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8): ‘타오르는 책’에서 ‘사라지는 책’으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책이 나를 읽는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텅 비어가고
책은 글자들로 한없이 부풀어오른다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읽는 동안
주위는 점점 더 책으로 가득 차고
책에 둘러싸인 채 가쁜 숨 몰아쉬며
나는 쉴새없이 페이지를 넘긴다
내 눈동자가 스쳐지나갈 때마다
백지엔 긴 문장의 띠가 이어지고
내 머릿속에 든 문장이 하나씩 지워진다
부옇게 지워진 문장으로 가득한 머릿속
점점 또렷하게 떠오르는 새로운 책 한 권
책을 닫는 순간
머릿속 책 한권이 통째로 빠져나간다

툭,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텅 빈 해골 하나

— 남진우, <사라지는 책>
(시집 <<타오르는 책>>, 2000)

***
남진우 시인의 새 시집 <<타오르는 책>>은 책으로서의 세상, 혹은 세상으로서의 책에 대한 시적 사유로 가득차 있다. 그 시적 사유의 움직임은 “타오르는 책”의 추억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라지는 책”의 쓰디쓴 인식으로 끝맺어지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로서의 책(<책 읽는 남자> 등), 음식으로서의 책(<비행접시> 등)이 상상력을 매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의 과정에서 은밀히 드러나는 것은, 시인의 진정한 고뇌가 ‘읽는 책’에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쓰는 책'(시)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떻게 나만의 책을 쓸 것인가? 그게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 이 시집의 가장 속 깊은 비밀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사실, 이에 대한 회의는 시인의 지난 번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1996)의 맨 마지막 시에 이미 피력되어 있었다.

나는 일찍이
시가 떨기나무 불꽃인 줄 알았다

(……)

떨기나무 불꽃이 은은하게 타오르는 동안
나는 아득한 거리를 무릎으로 기어갔다
다가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그 불빛을 잡기 위해
짓무른 살갗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

바다가 갈라지고
굳은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기적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신발 벗을 자리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지상에서
쓸쓸히 저무는 하루를 등지고
나는 비틀거리며 말없이 걷는다
(<시작 노트>)

산문적으로 풀어, 이 시의 “신발 벗을 자리”는 “내 시집을 놓을 자리”일 것이고 “기적”은 “환상”일 것이다. 기적이라 여겨졌던 것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번 시집의 <타오르는 책>에서,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나는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라고 읊고 있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환상의 발전기인 젊음이 스러지고 “쓸쓸히 저무는 하루”(<시작 노트>)를 응시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이 차곡차곡 쌓여가네”(타오르는 책>)라는 탄식만이 남는다. 더이상 불처럼 살 수 없는 삶, 길게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시간-역사 속에서 연명하는 삶, 그 속에는 수많은 타자들, 수많은 타자의 책들이 쌓여 있다. 거기에 내 책, 내 시집의 자리가 과연 있을 것인가?
책이 나무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 나무는 무엇보다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하는”(<책 읽는 남자>), 즉 책의 역사를 알아보라고 가르치는 나무이다. “아무리 베어내도 / 무성하게 자라오르는 책나무” 앞에서, 아마도 나는 그 나무의 새로운 가지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나무의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아 새롭게 피어나기 전에, 거꾸로 “내 속에 뿌리 뻗은” 그 나무가 “눈부신 새떼”를 날린다. 혹시 이 싯구는 내가 쓰려는 시들이 번번이 이미 있는 책들 속에 들어 있었다는 절망의 표현이 아닐까?
박제된 앵무새를 바라보며 시인이 “넌 이미 끝났어… 넌 끝이야… 끝이라니까” 하고 “주절댈 때”(<앵무새에 관한 명상>), 나는 그렇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런 양상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할 때, 음식으로서의 책과 먹다/먹히다라는 대립적 갈등의 양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앞선 수많은 책들을 내 시의 양식으로 취하고 싶어한다(여기까진 식물 이미지의 연장이다). 그러나 “이를 갈며 아무리 먹어치워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 그 끝없는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 나는 어느덧 살진 거미 앞에 서 있다”(<도서관에서의 기도>)는 것이다. 내 양식인줄 알았던 책은 거미가 되고, 그 거미가 나를 먹으려고 달려들고 있다!
맨 처음에 전문을 옮긴 <사라지는 책>에서 내가 “책을 읽는”데 “책이 나를 읽는다”라는 진술은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나는 쉴새없이 페이지를 넘긴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 든 문장이 하나씩 지워진다.” 번안하자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나의 것이라고 썼던 글 혹은 시들이 이미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마침내 “머릿속 책 한 권이 통째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때, 나는 “텅 빈 해골”일뿐이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시를 쓰다는 것, 자기만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군가 피로 썼다는 책”(<비행접시>)들이 그 절망과의 싸움을 웅변한다. 연금술적 이미지로 보자면 피는 불과 물의 결합체로 나무의 수액과도 통하는데, 그 “피로 꾹꾹 눌러 썼을 글자들”은 “읽어나가는 동안 내 눈동자를 뜨겁게 달”군다. 그 책들도 또한 앞선 책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겠지만, 그 앞선 “책 속으로 사라지며 남기는 / 또 하나의 책”으로서의 생명력을, “산 자들의 아우성”을 지님으로써 단순한 죽음을 넘어선 것이다.
그 또 하나의 책은 앞선 책들이 “마저 거두지 못한 말들을 주워 / 백지 위에 쌓는”(<랩소디 인 블루>) 것과도 같다. 하지만 피로 써야 하는 것이기에, “모래 시계 속에서 / 모래 대신 내 핏방울이 떨어지고”(<불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에, “입에서 활짝 피어나는 꽃”으로서의 “비명”의 “머리둘 곳”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머리 둘 곳을 찾아>). 그것은 글쓰기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전존재적 투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읽는 이 시집을 놓고 말하자면, 많은 시들이 그런 고뇌에 대해 시론적·원론적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시의 현장과 어떤 거리를 띠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남진우 시인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비명은 모여든다”(<깊은 밤 깊은 곳>)는 그 낮은 곳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시적인 체험의 모습을 그려내주길 바란다. 내가 보기에, 시인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잠언투와 시적 수사의 가면이다. 가령 이 시집의 마지막 시 <나그네는 길에서 쉬기도 한다>는 패러디의 수사법 속에 어떤 도피 욕망을 감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빗방울이 / 풀잎을 적시듯 / 나는 그렇게 지상을 스쳐지나왔다”는 구절은 하강하는 빗방울의 고뇌를 교묘하게 나그네의 수평적 이미지(바람, 구름, 파도)로 전이시키고 있는데, 그러나 정작 그 순간 그가 빗방울을 따라 들어가야 할 곳은 저 깊은 땅 속의 뿌리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