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9): 얼음의 책, 물렁물렁한 책, 물의 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은 물렁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덩어리, 그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또 시상(詩想)에 잠긴다.
— 최승호, <물렁물렁한 책>
(시집 <<눈사람>>, 1996)

***
지난 번에 남진우 시집 <<타오르는 책>>을 읽다가 문득 곁가지를 치며 떠오른 것이 1996년에 나온 최승호의 시집 <<눈사람>>이었다. 남진우 시집이 초반부에 <타오르는 책>을 놓고 끝에서 두번째 시로 <사라지는 책>을 배치하고 있는 것처럼, 최승호의 그 시집이 <얼음의 책>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에서 두번째 시를 <물렁물렁한 책>로 매듭짓고 있는 것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최승호가 그 다음 시집 <<그로테스크>>(1999)에서 <물의 책>을 제시하면서 ‘책’에 대한 사념을 이어가는 것도 최승호 시를 읽는 문맥에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세속 도시의 즐거움>>(1990)과 <<회저의 밤>>(1993)을 거치며, 최승호 시인은 변기의 세계관과 똥의 인간관에 다다른다. 변기 속에서 쓸려나가는 똥덩어리, 그런 인간의 삶을 응시하는 시인은 그러므로 이렇게 읊고야 만다.

온몸의 살이 썩고
온몸의 뼈가 허물어져서
나는 재로 돌아가리라
(<회저>, 시집 <<회저의 밤>>)

그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일뿐인 삶. 그럼에도 살 수밖에 없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재로 돌아가리라”는 저 희미한 의지는 그 마지막 답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눈사람>>에 뚜렷이 등장하는 불교적 색체는 충분히 이해될만 하다. 그리고 ‘눈사람’은 바로 그런, 마지막 순결을 간직하는 삶의 이미지인 것이다. 시인은 <<회저의 밤>>에서의 그 재가 곧 물이라는 상상적 변용 과정을 거쳐:

눈사람이 녹는다는 것은
눈사람이 불탄다는 것,
불탄다는 것은
눈사람이 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재가 물이다
하얀 재
더 희어질 수 없는 재가 물이다
(<눈사람의 길>)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가장 순결한 것(물의 결정체)을 한 몸으로 보여주는 감각적 상관물로서의 ‘눈사람’을 완성한다:

눈사람을 옮겨 화랑에 전시하자
녹는 눈사람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지상의 예술 가운데
가장 순결한 걸작들이다
(<눈사람 전시회>)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시적 상상력 속에서 불멸은 없다. 불멸을 꿈꾸던 것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인조가죽뿐인 미이라”(<불멸>)일뿐이다. 위의 시가 말하듯 예술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런 예술관 위에서 먼저 제시되는 것이 <얼음의 책>이다.
<얼음의 책>은 무엇보다 불멸의 책에 대한 시인의 냉소적 시선을 드러낸다.

사라짐으로 저자는 영원히 글 쓰는 자가 된다. 사라지지 않는 문자에 육
체를 절여 놓고, 그는 낡은 외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
문자에 육체를 절여 넣고 영원히 존재한다? 문자도 영원하지 않다. 얼음
의 책은 문자들과 함께 녹아버린다.

요컨대, 불멸의 책이라 믿는 것들도 흘러 사라지는 물이 잠깐 얼어붙어 머무는 것과 같을뿐, 결국은 소멸해버릴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의 책이 얼음의 책이라는, 존재하는 동안에도 얼어붙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시관(詩觀) 혹은 문학관은 그런데 하나의 역설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럼에도 최승호 시인은 왜 계속 시를 쓰는 것인가?
시인은 저 스스로 생각해도 그 점을 잘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잘 됐다, 정말,
집착할 것이 점점 없어진다.
그러면서 정작 너는 새장 같은 시를 쓰지.
詩魔,
누군가 시를 魔라고 했다.
魔와 싸운다.
새장과 혼자 싸우는 새처럼.
(<헛것의 시대>)

