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처럼, 산소처럼

―오생근 선생 소묘

새삼 헤아려보니, 오생근 선생님과의 인연도 참 오래되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릉동에서 교양과정부를 거친 뒤 2학년 전공과정에 진입해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로 첫발을 디뎠을 때, 검붉게 세월을 머금은 벽돌 건물의 동쪽 현관으로 들어서서 왼편 복도를 따라가다 나오는 좁고 우중충한 불문과 사무실의 문을 열면서, 나는 처음 오생근 선생님과 마주쳤었다. 1974년 2월의 어느 날쯤이었던 걸로 짐작되는데, 아무려나 어연 32년 전의 일이다…

그이는 그 무렵 불문과 사무실―그때는 ‘사무실’이라는 말을 싫어해 모두들 그냥 ‘과 연구실’이라고 불렀었다―의 터줏대감인 ‘조교’였다. 그러나 그 첫 만남의 순간부터 그이는 내게 ‘선생님’이었다. 뭔가를 묻기 위해 말을 건네야 했을 때, 내 입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선생님’―그때는 ‘교수님’이나 ‘조교님’ 같은 직명 호칭을 쓰면 뭔가 모자란 학생이었다―이란 호칭이 튀어 나왔었다. 그러자 동시에 그 방에 앉아 있던 몇몇 선배들이 웃음을 터트렸던 걸,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까지 거기선, 모두들 그이를 ‘형님’이나 ‘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나중에 웃어른들께 배우길, 그렇게 관계를 맺는 경우 나이가 열 살 차이를 넘으면 ‘선생님’으로 부르고, 그보다 적은 차이면 아직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는 ‘선배님’이라 하다가 가까워지면 ‘형님’이라 부르는 게 자연스런 상례라 했다. 그이와 나는 일곱 살 차이인데다가 함께 축구도 하게 되고 틈틈이 문학을 안주 삼아 술잔도 나누며 꽤나 살가운 선후배의 정을 쌓아 나갔으니까, 아마도 언젠가 호칭을 변경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입은 그 후로도 쭉 ‘선생님’을 고집했다. 그이에 관한 한 내겐 그 호칭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 듬직한 풍채와 적은 말수에 낮게 깔리던 목소리하며(그 목소리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를 구성지게 뽑아낼 때는 정말 황홀했다), 겉보기에도 그이의 모든 모습은 멋진 선생님다웠다. 하지만 내 진짜 심리적 문제(?)는, 알면 알수록 그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선생님’의 한 미래형 혹은 이상형이라는 느낌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당시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범접하기 힘든 ‘권위’의 저편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듬직하면서도 동시에 따듯하게 다가오던 그이에게 내가 만나고 싶은 ‘형님-선생님’ 상(像)을 투영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부 2~3학년 시절, 나는 그이에게서 ‘형님-선생님’다운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어줍지 않은 불어 실력 탓에 수없이 번역 문제를 들고 가도 꼼꼼히 해석을 도와주고, 시답지 않은 문학적 질문을 해도 내 