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6): 연민에서 살의(殺意)로

한 마리 개미를 관찰한다

돋보기로 보는 개미
흐릿하게 확대되어
어지러운 마음 속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추웠을까?
초점을 맞춘다

— 이윤학, <연민>
(시집,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2000)

***

위의 짤막한 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첫 시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의 시들은 변함없이 아픈 상처 위에 부벼져 더욱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데, 그 소금이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들은 소금처럼 아픔을 정련시키며 나타났었다(그 구체적 내용까지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첫 시집에서 그는 이렇게 읊었다.

가뭄의 염전이 눈앞에 펼쳐놓는, 아픈 순간들……

나는 부스러진 차돌 같은, 가루 소금이 되고 싶다.
문 없는,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싶다.
(<판교리 3>, <<먼지의 집>>)

그러나, 두번째 시집에서(<<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그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짐”(<견딜 수 없는 짐을 지고>)임을 깨닫고 상처의 기억 자체를 벗어던지고자 한다.

갈대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저기 염전이 있었던 곳,
(……)

흰 머리털이 다 빠지도록
머리를 흔들고도
갈대들
아직 기억을 지우고 있다
(<나무다리 앞에서>)

다시 그러나, 위의 마지막 구절은 그 상처의 기억을 아무리 지우려 애써도 결코 지울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 소금밭에서 갈대로 자라난 그가 “흰 머리털이 다 빠지도록”(얼마나 고뇌했기에 이런 조로의 이미지가 튀어나오나!) 머리를 흔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세번째 시집에서(<<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그는 지금까지도 지옥처럼 살아왔을 “여기가 / 지옥이라고 / 꾸욱 / 꾸욱”(<저녁의 공원>) 되뇌인다. 그리고 그 지옥의 어둠인듯, 염전이 폐기되고 생긴 갈대밭엔 검은 웅덩이들이 패여 있는데, 이제 그는 그곳으로 스러지고 싶어한다.

갈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어둠의 웅덩이,
(……); 그곳은
내 병든 맘이 누워 쉬고 싶은 곳
(<소금 창고>)

그리하여, 네번째 시집에서(<<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그는 마침내 그러고야마는 자신을 상상한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소금인 눈이 되어 웅덩이에 자신을 녹이는 모습을.

눈은 검은 웅덩이를 저주한다
눈은 검은 웅덩이에 자신을 버린다
눈은 검은 웅덩이에 자신을 섞는다
(<눈>)

이 세상은 지옥이며 검은 웅덩이다. 그는 이곳을 저주하며 거기에 자신을 버리고자,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기 죽임은 그 세상에 자기를 섞는 행위이기도 하다. 저 자신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상처이기도 하므로.
우리가 맨 처음에 적은 시는 바로 그런 마음의 움직임 위에 있다. 그는 그 웅덩이의 삶을 관찰한다. 검은 개미는 검은 웅덩이의 삶의 꼴이 아니겠는가.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할수록, 연민이 싹튼다. 그 지옥에서의, 지옥의 벌레 같은 삶. “어지러운 마음”이란 바로 연민이고, “얼마나 추웠을까?”란 그 연민의 표현이다. 그러나 연민은 연민일뿐,

반초도 안 되는 순간,
어떤 벽에 뚫린 구멍은
이 세상의 구멍을 다
보여주었네

(……)

이 세상이 쉬 망하지 않는 이유
한없이 시간이 더디기 때문이라네
(<반초도 안 되는 순간>)

에서 보여지는 저 도저한 절망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그가 자기 파멸과 함께(“버린다”), 이 세상과 한 몸이 되어(“섞는다”), 이 세상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죽음-죽임에 “초첨을 맞춘다.” 개미를 돋보기로 태워 죽이는 것, 그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불쌍한 이 세상을 죽이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상처에서 함께 벗어나기 위하여.
“평생을, 아픔을 끌고 다녀야 하다니!”(<집>, <<나를 위해…>>)라고 절규하는 시인에게, 내가 과연 이 살의를 탓할 수 있을까? 그의 상처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은 다른 작업을 요하지만, 그는 견디기 힘든 천형의 삶을 받았다. 나는 그의 살의를 탓하기 보다 이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탓한다. 왜 하필 그가 그런 고통을 질머져야 한다는 말인가. 삶은 너무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