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이야기(둘): ‘샘플링’에 대해

어쩌면 ‘발라드’ 풍보다 더욱 큰 세력으로, 9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새로운 주류를 형성한 것은 ‘댄스 뮤직’이다. 이 역시 10대 취향을 겨냥한 거대 음반사들의 전략과 연관되어 있긴 하겠지만, 아무튼 이 현상은 세계적 조류를 겻눈질한 결과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80년대 이후 엠-티비와 뮤직 비디오를 등에 업은 가벼운 ‘댄스 팝(dance pop)’ 말고도, ‘랩(rap)’과 ‘테크노(techno)’
가 새로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댄스 뮤직’은 90년대 들어 주도적 쟝르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쟝르라고 했으나, 더 정확히 하자면, ‘댄스 뮤직’이란 용어는 춤을 위한 여러 하위 장르들을 포괄적으로 묶는 상위 개념이다. 춤을 위한 음악은 그동안 다양하게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50년대의 트위스트, 60년대의 소울, 70년대의 디스코 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90년대를 특별히 조명하려면, ‘댄스 뮤직’을 새롭게 번창시키며 주요한 위상을 차지한 하위 쟝르로서의 ‘랩’과 ‘테크노’에 주목하는 것이 옳다. 형식적으로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듯이 말이다.
형식적으로는? 범박하게 말하면, 그렇다. 미국 흑인들의 근본적인 자의식을 표출하는 ‘랩’을 그나마 ‘랩’답게 활용한 서태지 이후로, 이 양식은, ‘인디 신(indie scene)’의 실험을 제외하면, 거의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 늘 그렇고 그런 사랑 타령을 일삼는 얄팍한 배설 장치 이상의 기능을 못했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미국에서도 상업주의를 타고 비슷하게 변질되어 가는 건 마찬가지다). ‘랩’ 이후에 찾아온 ‘테크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백인들 나름으로 기존 윤리에 대한 강한 반항적 일탈의 의미를 담고 시작한 이 스타일은 우리 나라의 대중적 영역에 이르러선, 그 기술적 방법을 유용하게(?) 써먹는 기능 이상을 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이것도 미국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유용하게 써먹는다고? 이 역시, 그렇다. ‘랩’이나 ‘테크노’에서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은 이른바 ‘샘플링(sampling)’–본떠오기–인데, 이는 기존의 음악들로부터 그 기본을 빌려와 변형시키는 작업으로서(가장 간단한 예는 멜로디를 중심으로 따오는 것이다), 흔히 ‘믹싱(mixing)’–뒤섞기: 다른 노래의 조각들을 꿰어맞춰 얽는 것– 작업으로 연장된다. 이때 ‘랩’은 즉흥적인 거리의 시에 비유될 수 있는 ‘래핑(raping)’이란 읊조림을 가지고, ‘테크노’는 컴퓨터로 조작된 기계적 비트나 최면적 리듬을 가지고, 그 ‘샘플링’된 소재와 한편으론 길항이며 한편으론 조화인 새로운 음악적 체험을 이루어내려는 게 그 기본 정신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은 사라지고 기법과 남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요컨대 ‘샘플링’ 기법만이 남는다. 그 이념은 그저 그럴듯한 명분 혹은 변명으로만 삼고, 남이 애서 만들어 놓은 음악을 간편하게, 그리고 간교하게 써먹는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래서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이리라. 로이 셔커(Roy Shuker)의 <<대중음악 사전>>을 따르자면, ‘샘플링’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이전에 레코딩된 작업에서 선택된 특정 부분만을 뽑아내어 새로운 작업의 일부로 사용하는 실천으로서, (……) 작가 정신과 창조성의 문제, 뮤지션 쉽의 성격, 진정성, 그리고 이 작업의 적합성 등을 둘러싼 논의에서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정엽·장호연 국역판, p. 171]

어쩌면 이런 문제의 씨앗은, 그 애초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기법 자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모순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 논란거리들은 첫 생각만큼 그리 단순치 않다. 특히 ‘랩’과는 달리 거의 전적으로 ‘샘플링’을 사용하는 ‘테크노’를 문제 삼을 때, 이 논의는 좀더 먼 길을 에둘러가는 성찰이 필요하다.