수준에 맞춰 적절히 대답해 주고, 더 나아가 내 상황과 사는 꼴까지 배려하며 앎을 넓혀주려 하던 그이의 한결 같은 태도를 나는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한번은, 어느 과목에선가 내가 워낙 ‘딕테(불어 듣고 받아쓰기)’를 못해 아주 형편없는 학점을 받아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담당 선생님에게 나에 대한 변명을 대신해 주며 재고를 부탁했던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학점이 상향 수정되지는 않았으나, 한 후배를 위한 그런 마음 씀씀이야말로 그이의 인간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그런 관계의 체험은 당연히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선생님이 되어 성심여대에 부임하고 난 후에도, 그이의 정감 어린 활약상은 계속 화젯거리로 들려왔었다. 여자대학이어서 그곳 학생들에겐 필경 ‘형님-선생님’이 아니라 ‘오라비-선생님’으로서였겠지만, 그 덕분에 그이가 더욱 섬세하고 부드러워져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유학 후 다시 모교로 자리를 옮긴 다음의 그이의 모습은 급기야 ‘남편-선생님’으로까지 발전한다. 나도 모교로 가고 난 얼마 후 90년대 초였던가, 과 학생들이 재미 삼아 인기투표 비슷한 걸 했을 때, 그이는 특히 여학생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남편상으로 꼽혔다.
남자인 내가 옆에서 봐도 그이는 그렇게 손꼽혀질 만 했다. 나는 그때 ‘형님’ 감으로 지목되었는데, 이 또한 그이에게서 어설프게나마 그 역할을 익힌 탓이리라. 만약 다시 그런 투표를 한다면, 그이는 이번엔 이상적인 ‘시아버지-선생님’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늦둥이 아드님의 나이가 아직 어려 실제로 며느리를 맞을 날은 더 기다려야겠지만, 나는 벌써 그이에게서 온화하고 자상한 미래의 시아버지를 본다. 예전에 내가 미래의 ‘형님-선생님’을 보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이는 언제나 구체적인 삶에 근거한 행복한 미래의 품을 앞서 드러내 보이며 남을 감싸 안아주는 어떤 문학적 전형처럼 여겨진다.
그런 인간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를테면 정중동(靜中動)이랄까, 움직임이 너무 고요해서 티가 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한 예로, 후배나 제자의 취직을 위해 그이가 소리 소문 없이 애쓰던 방식이 늘 그랬다. 다시 개인적 기억을 더듬자면, 내가 지금의 아내인 과 선배와 연애에 빠졌을 때 주변의 오해나 방해가 없도록 여러 관계에 은밀히 신경을 써주던 사람, 내가 문학에 대한 열정을 마구잡이로 드러낼 때면 그게 남들에게 너무 튀어 보이지 않도록 세심히 분위기를 가다듬어주던 사람(그러면서 슬그머니 나를 김현 선생님에게 이끌고 간 사람), 김현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반(反)-문학적으로 험해진 과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문학적으로 숨쉴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틈틈이 내 연구실 문을 두드리며 웃어주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이 그이였다.

