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의 문학』과 80년대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30년>>에 수록된 원고임.

1980년 ‘광주의 봄’이 시든 후 계간 <<문학과 지성>>이 강제 폐간되었고, 1987년 ‘서울의 봄’이 피어난 이듬 해 <<문학과 사회>>가 새로 창간되었다. 이 두 계간지 사이의 8년은 알다시피, 폭압적인 신군부의 통치 아래서 사회․문화적 활동이 극도로 짓눌려 있던, 한마디로 “인간적인 숨쉬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계간지를 비롯한 각종 정기간행물에 대한―일반 서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권력의 엄격한 통제는 특히 문화적인 숨쉬기를 어렵게 했다. 단순히 정보․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기본적 의사소통의 토대가 위축되었다는 뜻에서만이 아니라, 폐간된 계간지들이 그 동안 소중히 키우고 확장시켜왔던, 즉 사유와 상상의 금기체제들을 조금씩 허물며 새로운 이념적 모델들을 실험하던 집단적 문화 활동의 숨통이 강압적으로 조여져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문학적 ‘에콜’로서의 ‘문지파(派)’가 자칫 난파하여 표류해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자체 내에도 감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지 1세대 동인들은 그 위기를 새로운 전환의 기회로 바꾸고자 기민하게 대처했음이 분명하다. 자체적으로는 계간지 중심의 활동을 출판 기획의 차원으로 과감하게 전이․확대시켜 다양한 총서들을 개발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발굴하는 한편, 먼 미래를 보는 눈으로 후배 세대가 덧없이 수몰되지 않도록 <<우리 세대의 문학>>이라는 쪽배를 한 척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 소중한 쪽배에 탔던 한 사람의 간추린 항해일지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 항해를 함께하며 나눈 세세하고 정감어린 많은 기억들이 얼마든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아주 건조하게, 우선 그 ‘공적(公的)’ 기억의 기본골격만을 추려 저장해두고 싶다.

<<우리 세대의 문학>>은 1982년 5월부터 1987년 6월까지 총 6집을 간행한 부정기 연쇄형 문학지였다(5집부터는 제호의 ‘세대’가 ‘시대’로 바뀐다). 정기간행물이 허용되지 않아 일종의 편법을 동원했던 것인데, 당시엔 이런 형태의 간행물을 ‘매거진’과 ‘북’의 합성어였던 ‘무크(mook)’지라 불렀었다. 그 최초의 본보기는 <<실천문학>>이었고, 그 다음으로 <<우리 세대의 문학>>, 뒤이어 <<언어의 세계>> <<문학의 시대>> <<지평>> <<전망>> <<삶의 문학>> 등등이 속속 등장했으며, 나중엔 정치적 투쟁 노선을 예각화한 <<문학예술운동>> 등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문화 전반으로 관심을 확대한 <<공동체 문화>>라든가 미술․음악 등 여타 영역에서의 유사한 간행물들도 출현하게 되었다. 동시에, 기존의 동인지 형태도 다시금 활기를 구했다. <<반시>> <<자유시>> <<목요시>> 등으로부터 <<시운동>> <<5월시>> <<시와 경제>> <<열린 시>> 등에 이르기까지, 시 동인지들은 단순한 작품집을 넘어 지면의 성격을 다양화하면서 나름의 운동성을 띠기 시작했고,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작가>> <<작단>> 등의 소설 동인지들도 잠시 얼굴을 내밀었었다. 자발적으로 원했든 불가피한 선택이었든, 이 매체들은 ‘유신세대’ 혹은 ‘80년대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 세대의 주요 활동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70년대가 20대의 나이와 겹치는 우리 세대의 이른바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이라는 양대 계간지의 위용과 활약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성장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그 때문에 많은 문학 지망생들은 어쩌면 매우 착잡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어느 쪽에 속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극복의 문제(제 3의 길은 없는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두 계간지의 폐간은 그런 실존적 고민 자체를 무화시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시대적 상황 탓에 진영의 선택 문제 대신 문학적 생존 자체의 문제와 마주치게 되었지만, 젊은 패기 앞에서는 그게 그리 큰 고민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고, 어떻게 보자면 매우 역설적인 의미의 자유를 구가하며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한국의 ‘문학 사회’에 어떤 변화의 조짐들이 일기 시작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가령 등단 방식의 파격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 등, 기존 매체의 수직적 공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관행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등단 방식이 더 이상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무크지나 동인지의 주체들은 자신들이 남을 공인해주는 자리에 있다기보다는, 작품이 좋고 뜻에 맞으면 ‘동인’처럼 함께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 등장한 문인들의 자기소개 속에서 심심치 않게 “모모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는 투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 세대의 문학>>의 경우엔, 시인 이영유 송찬호, 소설가 최시한 김남일 박인홍, 극작가 김상수, 평론가 진형준 등이 마찬가지 방식으로 문학 활동에 첫발을 디뎠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등단 순이 아니라 이름의 가나다 순으로 작품을 게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요지부동으로 고착화되어 있는 듯이 보이던 창비/문지의 이분법적 대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현상이었다. 