‘랩’의 경우는 어찌 보면 ‘래핑’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음악적 특성일 수 있다. 즉 그 읊조림이 우리의 청각을 사로잡는 근본 요소이고, 따라서 이 쟝르의 존재 근거일 수 있다. 그러나 ‘테크노’는 춤의 지속을 위해 ‘샘플링’과 ‘믹싱’을 끝없이 이어가되, 그 밑에 강하게 깔리는 혹은 그 위로 강하게 돌출하는 빠른 비트와 리듬과 드러밍에 몸을 맡기도록 유도한다. 춤이, 몸이 궁극의 목적이기에, ‘샘플링’되고 ‘믹싱’된 선율부는 결국 몸짓의 틈새로 찢겨 흩어지는 역설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면 ‘테크노’의 이 기법은 그런 기존의 음악들을 잡탕으로 끌어모아 그것들을 무화시키는 데서 의미를 찾고 있는가?
한 ‘테크노’ 옹호론자 혹은 열광론자에 의하면, “언제나 다른 곡들에 대한 모방이자 복제”로 보이는 ‘테크노’는 “기왕의 문법을 다른 통사 구조로 바꿔버림으로써 새로운 어법을 창출”하는 것이고, 결국은 “원본과 모방을 서로 저울질하는 우월함과 열등함의 비교 기준 그 자체를 무화시킴으로써 태초의 혼돈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테크노’가 태어난, 환각 약물을 사용하는 ‘하우스(House)’나 ‘레이브(Raves)’라는 대규모의 반(半)-합법적 댄스 파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연 그것이 지향한 바가 “무의미와 몽환의 축제”일 수 있겠다고 보여지고, 그때 ‘샘플링’된 기존의 음악은 그것을 “이끌어내는 작업에 사용되는 단순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다는 지적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이상의 인용은, 최정우: [테크노 음악의 분열과 몽환]).
여기서 거창하게, 그게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탈정치”일 수 있는가, 그래서 그 다음엔 어디로 나아가겠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겠다. 나를 사로잡는 문제점은 아주 작게도, 어떤 “종교성”의 경지마저 지향한다면서도 아무튼/하필 기존의 음악들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의문점은, 왜 그것에 의존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무화시키는 게 목적일망정, 기존 음악의 그 흡입력을 사용해야 사람들을 잘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에? 왜 그것들 없이는 불가능한가? 왜 곧바로 전혀 새로운 다른 방식을 창조해내지는 못하는가? 혹시 그 모든 철학은 핑계일뿐, 그저 주어져 있는 걸 즐기고보자는 단순한 유희 욕망의 발현은 아닌가?
나는 유희 욕망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거기에 거짓을 덧씌우는 건 유희 정신에 어긋난다. 유희는 유희로서 즐기는 것이다. 대단한 논문을 쓰려는 게 아니니까 단도직입하자면, 나는 ‘테크노’가 기계 문명의 극점을 인간적으로 만끽하려는 한 욕망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은 인간을 기계 문명에 종속시키는 것에 반하여, 거구로 기계 문명을 음악화, 무용화시켜 즐김의 대상으로 만들려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가치있는 현상이라 판단한다.
그렇지만 ‘샘플링’에 ‘패러디’ 이상의, ‘패러디’를 즐기고 반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그런 관점에서, ‘테크노’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 오로지 ‘샘플링’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확대하고 과장해서 말하면, 이제부턴 늘 이미 있었던 것만을 조합하며 살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앞의 열광주의자도 말했듯이 아이의 마음이다. 우선은 그 아이가 놀게 내버려두라고? 불행하게도, 내버려두고 싶어도 내버려 두어지지가 않는다. 다름아닌, 바로 그 새로운 유희를 제공한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기계 문명,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그 아이의 유희를 즉시 제품으로 만들어 팔아먹고, 동시에 아이의 마음은 오염된다. 지금 이땅에서의 음악 현실이 대표적으로 그렇듯이.
그런 의미에서 진정 이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은 저 낡은 ‘창조 정신’을 되새기는 것일지 모른다. ‘샘플링’ 작업 속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저 오래된 철학적 명제가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원형론자들의 입장과 통한다. 세계의 가장 본질적 요소는 변하지 않는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창조는 허구이다. 다시 그러므로, 창조라고 말해진 모든 것들도 이미 있었던 것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그러므로, 그냥 있는대로 즐기고 살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삶의 구체적 욕망과 살아가는 꼴은 과연 그러한가? 정말 새롭지는 않은지 몰라도 끝없이 다르게 살아온 인간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음악적-예술적 실존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성찰되어야 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샘플링’하고 ‘믹싱’하는 자들은 어쨌든 자기보다 앞서 생산된 어떤 구체적(실존적) 작품을 복사하고 있다. 그것들이 진정 창조적인 것이 아닐지 몰라도, 그만큼 다른 것들이 있기에 그처럼 다양하게 ‘샘플링’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들을 무엇이 만들어냈는가? 그 헛되다는 ‘창조 정신’, 창조에의 열정이 아닌가? 거기에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저들은 왜 하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복사하는가? 그때 그 어떤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어떤 것은 어떻게 하여 그 이전에 그런 형태로 있게 되었는가?
