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의 복원 음반을 들으며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한대수의 음반들이 속속 복원되고 있다. 얼마전 그의 ‘전설적인’ 1집 앨범 <<머나먼 길>>(1974)과 3집 <<무한대>>(1989)가 합본된 <<Masterpiece>>가 발매된 데 이어, 곧 4집 <<기억 상실>>(1990)과 5집 <<천사들의 담화>>(1991)가 역시 합본 형태로 재생된다고 한다. ‘매니어’ 층의 존재와 열정이 밑받침된 결과겠지만, 어쨌든 이런 기획의 실천이 가능했다는 것은 우리 의 문화적 역량이 제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싶다.
작년엔 이미 그의 불운했던 2집 <<고무신>>(1975)이 1997년의 후쿠오카 공연 실황과 함께 복원되었었는데, 불운했었다 함은 이 앨범이 발매 당시의 군사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음반으로 몰려 그 매스터 테입이 압수·폐기 처분되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 씨디 앨범은 엘피 판을 복각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부디, 다시는 그처럼 무지한 문화 파괴의 시대가 오지 말기를!

그의 음반들을 다시 듣는다는 것은 내게 말 그대로 축축한 감회에 젖음을 뜻한다. 그의 노래들은 신중현·김민기 등과 함께 내 20대 젊음의 방황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들은 70년대의 지옥 같은 억압적 사회 상황 속에서의 고통과 그에 대한 저항적 꿈이 범벅을 이룬 우리 세대 정서의 어떤 부분을 고스란히 떠올린다. 그러나 짐짓 이성적 거리를 띠우며 말하자면, 이 음반들의 복원은 문화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개인적 감회 이상의 소감을 적고 싶게 한다.
우선, 우리는 이 복원 작업을 통해 우리 대중 가요의 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우리 대중 음악사에서 최초로 ‘모던 포크(Modern Folk)’ 내지는 ‘포크 록(Folk Rock)’의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임이 명확해진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68년’이 상징하는 범세계적 문화 운동에 우리 역시 우리 식으로 동참하고 있었음을 알려주지만–그것도 대중 음악이!–,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그를 통해 우리의 음악적 정서를 일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분명히 언급해 두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는, 한대수 없이 김민기라는 존재가 가능했을까 가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문맥을 정확히 하자면, 김민기의 <<김민기>> 앨범이 나온 것은 1971년이고 한대수의 첫 앨범이 나온 것은 1974년이지만, 한대수의 귀국과 공연 활동은 1968년부터인즉 그 충격 아래서 김민기가 싹텄다는 것이 드러난다(김민기는 그의 첫 앨범에서 한대수의 <자유의 바람>을 받아 부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 김민기가 누리는 명성의 절반은 한대수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김민기를 폄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른바 ‘간(間)-텍스트’적 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특정 존재의 부당한 신비화를 막고 문화적 가치 판단을 분명히 하고 싶을 뿐이다. 한대수 역시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밥 딜란(Bob Dylan)이란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한대수는 없다. 그러나 한대수는 밥 딜란 식의 모던 포크 음악을 최초로 한국화하며 그 나름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신중현이 자기 식으로 서구의 싸이키델릭 록이나 소울 음악을 토착화시켰듯이 말이다.

한대수와 김민기의 음악적 관계만을 놓고 말하자면, 어쩌면 김민기는 한대수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위하여 더욱 가열한 운동권 음악에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온 한대수가 이 땅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망명’의 길을 택했을 때, 김민기는 더욱 현실적 저항의 길로 나간다. 그것은 음악적 ‘의식화’의 길이었고, 그 계몽주의적 정서는 <<금관의 예수>>에서 극단화되듯이 점차 찬송가적 구조를 강화하게 된다.
반면, 보다 예술적(?)이었던 한대수는 갈수록 허무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무한대>>의 <과부 타령>이 “오, 신이여, 내가 원하는 것은 내게 죽음을 달라는 것…”이라고 읊조리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이 허무주의는 퇴폐주의나 시니시즘과도 연결되는데, 그것이 다시 유모어나 풍자로 이어지면 묘하게도 한국적 ‘한(恨)’과 ‘흥(興)’의 정서로 발전된다. 그가 역시 한국인이구나를 느끼게 하는 그 자리에서, 한대수는 놀랍게도 신중현과 만난다. <고무신>처럼 한대수가 록 음악적 색체를 띠는 노래들을 들으면 그것은 쉽게 확인된다.
사족 한 마디: 그의 한국색은 그의 한국어 노래보다 영어 노래에서 휠씬 분명하게 느껴진다. 가사는 영어로 들리는데, 아무리 들어도 노래는 뽕작(?)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한국 노래다. 이 점은, 그가 <희망가>나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 그 노래들을 얼마나 특이하게 ‘모던 포크’화 하고 있느냐는 현상과 뚜렷이 대비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노래는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길항 속에서 양가성을 띤다.
그의 허무주의적·퇴폐주의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것을 통해서, 아무튼 그는 사회적 저항 의식을 내놓고 노래한 최초의 경우로 평가된다. 과연 그 이전에,

