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이야기(셋): 사라진 풍경

90년대의 첫 가을에, 복사기로 찍어내는 어떤 대학생 학회지를 위해 썼던 짤막한 글의 전문과 그 10년 후의 소감–

대학생을 위해 문학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한 편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막연해 있던 중에, 한 무리의 대학생들 틈에 끼어 여행할 기회를 얻게된 나는, 요즘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많은 노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른바 ‘운동권 가요’에서부터 ‘뽕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지는 그 노래의 세계에 빠져, 나는 한편으로 내가 그 사이에 즐겨 부르던 노래들과 요즘의 대학생들이 부르는 노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은밀한 공통성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은밀한 공통성이 어쩌면 표면적인 차이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동시에 그것이 문학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내 귀가 우선 신기해했던 것은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아,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지 어연 20년이 가까와온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물어보니까 그의 <공장의 불빛>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고백을 들은 것도 놀라왔다. 그리고 자꾸 듣다보니, 운동권 가요 중에서는 가장 서정적인 축에 속하는 <그날이 오면>이 가장 학생들의 호감을 사고 있는 듯 했다. <광야에서>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내겐 같은 계열의 노래로 들렸다. 또 다르게는, <이층에서 본 거리>라는 록 발라드 풍의 노래에 현실 풍자적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도 특이했는데, 언젠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에 마찬가지로 가사를 바꿔 부르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사만을 가지고 볼 때, <아침 이슬>은 과거의 설움을 떨쳐버리고 거친 현실의 광야에 몸담고자 하는 결단의 노래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가사만을 가지고 보자면, 이 노래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선전·선동적’인 새로운 결단의 노래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이 케케묵은 노래가 왜 아직도 애창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노래에 가사가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음악에 대해 별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노래는 가사를 실어 나르는 선율이나 박자, 그리고 가수의 목소리를 떠나서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가 가사를 의식하기도 전에 우선 그런 ‘소리’의 요소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예의 <아침 이슬>을, 나는 두 개의 겹쳐진 목소리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양희은의 진주 같이 해맑은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김민기 자신의 진한 허무주의적 목소리이다. 두 목소리는 모두 그 자체로 어떤 ‘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이 동일한 ‘미’ 음으로 낮게 깔리던 “한낮에 찌는”이란 가사 뒤에 껑충 다섯 음계를 솟구치며 “더위는”으로 비상할 때, 맑음이 맑음 자체에 근거하여 맑음을 뛰어 넘고 허무가 허무 자체에 근거하여 허무를 뛰어 넘는 듯한, “나 이제 가노라”는 ‘혁명적’ 도약의 감정이 환기된다. 바로 그때, 정서가 의식과 맞부닥치면서 동시에 결합되는 것이다.
나는 이 노래의 울림이 큰 이유가 그런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이 노래는 가사와 음악적 요소를 최대한 일치시켜 정서와 의식을 강판처럼 평면화시키는 노래들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이 노래는 우리의 정서와 의식을 두텁게한다. 두텁게함으로써 더 큰 울림을 주고자 한다. 티없는 맑음의 정서나 허무주의적 정서도 삶의 한 몫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안에서 솟아나는 의식적 결단을 노래화함으로써, 단순한 영웅주의–약한 존재들에게는 두렵기조차 한–를 넘어서는 우리의 보다 보편적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의 호소력도 결국 그런 면모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그날이 오면” “그 아픈 추억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로 이어지는 이 노래의 전체적 흐름은 하나의 역설이다. 미래를 꿈꾸되 미래를 꿈꾸는 지금은 어서 과거가 되기를 바라므로. 여기서 이 노래가 우리를 파고드는 것은, 지금 겪고 있는 이 “오랜 고통”을 슬픔과 희망의 두 감정이 공존하며 겹쳐진 상황에 근거한 것으로 제시하는 데 그 까닭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남성·여성의 혼성 합창이 그 두 겹의 길항·보족 관계를 소리로 형상화하는 듯이 보여진다. 슬픔은 단지 버려야할 유산이 아니다. 슬픔이 없으면 과연 희망이 존재할까? 그 둘은 기실 하나가 아닐까?