그런 되뇌임들 앞에서, 나는, 일반적인 짐작과는 반대로, ‘샘플링’의 정신 속에서 과격한 순결주의와 과격한 허무주의의 기묘한 결합을 본다. 거기에는 뒤틀린 원형주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우려는 바는, 그런데 그 원형적 순결주의나 허무주의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사회를 변형시키겠다는 욕망과 결합시킬 때는, 정치적으로 자칫 파시즘과 손잡기 쉽다는 점이다. 나치즘이 그랬듯이. 그에 비하면, ‘샘플링’을 통해 그저 손쉽게 돈을 벌겠다는 욕망은 어수룩하고 순진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비판을 거둘 생각은 없지만.
……문학에 있어서의 ‘혼성 모방’도 나는 위의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더구나 우리는, 그 ‘혼성모방’의 옹호론자이자 실천가였던 한 작가가 상업적 욕심과 함께 파시즘적 잠재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확있했던 적이 있었다. 의미심장!

* 위의 <‘샘플링’ 문제>는 내 산문집에 들어갈 <문학 이야기를 위한 노래 이야기>의 네 토픽 중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 작성한 글의 초고 상태를 올린 것이었다. 그후 주변의 조언과 자료를 참고해, 나는 다시 아래와 같이 수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의 글을 대체하고 싶었으나, ‘사랑방’에서 잠깐 토론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위의 글 또한 원문대로 남겨 놓아야겠다고 판단해, 그 아래 이렇게 덧붙이는 형식을 취한다.

 

[첫 다섯 문단은 위 글과 거의 동일하므로 생략]
어쩌면 이런 문제의 씨앗은, 그 애초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기법 자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모순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합당치 않다. 단순한 기술로서의 기법은 언제나 양면적, 더 나아가 다면적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고 또 만들어 가느냐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테크노’의 경우는 그런 문제가 미묘해서, 논의를 좀더 에둘러가는 길이 필요한 듯싶다.
‘랩’의 경우에도 ‘샘플링’이 중요한 기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서는 ‘래핑’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음악적 특성일 수 있다. 즉,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욕설적인 그 읊조림이 ‘랩’을 ‘랩’답게 만들며 우리의 청각을 사로잡는 쟝르의 존재 근거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샘플링’된 전통적(?) 노래 부분과 ‘래핑’ 부분이 기본 대비 요소인데, ‘래핑’에 의해 기존 음악과의 변별성을 획득하면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어쨌든 그것은 소리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이다. ‘랩’이 ‘힙-합(hip-hop)’ 춤과 결합될 때에도 그 소리 요소는 그 자체로 남는다. 그런데 ‘테크노’는?
‘테크노’에서 ‘샘플링’에 대비되는 요소는 ‘시퀀싱’이다. ‘시퀀싱’은, ‘샘플링’을 ‘믹싱’으로 끝없이 이어가는 것을 계기화하기 위해, ‘드럼 머쉰(drum machine)’ 같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샘플링’된 노래들 밑에 강하게 깔리는 혹은 그 위로 강하게 돌출하는 빠른 비트와 리듬을 조직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이것도 소리의 요소이다. 하지만 이 소리는 저 자신의 존재 대신 춤으로의 이동을 겨냥하는 소리이다. 춤이 궁극의 목적이기에, 몸놀림에 몰입하는 순간, ‘샘플링’되고 ‘믹싱’된 선율부는 얼핏(?)/결국(?) 몸짓의 틈새로 찢겨 흩어지는 역설에 이르고 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테크노’의 이 기법은 그런 기존의 음악들을 잡탕으로 끌어 모아 그것들을 무화시키는 데서 의미를 찾고 있는가?