햇볕에 타고 있는 팔월 오후에 권태에 못 이겨서 집을 떠났다
오랫동안 못 본 햇님 그대 참 그립군요 울려라 종소리여 나는 자유의 몸이요
난 살고 싶소 난 세상을 볼테요 아아 아아 슬픈 옥이여∼
복잡한 사회 속에 옥이는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사랑과 미움 속에 끓는 청년을 보았소 길가에 허덕이는 병든 고아도 보았소
배반된 남편 꿈 깨어진 나그네 아아 아아 슬픈 옥이여∼
(<옥의 슬픔>)

와 같은 가사와 이에 걸맞는 선율·리듬을 창출해낸 음악인이 있었던가. 그것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먹혀든 대표적인 곡은 알디시피 <행복의 나라>이다(이 노래는 양희은·김정호 등도 불렀으나, 그들은 때론 너무 단아하게, 때론 너무 처참하게 ‘희망’만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한대수의 저항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파고 높게 출렁인다. 그 출렁이는 물살의 낮은 곳에 <하루 아침>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지는 시니컬한 자기 응시와 묘사적 서술체가 있다면, 그 높은 곳에는 “가겠소” “던지세” “겄겠네” “찾으리” “보자” “갈 테야” “갑시다” “불어라” 등의 의지형·청유형·명령형 서술체가 있다. 그 높낮이가 하나의 운동으로 출렁거리는 것, 거기에 그의 음악의 정서적 두께가 있다. <마지막 꿈>에서 “우리 서로 운동하자 계몽 운동 무슨 운동 재건 운동 무슨 운동 운동은 몸에 좋다 하더라”라는 풍자적 구절과 마지막에 그저 “엄마 엄마 엄마 엄마…”를 애절하게 읊고 외치는 구절의 대비는, 그 진폭이 얼마마한 울림을 주는지 금방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 효과는 상당 부분 외국인이 한국어를 말하는 듯한 낯선 언어 구사, 발성 및 음조의 구사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외국에 오래 살았던 탓도 있겠으나, 그의 언어는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능동/피동을 구별 못하는 분명한 오문 구조(위의 “배반된 남편”은 “배반한 남편”이 맞는데, 이런 잘못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는 전혀 장점일 수 없겠으되, 그럼에도 그런 류의 언어·음악 구사 방식이 그 어투의 차원에서나 이미지의 차원에서 아주 새로운 느낌을 몰아올 때도 있다. 전자의 예로, <하루 아침>의

하루 아침 눈 뜨니 기분이 이상해서, 시간은 11시 반, 아, 피곤하구나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소주나 두 잔 마시고 소주나 석 잔 마시고 일어났다

같은 구절은 “기분이 이상해서” 다시 음미해 보면(가사의 “이상해서” 뒤에는 “시계를 들여다보니” 정도가 생략된 것으로 읽어야 하리라), 룸펜의 기분 이상한 삶이 기묘하게 농축되어 있고, 후자의 예로 <인상>의 첫구절인

밀리는 파도의 끝이 없는 소리여

는 언어 통사 구조상 “밀리는 파도의 / 끝이 없는 소리여”라고 분절되어야 할 것을 노래의 통사 구조에서는 “밀리는 / 파도의 끝이 소리여”(“파도의 끝이 없는 소리여” 부분은 빠른 한 호흡으로 이어진다)로 들리게 함으로써, “밀리는”
이 ‘파도’에 걸리는지 ‘끝’에 걸리는지 ‘소리’에 걸리는지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언어/음의 모호성을 빚어내 그 울림을 다면화시키고 있다.
이런 효과는 궁극적으로 음악적인 소리 실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 실험 또한 <물 좀 주소>의 저 소박한 목소리 실험에서 <여치의 죽음>의 명상적 악기 실험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듯이 보인다. 가장 최근에 보여지는 성기완의 소리 실험의 뿌리가 어디까지 거슬러올라가지는지를 새삼 아득한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