그 현재의 고통스러움을 어서 즐거움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그날이 와야만 이루어질 행복을 지금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사 바꿔 부르기’를 낳는다. 일반 유행가들은 흔히 즐김-배설의 노래이다. 물론 그 즐김-배설이 현실도피적 환상일 수는 있지만, 즐겁거나 토해내고 싶어하는 소박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의 의식은 그것을 단순한 도피적 즐김-배설로 만들지 않기 위해, 가사를 현실 풍자적으로 바꾼다. 그러면서 선율이나 박자, 음색이 제공하는 즐김-배설의 세계를 바싹 현실로 끌어당긴다. 사실 ‘가사 바꿔 부르기’는 일종의 패러디를 행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유희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축제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축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세상을 즐겁게 뒤집어보는 행위이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그 일시적 현실 정지는 미래에의 꿈을 재확인시키고, 유토피아를 향한 우리의 삶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가사를 바꾼 노래들을 듣을 때 엄습한 내 느낌은 그런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다분히 연금술적인 행위로 보였다. 학생들이 잘 쓰는 ‘투쟁’이란 말을 굳이 사용하자면, 그것은 미학화된 투쟁, 미학으로서의 투쟁일 것이다. 그런데 넓게 보자면, 어떤 노래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일상 속에서 그런 작은 축제를 향유하는 것 아닐까? 시위를 하며 가장 투쟁적인 노래를 부를 때조차 말이다(오해 없기를 바라며 덧붙이지만, 내겐 시위도 하나의 축제로 보인다).
아무래도 노래는 그런 응축된 축제의 형태로 현실의 틈 속에 존재하며 현실과 관련을 맺는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 학생들이 내건 구호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것이었다. 여행 내내, 학생들은 동명의 노래를 여러 번 불렀다. 그리고 그걸 듣는 내겐, 그 노래의 핵심적 울림이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라는 대목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졌다. 그때 동시에 내 머리를 가로질러간 날카로운 느낌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잠시 멈춰 쉬는 그 순간이 바로 노래 자체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있음으로 해서, 그런 순간의 노래를 통해, 다시 우리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라고 다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다짐이 모두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 쉼의 순간을 긍정해야만 한다. 삶은 쉼 없는 전진만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전진하는 것인가? 그 쉼, 숨쉬기의 시공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시공을 통해 행복을 향유하고 행복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반대 방향에서 이야기하자면, 노래의 정서 또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거짓 없는 공감이 가능해질 테니까. 노래가 울리는 정서의 폭이 두꺼워야 한다는 내 생각의 뿌리는 거기에 박혀 있다. 노래의 ‘운동성’ 혹은 ‘방향성’은 그 다양한 정서들을 꿰뚫고 얻어지는 것이어야지, 어떤 정서들을 잘라버리는 독단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글의 첫머리에서 표면적인 차이점 보다 내재된 공통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닐지 모른다고 적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내가 <아침 이슬>을 좋아했듯 요즘 학생들도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유쾌한 확인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요즘 노래인 <그날이 오면>에 감동되고 ‘가사 바꿔 부르기’를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행복한 체험이었다. 그것들은 세대를 넘어서도 힘을 발휘했다. 그것들은 계급이나 계층의 분할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저 깊은 곳에서 만나는 보편적 정서를 여러 겹으로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문학에 대해 내가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다. 예컨대 일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책 앞에서 현실은 일단 정지된다. 그러나 그 정지 혹은 쉼의 시간에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현실에 대해,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 그 성찰이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게 하고,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만든다. 문학은 인간이 인간다와지기 위해 마련해온, 포기할 수 없는 문화적 장치인 것이다. 요컨대 문학이 없어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지만, 문학이 없으면 생존을 가치있게 만들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자발성을 요구하는 장치이다. 내가 책의 첫 페이지를 들추지 않는 한, 문학은 아무 뜻도 작동시키지 않는다. 남들이 어느 작품에 대해 자기 식으로 들려주는 몇 마디 말로도, 그 작품은 ‘나’에게 유용한 것이기 힘들다. 작품은 바로 나 자신의 구체적인 정서 체험(실감)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그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사유를 지극히 실존적으로 풀어가게 하는 실타래와 같은 것이므로, 내게 육화되지 않은 타인의 추상적 언어에 의해 요약화·간접화된 것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다. 노래가 직접 불러야 맛이듯이, 문학도 직접 읽어야 내 영혼과 육체를 움직인다.