불교적 해탈의 입장에서 보면 시도 마(魔)다. 그런데도 시인은 “내 인생의 서시를 / 쓰지 못한”(<개기 월식>) 것을 안타까워 하고, “헛살았다고 중얼대는 것은 / 흔해빠진 일이지 / 그 다음을 말하기가 / 어려울뿐이지”(<뿔쥐>)라며 ‘그 다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시마는 시인을 사로잡는 마지막 마(魔)이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시마와 물처럼 살다 사라져야 한다는 의식의 갈등은, 차후의 시집 <<그로테스크>>에서 기묘한 결합에 이르러, ‘물의 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다.

물의 책은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아야 한다.
투명해야 하고
펼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야 한다.
(<물의 책>)

그러나 그렇게 적는 순간, 언어화·문자화되고 하나의 책이 되는 순간, 이미 그 책은 말 그대로의 ‘물의 책’일 수 없다. 언어는, 문자는 이미 고체성이기 때문이다. “물무늬로 물무늬를 지우듯이 / 흘러가는 물”(<물의 자서전>)과 같은 시는 원론적으로만 따지면 그 존재 방식의 전제 조건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순 앞에서 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위의 시를 최승호가 꿈꾸는 이상적 시가 독자에게 작용하는 양상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러러면 이때까지의 인간관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제기된다. 똑같은 물의 이미지지만, 물의 삶을 사는 것과 물의 책을 쓰는 것은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의 책을 쓰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물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책이기에, 온전한 물 자체, 재로 돌아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최소한으로나마 흔적으로 남는 것, 또는/그럼으로써 남 혹은 다른 것을 적시는 것이다. <물의 책>에 나오는, 물의 책으로 “발이나 씻겠어”, “화분에 물을 줄거야”라는 표현들은, 그런 의미에서, <회저의 밤>의 “나는 재로 돌아가리라”라는 구절이 희미한 의지이듯(‘하리라’), 버려지지 않는 시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희미한 의지를 담고 있다(‘하겠어’ ‘할거야’). 헌데 이 남은 의지가 시인에겐 곧 궁지인 것이다.
이 궁지를 시인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내가 읽은 바로는, 그는 아직 이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가능성이 이미 그의 시들 속에 들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내가 <물렁물렁한 책>을 맨 머리에 적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거기서 그는 “물렁물렁한 책” 곧 연체성의 책–고체성과 액체성의 중간 상태에 있는 책–을 “아직 태어나지 않는 책”이라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그 새로운 ‘태어남’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데서 어떤 돌파의 단서를 구할 수는 없을까?
그 물렁함은 <<그로테스크>> 후반부에 나오는 <갯바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오히려 물컹한 것은
나의 내부였는지 모른다.
오래된 찐득함이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을 나는
내면의 뻘이라 부르겠다.
(……)
처음 듣는 소리,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처음 듣는 소리.

“내 안에 있”는 “오래된 찐득함”은 바로 마지막까지 남는, 내가 위에서 희미한 의지하고 말한 그 무엇이리라. 거기서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러니까, 이렇다. 이때까지의 세계가 변기였고 인간의 삶은 똥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의 어떤 정신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런 깨달음의 정신으로부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엇인가를 이제 비로소 태어날 수 있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이 아주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이더라도, 차마 희망이라고조차 말하기 난처하고 쑥스러운 희망이더라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나는 최승호 시인이 죽도록 한번 그 마지막 희망을 물고 늘어져봤으면 좋겠다. 답은 거꾸로 나더라도, 어떤 처절한 결말이 나는가나마 볼 수 있게 말이다. 재-물을 느낄 때도 끝내 그것을 언어로 이야기했던 그가 바로 그런 자신의 행위 자체에 주목했으면 좋겠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것은, 그가 선문답에 몰입하는 것, 그러면서 그 ‘선문답의 책’을 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