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구절의 긴 여운

[1]
아침 신문에서 며칠 전 타계한 영국의 ‘연기파’ 배우 앨릭 기네스(<콰이강의 다리>가 선하게 떠오른다)에 관한 추모 기사를 읽다가 마주친, 그가 어디선가 말했다는 한 구절이 하루 종일 곱씹혀 이 자리에 적어본다: “천국이란 한 여름 저녁 테라스에 앉아 절친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담담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뭐랄까, 바닥 모를 우물 같은 한 마디랄까. 왜 이 말이 나를 사로잡았는지 되풀이 음미해보아도 야릇하게 그저, 어떤 막연한 울림만이 번진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말 속엔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욕심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천국이라면 곧 연상되는 ‘천사’가 되겠다는 욕망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거꾸로 그는 천당을 이곳으로 낮게 끌어내리는데, 이 낮은 곳에서도 그가 되고 싶은 것은 단지 누군가의 ‘절친한 친구’일뿐이다. 그 때문일까, 이 오랜 울림은… 내가 나만의 특별한 어떤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과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맺음의 가장 낮으면서도 가장 높은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둥글게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일까.
여러 번 되뇌이다 깨달았는데, 위의 짤막한 한 문장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가 세 개나(확대하면 다섯 개나) 들어 있다. 저녁, 테라스, 술잔…(확대하면 친구, 침묵의 소리까지…) 내게, 그 이미지들은 상반된 무엇인가를 하나로 섞는 것들이다. ‘저녁’은 낮과 밤을 섞는다(무더운 ‘여름’의 저녁이기 때문에 그 느낌은 더욱 각별하다). ‘테라스’는 안(실내)과 밖(실외)이 교차하며 이어지는 자리이다. ‘술’이란 물과 불(알코홀)의 상극성을 한 몸으로 만들어 그것을 통해 의식 너머의 취기(감성, 나아가 열정)로 우리를 이끄는 매우 연금술적인 액체인바, ‘술잔’은 그것을 담아 우리 손 안에 잡히게 하는,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따라주고 받는– 제의적 용기이다.
그러고 보니까 ‘친구’도 그렇다. 친구란 나와 남을 잇고 묶어주는 관계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삶이 관계라면, 친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삶의 연금술 중에서도 지고의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 신비한 관계로부터는 ‘침묵의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다. 침묵인데도 침묵이 곧 소리(말)가 되는 경지, 아무 말 없이도 모든 뜻이 나누어지는 경지!

[2]
그런 생각이 번져, 술을 약간 마시고 들어온 이 밤에 나는, 사이몬 앤 가펑클의 <침묵의 소리>를 반복해서 듣는다.
이보게 어둠이여, 나의 오랜 친구여
내가 다시 그대와 말하려 왔다네
왜냐하면 내 잠든 사이에 부드럽게 얽히던
어떤 환상이 씨를 뿌렸기 때문이지
내 머리 속에서 자라난 그 환상은
아직도 남아 있다네
침묵의 소리 속에 (1절)
이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의 ‘침묵의 소리’는 아직 소통되지 않고 있는 어떤 내면의 소리이다. 아니, 3절의 “아무도 감히 침묵의 소리를 깨트리려 하지 않네”라는 구절을 보면, 그것은 차라리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만드는 소리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목소리를 나누지 않는 노래를 만든다”(3절). ‘나’ 는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 내 팔을 잡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침묵의 벽에 벽에 메아리졌을”뿐이며, 사람들은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침묵을 모른다” (4절).
그렇게 볼 때, 이 ‘침묵의 소리’는 앨릭 기네스의 저 ‘침묵의 소리’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절의 관계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 둘은 그 실체가 애당초 다른 어떤 것들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각자 속에는 노래가 있는데, “말하지 않고 지껄이며 / 귀 기울이지 않고 듣는”(3절)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네온 빛” 시대의 관계의 진실인 것이다. 이렇듯 단절의 삶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어둠만이 오랜 친구라면, 이곳이 곧 지옥이나 다름없다. 다시 그렇다면, 기네스가 말하듯 ‘침묵의 소리’가 은밀히 소통되어 들리는 삶이야말로 천국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현대적’ 삶이 단절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못해 진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단절이 개개의 실존 속에 작용하는, 그리고 ‘나’에게 실제로 돌아오는 구체적 양상을 바라보고 겪는 것은 더할 수 없이 끔찍하다. 터놓고 말해, 우리는 거의 모두가 반쯤 미쳐 있다. 누군가는 그 도가 지나쳐 때로는 정신병적 광태를 보이고 때로는 기막힌 광대짓을 내비치지만, 그 뒤에는 다른 모두에게서나 마찬가지로 단절의 외로움이 감추어져 있다. 그 외로움의 괴로움은 요즘 거의 극에 달해 있는 듯싶다. 이 시대를 뒤덥고 있는–대표적인 예를 들어, 익명으로 인터넷을 타고 흐르는– 타인에 대한 욕설과 저주, 그것도 결국은 외로움의 극한적 표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