……이 10년 전의 글을 읽자니, 나는 아주 아득한 옛 추억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이 글로부터 2-3년이 지나지 않아, 무엇보다 노래를 즐기는 방식에 엄청난 변화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또는 강변이나 산속의 모닥불 주변에서 둥글게 둘러 앉아, 통기타 반주에 맞춰, 때로는 목청을 낮게 가다듬으며 때로는 목청을 격앙시키며, 때로는 혼자 때로는 모두 함께, 노래에서 노래로 노래를 한없이 이어가던 그때의 그 시간들, 그때의 그 삶의 한 풍경은 언제 어디로 어찌하여 사라졌는가?
그 사이, 노래 문화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 그 물적 조건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노래방 문화의 등장!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 이후의 학생들은 수학 여행을 가서도 노래방에 가야 노래를 부르고 노래방 기계가 없으면 애당초 노래를 안 부르려 들 만큼 그렇게 되었다. 물론 거기엔 뭔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러리라. 우선 원곡과 똑같은 배경 반주가 노래 부르는 분위기를 더욱 그럴 듯하게 치장해주니 한층 기분이 북돋워지고, 그 반주의 어디에 맞춰 가사를 따라가면 되는가 하는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니 아주 편리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노래방 풍경을 곰곰 휘돌아보면 아주 희한하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거나 따라 부르며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차례에 부를 노래의 번호를 찾고 입력시키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자기 차례에 혼자 부르고 혼자 즐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 노래방에서는 시간이 돈이다보니 간주부는 빠른 속도로 조작해 흘려보내고–그렇게 조작된 소리는 얼마나 희극적인가– 가사 부분만 제 속도로 맞춰 주는 경우도 생기는데, 그럴 때는 노래가 그 전체로 자기 정서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런 광경을 보면 이건 노래를 즐기는 게 아니라 노래와 싸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노래를 자기 나름으로 부리지를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는, 기계에 입력된 박자나 음정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기계에 맞추다보니까, 자기 마음대로 템포를 빨리하거나 늦추지도 또 높낮이를 자기 식으로 변형하지도 못한다. 그런 심리 상태에서는, 가령 ‘가사 바꿔 부르기’ 같은 방식은 엄두를 내기가 아주 힘들다. 더 나아가, 이건 언젠가 정과리도 분개했던 것 같은데,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이 거기 다 있는가? <아침 이슬>이나 <그날이 오면> 정도는 그럭저럭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뿐이다. 민중 가요는 물론, 그냥 사랑 노래도 내게는 절실하게 간직되어 있건만 기계가 무시해버린 경우가 너무나 숱한 것이다.
이런 현실은, 아무리 속을 끓여도, 지금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건 부분적인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노래를 즐기는 방식, 그 조건의 전체적 구조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90년대 중반부터 수많은 ‘인디 밴드(indie band)’들이 생겨나 그들에게 온몸으로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라이브 클럽으로 몰려가고, 또 노래 대신 춤으로 푸는 ‘테크노 바(techno bar)’가 성행하기 시작하는 것이 어떤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으로 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아주 최근엔 대학에 통기타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주목을 요한다.
흔히 이야기하듯 결핍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실천을 낳는다면, 그래서 노래방 문화도 생겨난 것이라면, 이제는 노래방에 결핍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형태로 요구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문학판으로 눈을 돌리니, 그 노래방 문화처럼 요란했던 ’90년대 세대’의 문학도 지금은 소강 상태다. 아마 그들도 암중모색 중이리라. 여기저기 흩어져 그들은 지금 무얼 어떻게 찾아가고 있는지, 그것들이 과연 어떤 새로운 문학 양식으로 다시 모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