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한결같이, 참으로

― 이청준 선생의 죽음 앞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청준 선생의 타계 소식을 전해 듣고 영안실로 달려갔을 때는 당신을 내 안에 어떻게 그려두어야 하는 것인지 모든 게 너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빈소에서 보낸 이틀 동안 계속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매일 열 시간씩 마셔대다 보니 발인을 하는 어제 아침엔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영결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장지에도 따라나서지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 떠나시는 ‘선생님’께 이 무슨 엄청난 결례인고! 이런 글이라도 끼적끼적 적어보지 않고는 이 무거운 마음을 견디기가 좀처럼 힘들 것 같다.

세상사의 온갖 파란만장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가슴 속에 저며 넣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초상은 너무도 간결하고 단아한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 곁에 오래 머물다보면, 아주 나지막하면서도 섬세한 애정, 아주 조심스럽게 숨결을 고르며 내뿜는 열정 같은 것이 은은히, 그러나 점점 더 진해지는 향기가 되어 스며 나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내가 뵈어온 이청준 선생이 바로 그렇다.
한마디로 간결하게 말해야 한다면, 이청준 선생은 ‘애당초’ 소설가였고 ‘한결같이’ 소설가였으며 ‘참으로’ 소설가였다.
애당초 소설가였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이청준 선생이 어떻게 소설가의 운명을 타고 나게 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소설가의 운명을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건, 당신 자신도 끝내 잘 몰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당신 스스로도 마지막까지 이 문제를 계속 자문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초기의 ‘예술가 소설’ 또는 ‘지식인 소설’을 쓸 때나 나중에 이른바 ‘고향 소설’을 쓸 때나, 모든 소설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그 자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뒤집어 보자면, 평생 동안 그런 자문을 했다는 것은, 아무튼, “뭔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이게 내 운명이라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어떤 수락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애당초 소설가’로서의 소명 의식, 장인 의식을 싹틔우고 심화시킨 어떤 뿌리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자의식으로 인해, 이청준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결같이 소설가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청준 전집’의 편집에 참여하며 언뜻언뜻 목격했듯이 이미 끝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끝없이 수정을 거듭하던 당신의 모습, 한 작품과 다음 작품 사이에 어떤 필연이 매개되어야 함을 자각하려 애쓰던 모습은 아무리 봐도 투철한 장인의 그것이었다. 이청준 선생이아말로 진정으로 소설을 자기 삶으로 살아낸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렇듯 소설만이 곧 당신의 존재이유이자 존재방식 자체였으며, 소설만이 모든 세상을 재구성해 펼쳐 보여주는 당신만의 삶의 지도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겠지만, 선생은 소설이 아닌 다른 것을 취하고자 탐해본 적이 없었다. 가령 이청준 선생의 소설은 여러 편 영화화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언젠가 임권택 감독과 영화 현장에서 오랜 기간 작업을 함께 하다가 상경했을 무렵, 우연한 기회에 “혹시 영화를 직접 만들고 싶지는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선생은 단번에 “영화와 소설은 완전히 다른 겁디다. 내가 글 쓰는 것밖에 뭘 하겠어요?”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면서 당신의 소설은 그저 영화의 빌미를 제공한 데 불과하다는 것, 영상일 수 없는 소설은 언어의 기능에 충실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한참이나 이야기하며, 당신 몫이 어디 있는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바로 이 점, 소설의 근본이 언어라는 것에 대한 나름의 깊은 응시와 성찰이 마침내 이청준 선생을 ‘참으로’ 소설가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소설은 많은 묘사를 통해 뭔가를 눈앞에 보여주는 척 하지만, 그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언어의 어떤 내적 울림이 없다면, 그 궁극적인 감동도 없다. 선생의 소설들에 음악이나 차 향기―냄새도 보이지 않는다―, 취기 같은 것들이 자주 은유적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필경 이와 무관치 않을 터인데, 초기 소설들을 감싸는 팽팽한 지적 긴장감으로부터 후기 소설 속에 펼쳐지는 내면 풍경의 유장함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기능과 효과에 대한 탐구는 당신의 소설쓰기의 맨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싶다.
그러고 보니, 이는 위에서 소설가로서의 운명에 대한 자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고 말한 것과 궤적을 같이 한다. 그러고 보니, 아, 이청준 선생은 애당초-참으로 소설가였나 보다…

