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위의 파란 불꽃

- 정명환 선생님 소묘

내 안엔 여러 정명환 선생님이 계신다. 그리고 그분(들)은 대부분, 남들과 내가 함께 간직하고 있는 어떤 영상이나 어떤 언어로 떠올라 당신이 없는 우리끼리의 술자리 같은 곳에도 자주 출현하시곤 한다. 그러나 내 기억의 저 밑바닥에는 나만의 정명환 선생님 한 분이 따로 계신다. 내가 소설가가 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각성과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주셨던 바로 그 선생님…
단순히 선생님께서 내 소설을 ‘대학문학상’ 당선작으로 뽑아주셨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그 자체도 내겐 충분히 하나의 사건이었다. 문학에 대한 막연한 열정만을 가지고 어수선하게 헤매던 시절, 대학 2학년 때, 나는 별 희망도 품지 않고 그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두고 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당시로선 꽤나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한 편 교내 현상모집에 응모했다가 덜컥 당선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신 결과였다. 선생님께서 심사를 안 하셨다면 그런 류의 소설이 당선될 확률은 현저하게 감소되었을 테니까, 나로선 큰 행운을 잡았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그 다음 여정의 전주곡일 뿐이다.
기억을 끄집어내자면, 그 사실을 확인하고나자 나는 정말 아찔했다. 아이고, 그걸 선생님께서 읽으셨던 말인가. 다른 무엇보다, 선생님을 뵈면 사흘 만에 날림으로 씌어진 그 소설에 대해 또 무슨 ‘가차 없는’ 말씀을 하실까, 그것부터 겁이 났다. 1학년 때 공릉동 교양과정부에서 프랑스어 텍스트들을 발췌해 강독하는 4학점짜리 전공필수과목을 맡으셨던 선생님은, 예습도 잘 안 해가서 더듬거리고 툭하면 수업을 빠져먹는 내게 단호히 두 학기 연속 C- (아니, D+였던가) 학점을 부여하셨고, 세배를 드리러 갔던 자리에서는 겉멋에 취해 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꾸지람까지 내리셨던 터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처음 뵌 선생님은 모든 면에서 참으로 타당하게 가차 없으셨다. 그런 선생님께서 더 나아가, 만약 “대학문학상 수준이니까 당선작으로 뽑아줬다만…” 하고 아예 그 가차 없는 말씀조차 끊어버리시기라도 하면 어쩔거나, 두려움은 깊어지기만 했었다.
얼마 후 겨우 용기를 내서 쭈뼛쭈뼛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그나마, 선생님께서 말줄임표를 사용하시진 않았다. 그래도 어김없이, 따끔하게, 내 소설이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후반부 처리가 너무 안이하다는 지적을 빠트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소 느닷없이 덧붙이시길, “하긴 우리나라 소설이 다 그래. 절반만 넘어가면 무슨 이야길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소설을 정말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거지. 그건, 무식한데 공부는 안 해서 그렇거든. 정말 소설을 잘 쓰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공부를.” 35년 전에 하신 그 비슷한 어투의 말씀을, 나는 지금도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더불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땐 그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 무슨 화두 같았다. 소설은 집어치우고 공부나 하라고 안 하신 건 내게 천만다행이었으나, 뜬금없이 소설 잘 쓰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공부를 어떻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공부가 말 그대로의 공부라는 것을 약간 어이없어하며 깨우친 건 그 몇 달 뒤였다. 대학문학상 덕분에 용기를 얻어 이번엔 <<언어탐구>>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들고 찾아뵈러 갔었는데, 행여 유치한 짓이라고 핀잔을 주실까 우려했던 것과는 반대로, 선생님은 아주 반가와 하며 ‘가상하다’는 표현까지 쓰셨다. 그리고 <<산문시대>> 같은 윗 선배들 동인지까지 꺼내 보여주신 뒤(김현 선생에게도 내 작품을 읽혔더니 가능성이 보인다고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귀국하면 꼭 만나 뵈라고도 하셨다), ‘자네’라는 호칭을 앞세워, 다시, 공부해라, 불어 공부 열심히 해서 불어책도 많이 읽고, 대학원에 가서 논문도 쓰고 그러면서 소설을 써봐라―라는 요지의 말씀을 이르시는 것이었다. 아, 공부가 그렇게 직설적인 뜻이었던가? 그게 어떻게 좋은 소설을 쓰는 길이란 말인가? 선생님의 화두는 단순해질수록 더욱 난감한 것이었다.
……한참 나중의 내 짐작을 적어두건대, 그 무렵에 쓰신 글들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선생님께서 한국문학에 가장 부족하다고 판단하신 부분은 다름 아닌 ‘지성(知性)’ 즉 ‘이성(理性)’이었던 것 같다―한국문학에는 결정적으로 이성적 탐구의 몫이 결여되어 있다; 이성을 문학의 적으로 여길 정도로 그러다보니, 한국문학은 늘 음풍영월이나 신변잡기로 넘쳐나고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 이야기뿐이다; 진정한 ‘현대’를 가꾸지 못한 것이다; 그리므로 그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짐작을 연장하자면, 선생님은 에둘러 내게 이렇게 권하신 듯했다―현대문학의 저 끝까지 한 번 가봐라; 그러기 위해선 무지막지하게 공부하며 네 의식을 극단까지 몰고 가봐라; 그러고도 네 안에 살아남아 있는 문학이 있다면 그걸 써봐라.