한 ‘테크노’ 옹호론자 혹은 열광론자에 의하면, “언제나 다른 곡들에 대한 모방이자 복제”로 보이는 ‘테크노’는 “기왕의 문법을 다른 통사 구조로 바꿔버림으로써 새로운 어법을 창출”하는 것이고, 결국은 “원본과 모방을 서로 저울질하는 우월함과 열등함의 비교 기준 그 자체를 무화시킴으로써 태초의 혼돈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말씀과 의미가 분화되어 나가기 이전의 초기 상태”와 같은 “근본적인 종교성”을 내재한 “무의미와 몽환의 축제”인즉, 이를 위해 ‘샘플링’된 기존의 음악은 그것을 “이끌어내는 작업에 사용되는 단순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이상의 인용: 최정우, <테크노 음악의 분열과 몽환>, <<세계의 문학>>, 2000년 봄호].
그러나 곰곰 되읽어 볼 때, 위와 같은 ‘무의미’에 대한 의미 부여는 그것이 자족적으로 충족될 특수한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가능한, 어쩌면 하나의 꿈처럼 그려진 초월적 이상의 제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구나 ‘테크노’가 태어난, 환각 약물을 사용하는 ‘하우스(House)’나 ‘레이브(Raves)’라는 대규모의 반(半)-합법적 댄스 파티의 정경을 염두에 두자면, 거기에 일면 과감한 탈제도적·집단적 소비 행태이자 유희인 어떤 면모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더라도–나에겐 새로운 소비 사회의 조건 ‘안’에 등장한 변질된 ‘히피(hippie)’족이 연상된다–, 정녕 그만한 철학적 해석에 값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꾸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지식으로 치장된 물신 숭배라면, 그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없다.
나는 지금, ‘테크노’가 일종의 “도덕적 공황”(로이 셔커)을 불러일으키는 집단적 유희라는 점에 대해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조차 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차라리, 왜 그런 집단적 유희가 발생했는가, ‘테크노’적 위반이 사회적 관습의 어떤 모순을 건드리고 있기에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느냐는 논의로 발전시키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는 이 세계의 기계화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한 양태라고 본다. 인간과 사회마저도 기계화시키려는 무서운 흐름에 대해, ‘테크노’는 거꾸로 기계 문명 자체를 음악화·무용화하여 즐김의 대상으로 바꾸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극단화되어가는 기계 문명의 용도 변경을 시도하려는 인간적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찜찜한 점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소비 행태의 틀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테크노’가 생래적으로 지니는 존재 조건이기도 하다. 이 유희의 방식이 클럽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돈 덩어리인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렇지 않아도 문화의 자율성을 용납치 않으려는 자본주의 앞에서는 상당한 약점일 수 있다. 알다시피, 이 괴물은 자신을 욕하는 것이라도 돈이 된다면 즉시 상품으로 바꾸어 팔아먹음으로써 동시에 그 순정한 정신을 오염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그런데 이미 그 자본주의가 ‘테크노’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상품화의 조짐은 테크노의 다양한 형태의 음반화나 비디오화, 대중 매체로의 유입, 대규모 이벤트 등으로 나타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조장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구체적으로 그것이 비합법적이든 합법적이든 애당초 클럽 문화라는 사실–그러므로 그것은 ‘디스코’의 후예이다–로 거슬러 올라가(‘레이브’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 자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앞서, 그게 진정한 축제 정신과 부합되느냐는 게 근본적 문제일 수 있는 탓이다(최정우의 논변도 그 밑바탕에는 서구적 축제 이론이 깔려 있는데, 그런데도 축제/제의를 구별 없이 쓰고 있는 것은 그 구별 자체도 무화된 이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나는 우선, 이 클럽 문화가 집단적이긴 하지만 배타적 집단 즉 소집단의 문화로 둥지를 튼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즉, 그것은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끼리만의 문화, 구별을 지우고 더 큰 전체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집단과의 변별성을 획득하려는 소집단 문화이다. 그 구분은 소비하는 돈 액수의 차이–클럽 시설이나 술과 약물의 종류 등으로 인한–로 나뉠 수도, 취향의 차이로 나뉠 수도, 그 둘이 결합된 어떤 형태로 나뉠 수도 있다(뭐, 다른 요인들도 얼마든 끼어 들 수도 있으리라). 어쨌거나 그 구별은 음악으로 이입되는데, 그때 돈의 차이는 음악 기제의 차이를 통한 소리 효과의 차이를 낳고, 취향의 차이는 선곡과 조작의 차이를 낳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디제이(DJ) 활동의 차이로 이어진다.