이청준 선생이 타인들에 대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나도 몇 년 전에 쓴 <종소리와 판소리 사이>라는 글에서 이런저런 기억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배려의 이면에 어떤 속 깊은 까다로움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까다로움이 무엇보다 당신 자신에 대한 반성적 자책의 소산이라는 이야기는 빠트렸던 것 같다.
그렇다, 어찌 보면 이청준 선생은 상당히 까다로운 분이다. 이 말은 물론 상대방에게 까다롭게 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당신이 정녕 상대방을 잘 배려하고 있는지를 끝없이 세세히 자기 점검한다는 의미의 까다로움인데, 그 까다로움은 인연이 깊어질수록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 까다로움은 선생의 배려가 얼마나 진정성을 담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는 바로미터와도 같지만, 때로 상대방에게 당신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느끼며 자학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보는 이의 마음도 안타까워진다(더구나 소설을 쓸 때도 저런 자학이 선생의 건강을 갉아먹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 안타까움은 천근의 무게가 된다).
그런 당신의 마음가짐은 내가 겪은 선생과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지난 4월말, 젊은 사람들 쪽에서 자청해 떠맡아야 할 일도 있고 해서, 선생의 마지막 날들을 돌보고 있던 이윤옥 선생을 통해 미리 시간을 받고, 정과리와 함께 댁으로 찾아뵌 적이 있었다. 선생은 마침 기력이 좀 오른 상태여서 근처의 한갓진 고깃집으로 가 술까지 한 잔 받게 되었었는데, 작년 가을에 얼핏 나눴던 여행 이야기가 떠올라(“그냥 여행이나 한 번 같이 가시지요” 했더니, “글쎄, 의사는 왜 안 그러냐고 하던데…”라고 대꾸했었다), 예전의 남도행을 상기시키며 며칠 훌쩍 선생의 고향 쪽이나 다녀오자고 권했다. 그러자 여행 본성이 되살아 난 듯, 기대에 부푼 듯, 선생의 얼굴은 너무도 환해졌었다. 그래서 며칠 뒤 정말 여행계획까지 다 세우고 떠날 일만 남았었는데, 바로 떠나기 전날 밤 선생의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이윤옥 선생이 전하는 바로는, 다음 날 이청준 선생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 때문에 이 여행이 취소된 것을 너무도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선생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던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 어이없는 낭패들을 안겨드리고…”라는 제목 아래, “어쩌다보니 이 지경까지 허물을 짓고 앉아 있게 됐는지, 용서를 빌 엄두조차 안 나네요. 천행을 얻어 남행길이 다시 허락되기를 빌어볼 뿐. 이청준 합장.” 언젠가 오래 전에 폭음을 하고 심한 주정을 한 번 한 뒤에 그걸 참담하게 자책하던 선생의 나중 모습이 생각나 황망해진 나는, 서둘러, 공연히 가슴 썩이지 마시고 몸부터 살피셔야 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썼다. 그러자 다시 선생의 메일이 왔다: “이 선생, 겨우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그 유채 동백 보리밭 들녘이 다 쇠넘기 전에 남행길이 다시 열리기를 빌겠습니다. 이청준.”
이런 분이니, 달리 또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지난 6월말,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한 선생을 거의 작별하는 심정으로 찾아갔을 때, 선생은 해맑은 얼굴로 추억을 더듬듯,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고향 근처의 남도 풍경을 조용조용 한없이 읊조렸었다. 이상하게 초현실적으로 전개되던 그 풍경 묘사로 우리의 놓쳐버린 남행길을 대신하려는 듯이. 이제, 선생이 묻힌 남도로의 여행은 선생의 문학과 삶을 그렇듯 초현실적으로 찾아가는 시간 여행일 수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2008.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