이런 짐작을 간접적으로 보충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그 다음에 덧붙여진다. 언젠지 기억이 정확치 않지만, 선생님께서 연구년을 맞아 프랑스로 가시기 전, 필시 3학년 1학기 때, 우리 동기들과 함께 했던 조촐한 술자리가 아니었나싶다. 약간 술기운이 오르신 선생님은 종횡무진 이야기의 향연을 펼치시다가 한국문학이 소재가 되자, 문득 <마담 보바리>를 예로 들며 말씀하셨다. 문학은 ‘일필휘지(一筆揮之)’가 아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서부터 전체 구성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이제 한국에도 그런 작가가 나와야 한다. “하려면 철저하게 해, 독하게 해…” 독하게! 그 한 마디가 그 순간 내 가슴에 쏜살같이 날아와 박혔었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일까, 이후부터 나를 다그치거나 남을 다그칠 때면 내 입에선 어김없이 그 말이 흘러나왔다(자주 외치다보니 주변에선 그 말을 내 전매특허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비로소 고백하는바, 원래 출처는 정명환 선생님이시다).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사흘 만에 단편 하나를 갈겨대는 짓은 절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충격이 지나치게 컸는지, 하루에 원고지 대여섯 매를 채우면 더는 쓰지 못하는 고약한 병까지 얻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과 연구실이나 도서관에 앉는 시간을 늘여갔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학과장을 맡으신 선생님 밑에서 과 조교 노릇을 하며 선생님의 지도로 논문을 썼고(내 빈약한 불어 실력이 안쓰러워 일부러 지도교수를 자청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도 논문만은 내 생애에 단 한 번 선생님의 찬사를 받았다), 선생님의 배려로 대학 선생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소설쓰기를 놓지 않았고, 선생님의 눈에 들 만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 소설가가 되었다. 희한했다, 나는 결국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나이가 좀 들면서 두 일을 동시에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교직을 포기했을 때 선생님은 매우 근심스러워 하셨는데, 솔직히 정말 큰일이다, 그러고도 제대로 된 소설을 못 쓰고 있으니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뜻밖이라 하겠고 아는 사람들은 너무 새삼스럽다고 하겠지만, 선생님은 폭음주의자(暴飮主義者)이셨다. 그건 학부 학생들에겐 전혀 보여주지 않으시던 모습이어서, 나도 처음엔 꽤나 놀랐었다. 그토록 깐깐하고 명철하게 사유하시는 분이 어쩌면 저렇게 술을 드시나? 그러나 ‘공부’를 좀 하면서, 그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그토록 깐깐하고 명철하게 사유하시니 저토록 술을 드실 수밖에 없구나! 어쭙잖게 인간의 중층성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사실, 그게 인간이긴 하다). 내게 진정 놀라웠던 것은, 그 양면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시는 선생님의 실존주의자다운 정직한 태도이다. 술을 드시다가 “에이, 내 드러워서…” 소리를 시그널로 내뱉고 나시면, 그 다음부턴 온갖 욕설에도 거침이 없으셨다. 그런데, 그러시고 나면 내 막혔던 속도 탁 트였다.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의식의 극단 너머에 있을 어떤 문학의 가능성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태도가 죽음의 위협마저 느꼈을 위암 수술을 받고도 의연하게 버티시는 근본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평소 표현대로 “삶이란 게 제가 싼 똥을 뭉개고 앉는 것”이라도, 그 더러운 삶을 가로지르는 실존적 목표는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존이 되어야 한다. 선생님께서 그간 실천해 보여주신 모습에 기대자면, 그 자존은 고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35년 전의 엄격함으로부터 지금의 다정함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건 내 이해와 느낌이었지 선생님 자신의 의식이나 감성도, 그 뒤에 감춰 놓으셨던 타인에 대한 애정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사이, 선생님은 끝없이 후배․제자들에게 뭔가를 베푸셨으면서도 그들로부터 뭔가를 바라신 적이 없었다. 너희들은 너희 몫을 열심히 해라, 나는 내 몫을 열심히 하겠다, 그러면서 치열하게 만나자. 그런 선생님 앞에서, 내 게으름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수술 이후 어느 정도 가벼운 외출과 외식이 가능해지시고 나서, 어쩌다 부드러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전화를 드리면 어김없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만나는 건 좋은데, 미리 약속해. 밥값은 내가 내게 하겠다고. 내게 요즘 남은 건 돈 밖에 없어요. 죽기 전에 그거 다 써야지…” 수술 이후 뿐 아니라 그전에도 늘 그러셔서, 선생님 모시고 술값 한 번 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서울대 불문과에서 선생이 제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술을 사는 최초의 전통을 만드셨던 분으로서 그걸 끝내 지키고 싶으시겠지만, 이 글을 읽으신 후엔 부디, 어엿한 어른이 된 후배․제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내 침묵의 소리를 들으셨는지, 저만치서, 아, 선생님께서 지긋이 웃으신다. 웃으시면서, 이젠 드실 수도 없으면서 받아놓은 술잔에 혀끝을 대고 입맛을 다시신다. 그리고 중얼거리신다. 햐, 진짜 맛있다, 이걸 못 마시네…
옛날 생각이 또 하나 난다. 대학원 시절, 어느 중국집에선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그랬을 적에, 내가 고량주 술잔에 재미삼아 불을 붙였었다. 술잔 위에 핀 알코올의 파란 불꽃을 보며 선생님께서 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반응하셨다. “햐, 그 불빛 멋있다, 그지?” 차가운 파란 색이 뜨거운 불로 타오르던 그 모양은 이성이 열정과 결합되는 연금술의 한 상징이다. 내겐 그것이 정명환 선생님의 아주 오래된, 한결같은 이미지이다.

[ <<정명환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