디제이의 활동은 그러니까 자기류의 취향을 지닌 집단을 확립하고 구성하려는, 자기 클럽 식의 집단을 키우려는 일련의 작업에 다름아니다. 그 구체적 내용이란 다름아닌 ‘샘플링’과 ‘믹싱’과 ‘시퀀싱’,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디제이 자신을 ‘스타’로 부각시키려는 온갖 치장들–언술 행위, 의상, 몸짓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그 클럽의 상품성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테지만, 하여간 이 작업의 기본 질료는 디제이가 틀어주는 음악이다. 그렇다면 그 소집단의 취향을 드러내고 형성해가는 근본은 먼저 어떤 노래들을 뽑고 섞어서 계열체로 만드냐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곳이 아닌 그 클럽으로의, 그리고 춤으로의 유인 자체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그렇다면, ‘테크노’는 그런 목적을 위해 원곡들의 무의미화가 아니라 다른 맥락에서의 유의미화를 노리는 건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판단한다. 클럽 문화가 저 스스로를 해체하려 하지 않는 한(그런 의미에선 게릴라식 ‘레이브’가 좀더 진취적이다). 디제이란 직업은 원래 남의 노래들을 틀어주는 일인데, 그 실제 작업은 ‘테크노’를 통해, 어떻게 잘 골라 틀어주느냐를 넘어 어떻게 잘 모아 조립하고 잘 변형시켜 들려주느냐에까지 나아갔다. 아마도 기술적으로, 얼핏 들어서는 거의 원곡이 짐작되지 않는 조작의 경지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곡의 바탕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사라지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이 역시, 그 원곡이 유혹의 도구로 쓰이는 한. 의식의 표면에서는 찢겨 흩어지는 것 같지만,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는 변함없이 그 원곡의 잠재력이 몸을 추동한다고나 할까.
다만, 그 과정에서 뜻밖의(?) 새로운 가능성이 도출되었고, 그것을 의식 있는 음악인들이–디제이를 포함한– 그나름으로 의미 있게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존의 원곡들에 기대되 그것들을 분절하고 조립하고 변형하는 와중에, 그것들이 이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들려오는 야릇한 결과가 생겨난 것이다. 그로 인해 머리 속에 고정된 의미로 굳어 있던 그 원곡들을 춤-몸으로 색다르게 느끼며 즐기고, 그래서 그 노래들에 대해, 더 나아가 애당초 노래란 무엇이었으며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반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문학에서 ‘패러디’나 ‘혼성 모방’이 보여주는 효과가 음악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의미라면, 그 다음부터는 한계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한계란 것은 그 다음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그 이상적 목적이 원본들의 의미를 무화시키는 원초적 혼돈에 있다는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無)에 머무르는 한 역시 그 다음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 썩을 건 뻔하다. 지금까지의 그런 효과만 가지고도 그나름의 의미가 있는 건 아니냐고? 그건 동의하겠다. 그렇다면 그냥 그나름으로 즐기게 내버려두라고? 그건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내버려 두고 싶어도,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내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 현실이 웅변하듯이, 그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휘젓고 오염시키는 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다. 그러니 안타까운 것이다.
조명의 방향을 조금 바꾸자면, 다른 한편으론, 이 ‘테크노 키드(kid)’들이 너무 순수해 그 음험한 손을 정말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못 본척 그냥 거기 기대어 놀고 있는 것인지, 미심쩍다는 점도 문제이다. 그들은 그냥 이미 있는 노래들, 확대하자면 이미 주어져 있는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며 그들의 욕구불만을 적당히 해소하는 것에 만족하는 건 혹시 아닌가? 그 손이 쳐놓은 그물 안에서, 그 손이 마련해준 밀실 같은 해방구–배설 장치–를 찾아가, 그럴듯한 일탈자의 가면을 쓴 채 안주해 있는 건 아닌가? 지나친 비유였는지 모르겠으나, 클럽 문화하는 것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진 자들의 문화라는 점도 이 혐의를 쉽게 지울 수 없도록 만든다.
이는, 여유를 가진 자는 의미 있는 문화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돌아가서, 그 자본의 그물이 ‘테크노’에만 드리워져 있다는 뜻도 아니다(이 또한, 전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런 세계 속에서의, 주체로서의 실존적 인식이자 실존 방식이라는 뜻이다. 이때까지의 예술 활동은 그 그물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그물을 찢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어떤 몸부림들이었다. 이제는 다소 낡은 골드만 식의 명제를 상기하자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에 비해 ‘테크노’ 식의 실존 방법은 너무 안이해 보이는 것이다.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물음은 슬쩍 회피해버리기 쉬운 까닭인가.
