 서태지 공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왜 에릭 클립튼의 ‘언플러그드’ 공연이 떠올랐던가? 나는 그 상념 또한 간단히 정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