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시 읽기(4): 수련 앞에서의 비밀

누가 ‘수련’이라고 쓴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흔적,
누가 그것을 너의 육체라고 하겠는가.
검은 물 위에 발광체처럼 하얀 흔적
처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

당신이 그걸 읽는 순간 놀랍게도
그것은 연못 위에 하얗게 피어 있다.
여름날의 햇빛에 벗은 피부를 노출한 채
기름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검푸른 물에 나긋나긋한 알몸을 잠그고
깨진 태양처럼 눈을 찔러오는 흰 수련의 무리들.
(……)

투명하도록 얇은 피부 밑으로 터져 흐를 듯
물기를 흠뻑 머금은 하얀 수련.
그러나 수련은 여기 없다, 이 백지에

건조한 검은 흔적만이 끈질기게 있을 뿐
당신은 ‘수련’이란 언어를 타고
건조한 검은 흔적과 젖은 흰 수련 사이를
메아리처럼 방황하는 중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는가?

— 채호기, <수련> (일부)
(<<문학과사회>>, 2000년 봄호)

* * *

우리 홈페이지에도 그 중 한 편이 실려 있지만, 채호기 시인이 요즘 <수련> 연작을 맹렬하게 쏟아내고 있다. 이 맹렬한, 그보다는 치열한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이 시편의 표층을 덮고 있는 것은 시인과 시적 대상과의 팽팽한 긴장감이다. 시인의 꿈은 대상과의 완전한 육체적 합일까지를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그 어떤 시인데, 불행하게도 글자로 씌어진 시는 “건조한 검은 흔적”의 ‘네거티브’ 필름에 불과할 뿐이다. 시는 언제나 시인의 절망만을 노출한다. 그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 작품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정시가 왜 어떻게 불가능한가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메타-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환상일망정 대상과의 시적 합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있다. ‘당신’이 시를 “읽는” 순간이다. 이 ‘당신’은 조금 느닷없다. 이때까지 ‘너’로 지칭되어온 수련과 구별되는 이 ‘당신’은 수련과의 “교신”이 막히는 순간 불쑥 나타난다. 그 ‘당신’은 과연 누구길래, 시인의 시를 읽어주는 순간 수련이 “물 위로 대담하게 젖은 젖가슴을 내민다”는 말인가? 물론 ‘당신’은 독자를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의 전언 중의 하나는 시와 시적 대상과의 합일이란 애당초 하나의 환상이며, 그것은 언어를 매개로 시인과 독자가 나누는 그 무엇이 된다. 시적 대상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서의 ‘당신’은 그 이상이다. 시인이 “어디에 있는가” 를 애틋하게 묻는, 시인처럼 “‘수련’이란 언어를 타고 (…) 메아리처럼 방황하는” 특별한 독자, 시인이 쓰는 시가 그 독자를 위해서만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울림이 느껴지는 어떤 다른 특별한 존재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연인이랄까. 그렇다면, 이 시편은 그 심층에서 일종의 연애시로 읽힐 소지를 지니고 있다. 시인이 “수련, 너는 듣느냐?”고, “나의 외침은 네가 들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고 애타게 “토해내는” 것은 “나를 삼키고 밑바닥 없 깊이”로까지 감히 ‘당신’–‘너’가 아니라–을 찾아가고 싶다는 갈망의 빗댄 표현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볼 때, 이 시편은 메타-시라는 현대적 면모 아래 매우 고전적인 연애의 심리학을 감추고 있다. 나는 너를 원하다고 직접 말하지 못하고 어떤 제3의 매개체를 시적으로 에둘러 가는 것. 시를 통해 수련이라는 식물성의 대상을 함께 바라보고 나눌 뿐이지만, 그걸 통해 어느 순간 “물 바깥 세상에는 없는” “육체”의 교감까지를 나누게 되는 기적을 꿈꾸는 것. 시인은 왜 그런 시를 집요하게 써나가는 것일까? 시인이 몸담고 있는 어떤 정황이, 혹은 시인이 바라보는 어떤 세상이 그를 그런 시로 몰고 가는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그의 <수련> 연작의 전모를 어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