그이를 거울삼아 나를 비춰보면, 나는 언제부턴가 성장을 멈춘 난장이나 다름없다. 결국은 선생 노릇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내 연구실의 짐을 싸던 지난 2월, 사물함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편지더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뒤적이며 한 동안 추억에 잠겼던 일이 있었다. 그중엔 그이의 편지도 다섯 통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세 통은 그이의 프랑스 유학 중에, 두 통은 나의 프랑스 체류 중에 나눈 편지들이었다. 사신(私信)이긴 하지만, 1980년에 씌어진 다음의 두 대목을 여기 공개하는 것이 그이에게 누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 외국에 나와서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과거와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철저히 반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생각돼. […]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 동안 안일하게 글 쓴 것이 많이 있어 부끄럽고, 아무래도 글이란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써야 될 것 같은 생각이네. (1980. 2. 7.)

― 어느새 일년쯤 외국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고생이란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생이 무슨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 한 여유를 갖고 돈 쓸 때 쓰고 놀 때 잘 노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이 쓸데없이 지나쳐, 좀 못된 사람 되기 쉬운 것이 외국생활이기도 한 것 같군. (1980. 11. 4.)

이 구절들은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그이의 사람됨이 어떤 정신의 밑바탕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인지를 잘 깨닫게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이를 움직이는 동력의 원천은 끝없는 자기반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이가 자주 말하기 자체를 매우 조심하는 모습, 심지어는 말을 더듬거나 삼키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실상 그이가 얼마나 자기 말을 반성하며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때로 아주 유쾌하게 말을 쏟아놓을 때가 있는데, 가만 들어보면, 그건 대부분 남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 온 것들을 적절하게 타이밍을 맞춰 펼쳐 보이는 경우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그이는 ‘두 얼굴의 사나이’이다. 그러나 혹여 그 두 얼굴을 이중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이를 질투하는 사람일뿐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바, 그이의 진정성은 그 두 얼굴의 하나-됨을 자연스러운 전체로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데 있다. 가령, 그이의 첫 비평집인 <<삶을 위한 비평>>을 보자. 그이의 전공은 초현실주의지만, 그 책은 구성부터 내용의 각론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적 관점이 현실주의적 관점과 결코 적대적인 이항대립이 아니라 한 몸의 양면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증언하고 있다.
생활에서도 비평에서도 공히 느껴지는 그이의 탁월한 균형 감각은 아마도 그런 태도에서 생성된 것이리라.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감각과 의식이 특히 80년대에 더 큰 현실적 파동으로 확대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무척이나 크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이가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창간한 계간 <<외국문학>>의 편집 활동―출판사 사정으로 2년 반 만에 그쳐야만 했던―의 의미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 시대의 한계를 지적해두고 싶다는 뜻이다. 모두가 눈앞의 현실적 문제에만 근시안적으로 매달려 있던 그때, 이번엔, 그이가 그 잡지를 통해 짐짓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난 듯한 학구적(?) 태도를 내세웠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계간지의 특집들만큼 은유적으로 당대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만든 기획은 지극히 드물었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한 사회의 심층까지를 함께 들여다보는, 그런 넓고 깊은 전망 하에서 드러낸 참다운 균형 감각의 소산이었으므로.
그 균형 감각은 근본적으로 ‘못된 사람’이 안 되려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실존 의식과 책임감에 기초해 있다. “돈 쓸 때 쓰고 놀 때 잘 노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전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전언은 근본적으로 남과의 관계를, 남과의 나눔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담 삼아 덧붙이건대, 그이는 미식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미식 취향을 혼자만 즐기고 숨기는 적이 없다. 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턱 낼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원할 때는, 일부러 다시 한 번 그 식당에 가서 먹어 보고 비싼 술값을 줄여주기 위해 술을 몇 병 준비해 가도 되는지 까지를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예약을 주선하는데, 그쯤 되면 그이의 배려에 절로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쓰다보니 내 자괴감만 자꾸 커진다. 내가 최종적으로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이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불필요한 말꼬리를 달지 않는 솔직한 몇 마디로 나를 수긍하고 격려해줬었다(그이는 구차한 수식이나 변명에 대해선 질색인데, 이건 그이 문체의 기본적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으론, 불문학이나 인문학―나아가 대학 전체―이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시기에 내가 내린 그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리고 까마득한 후배가 저버린 몫까지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을 심정은 오죽이나 무거웠을까.
그이다운 담백한 어투로 말하겠다. 그이는 요컨대 언제나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가꿔나가는, ‘진실한’이라는 수식어의 바른 의미를 일깨워주는 우리 시대 지식인의 한 표상이라고. 그이를 생각할 때면, 나는 먼저, 논두렁에 가만히 서서 이미 먹은 먹이를 되새김질하는 황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열심히 습득한 지식을 거듭거듭 반추하며 선하디선한 눈망울을 굴려 제 앞에 펼쳐진 너른 공동체 문화의 논바닥을 어떻게 갈아나갈 것인지 살피며 성찰하는, 듬직하고 믿음직한 지식인의 자태이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어느 틈에 잊어버린, 건강하고 아름다운 지식인의 ‘오래된 미래’가 아니던가.
그이에겐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오생근’이라는 지식인과 그 존재를 감싸고 있는 삶의 풍경이 구분되지 않는 한 몸으로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마치 어느 인상파 화가의 점묘화를 지그시 들여다보다가 눈을 껌벅이고 다시 보면, 점점이 찍힌 형상들이 물질적 경계를 지우고 섞여 화폭에 온통 색색의 기체만이 번져 있는 것 같은 환각에 휘말리듯이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색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색체를 숨쉬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받는 그이의 궁극적 존재감은 그런 것이다. 황소처럼 커다랗던 그이가 어느새 기체처럼 가볍게 내 가슴속에 들고난다. ‘산소 같은 여자’는 어느 광고 모델일지 모르지만, ‘산소 같은 남자’는 단연코 오생근 선생님이다.
[<<오생근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