그런 문맥에서 내 개인적 의견을 감히 내걸자면, ‘테크노’의 미래를 위해서는 ‘랩’의 ‘래핑’과 같은 창조적 부분이 필요하다. ‘랩’의 필수는 아니어도 빈번히 사용되는 ‘샘플링’에 맞서, ‘래핑’은 적어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주는 힘으로 작용하는데 반해, ‘테크노’에는 그런 역할을 해 줄 요소가 사실상 결여되어 있는 게 치명적 약점으로 보이는 탓이다. 이미 지적했듯, ‘시퀀싱’은 춤의 추동 장치로서 쓰이는 게 주기능이므로, 노래 소리로서 ‘샘플링’의 일방적 질주를 견제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일방적 질주를 내버려 둘 때, ‘테크노’는 점점더 ‘샘플링’이 그나마 지니고 있던 가능성보다도 그 재미에만 매달려, 일회용 소비품을 다량 생산할 확률이 아주 높다.
그러므로 반복하건대, 앞으로의 ‘테크노’에 필요한 것은 치열한 창조 정신의 개입이다. 아니, 창조란 말은 애당초 ‘테크노’의 존재 방식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닐까? 이때까지의 존재 방식에 비추면, 그래 보인다. 하지만 나는 ‘샘플링’을 폐기하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샘플링’을 사용하되 그것을 의미 있게 담는 더 큰 그릇의 창조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나는 ‘테크노’의 자기 경신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고 나자, 내 귀 속에는, 원본과 복제의 차이가 없어진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창조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들어차는 듯싶다. 그래서 나는 보충해 말한다. 그건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구체적 정황을 살아 내는 정신의, 열정의 문제이고, 그 실존적 형태화의 문제라고.
앞선 글에서도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내가 말하는 ‘창조’는 낭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말로는 그냥 ‘창작’이나 ‘형태화’라 쓰는 게 오해의 소지가 적을까?). 본질론적·원형론 적 입장에서 보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 잠언은, 그러니까 이미 있었던 삶만을 반복 복사해서 살라는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실은, 그러려고 해도 인간의 삶은 그렇게 살아지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못 한다. 지극히 구체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의 욕망의 운동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욕망으로 하여금 그 상황에 의미 있는 상상적 대응체를 생성해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말하는 작은 의미의 창조라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테크노 키드’들에게 권하고 싶다. ‘샘플링’은 어쨌든 자기보다 앞서 생산된 어떤 구체적(실존적) 작품-원본을 차용해 오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며, 다음의 물음들과 조용히 마주쳐보라고. 그래, 그 원본이란 것들이 진정 창조라는 말에 값하는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만큼 ‘다른’ 것들로 있었기에 그처럼 다양한 ‘샘플링’이 가능했지 않은가? 그것들을 도대체 무엇이 왜 만들어 내었는가? 그 헛되다는 창조 정신에 의한 것이라면, 이때의 그 정신, 그 열정이란 무엇인가? 물음은 이어진다. ‘샘플링’하는 자들은 저마다, 자기 취향대로, 왜 하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복사하는가? 그때 ‘그 어떤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어떤 것’은 어떻게 하여 그 이전에 그런 형태로 있게 되었는가?

……그런 되뇌임들 앞에서, 나는 내 마지막 기우를 마저 털어 놓는다. 일반적인 짐작과는 반대로, 내게는 ‘샘플링’ 신봉자들의 정신 속에 과격한 허무주의와 과격한 순결주의의 기묘한 혼합체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허무감와, 따라서 그런 시도 자체가 허위라는 결벽증. 거기에는 뒤틀린 원형론이 숨어 있다. 내가 우려는 바는, 그것이 소집단의 엘리티즘이랄까 ‘선민 의식’과 결합할 때, 나아가 사회적 불만과 파괴적으로 결합할 때, 자칫 파시즘을 싹티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치즘이 그랬듯이. 그에 비하면, ‘샘플링’을 통해 그저 손쉽게 돈을 벌겠다는 욕망은 어수룩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비판을 거둘 생각은 없지만.
우리는 이미 문학판을 통해, ‘샘플링’과 유사한 ‘혼성모방’의 옹호론자이자 실천가였던 한 작가에게, 상업적 욕심과 함께 파시스트로서의 잠재력이 숨어 있었음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의미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