사실 이 이분법의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지적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이 이분법적 구도는 여전히 강한 현실적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줄기의 큰 흐름이 무크지․동인지들로 분화하며 여러 가지를 치면서 각각의 문학적 입장들이 다양하게 표명되기 시작했고, 그러자 한편으론 이념적 대립이 첨예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로 다른 입장들 사이의 교류와 혼종 또한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률적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여러 문학내적 요소들이 이합집산하며 새로운 조합들을 만들어내면서, 작지만 매우 다원적인 집단들로 구성된 문학 사회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 평론가 정과리는 이 현상을 ‘소집단운동’이라고 요령 있게 명명했고, 그 운동의 형태에 대해서는 김정환 시인이 ‘문화적 게릴라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비정규적인 여러 문학매체들이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곤 했으니 가히 그렇게 불릴 만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문학적 이념을 일관되게 심화시키고 확산시키기엔 현실적 토대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이 비정규적 활동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소집단운동의 당사자들은 누구나 그런 상황을 일종의 파행적 과도기라고 보고 있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곧 새로운 정규적 문학 활동의 시대가 올 것이다. 나아가 90년대로 접어들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계간지 시대가 열릴 것인데, 그 기본 동력이 80년대의 활동 경험을 통해 충전된 것이었음은 역사적 맥락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우리 시대의 문학>>의 마지막 편집동인인 다섯 사람, 권오룡 성민엽 정과리 진형준 홍정선은 그대로 계간 <<문학과 사회>>의 창간 동인이 된다(여기에 임우기가 추가로 참여한다). 그렇게 보자면, 이 무크지 시절은 새로운 정규적 문학 활동의 기반을 다지고 문지 2세대의 틀을 짜는 준비기간이기도 했다. 어느 시점으로부턴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우리는 문지를 창립한 1세대 동인들로부터 미래에 대한 구상을 암시받고 있었다. 그것은 대략, 계간지를 다시 내게 된다면 <<문학과 지성>>을 복간하는 게 아니라 새로 잡지를 창간해 우리 세대에게 맡기겠다는 것, 나아가 우리 세대가 문학과지성사의 다음 활동 주체가 되도록 밑받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대한 나름의 신중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처음엔 우리 세대의 문학적 생존을 보장해줄 매체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을 뿐 아니라, 막 등단을 시작한 우리 세대의 전체적 윤곽도 아직 확실치 않았다. 요컨대 어떻게 문학 활동의 공동체적 관계를 확보해야 할런지 불분명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소집단적인 편집동인 체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1집의 편집동인인 시인 이성복, 소설가 이인성, 평론가 정과리(당시 필명은 정다비)는 알다시피 모두 서울대 불문학과 출신들이다. 이 사실은 그들이 <<문학과 지성>>의 창간을 선도한 고(故) 김현 선생의 문학적 영향력 아래서 성장했고, 바로 그가 이 무크지를 문지에서 출판하게 만든 매개자였음을 알려준다. 이 무크지를 구상한 것은 우리 자신이었지만, 그 현실화의 길을 터준 사람은 김현 선생이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그 무렵의 불문학과는 김현이라는 존재 덕분에 서울대 안의 문학적 메카와도 같았다.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문학의 전성기이도 했거니와, 새로운 비평 이론과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한국문학을 풍요롭게 해석하여 생기를 불어넣고 신인을 발굴하는 그의 뛰어난 비판력․감식력과 따뜻한 인화력으로 인해,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비평가 권오룡, 소설가 최수철도 불문학과 출신이었다. 그러다보니 국문과 출신의 평론가 홍정선이나 미학과 출신의 시인 황지우처럼 김현 선생에게 사숙한 제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생겨났고, 영문과 출신의 시인 김정환처럼 문학적 노선을 전혀 달리하면서도 김현 선생을 존경하는 경우 역시 많았다.
아무튼 출발은 그러했고, 그 출발이 지닌 한계도 분명했다. 고작 세 사람의 뜻만을 모아, 1집의 머리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움직임들 간의 ‘열린’ 관계”를 확립하고 “가열한 ‘만남’의 공간”을 조성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오로지 젊은 열정에 의지해 온몸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선 미리 알고 있던 황지우를 끌어들였고(그는 <<우리 세대의 문학>>의 표지 도안도 맡아주었다), 창비 쪽의 젊은 문인을 대표하는 김정환을 찾아갔다. <<시와 경제>> 동인이었던 이 두 사람은 이후 거의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며 편집일이나 다른 민중문화 그룹들과의 교류를 도왔다. 너무 일찍 타계한 고(故) 채광석 시인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편으론 이인성이 소설가 임철우와 통하게 되면서, 광주 쪽의 <<5월시>> 동인들과도 연결이 가능해졌다. 대구에 있던 이성복과 진해에 해사 교관으로 내려가 있던 정과리는 경상도 쪽의 젊은 문인들과 접속했다. 그리고 순수 상상력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던 <<시운동>> 동인들과도 대화를 텄다.
점차 문학 이외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간 그런 교류는 일일이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자연히 술자리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꼭 기록해두고 싶은데, 그 무렵의 우리 거점은 ‘반포치킨’과 ‘고선’이었다. 애초에 전자는 김현 선생, 후자는 김주연 선생의 단골 아지트였으나, 그분들에게 이끌려 드나들다가 그 한쪽 공간에 아예 우리 둥지를 틀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우리 세대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고선’이 거의 우리 사랑방 구실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정적인 술판이 벌어진 것 말고도, 문을 닫기까지 최소한 이틀에 한 번은 그곳에 들렸던 게 분명하다(일주일에 5~6일씩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으니까, 전혀 과장 없이 하는 말이다). 솔직히, <<우리 세대의 문학>>을 키운 건 8할이 ‘고선’이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술값에 대해 무한히 너그러웠던 그 집 덕분에, 우리는 찬란한 “고통의 축제”를 한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소중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엉키고 개기는 과정에서, 서서히 새로운 편집동인 체제가 갖춰져 갔다. 우리는 1세대 동인 시스템을 모범 삼아, 궁극적으로 비평가들이 팀웍을 이루는 방식을 지향하고 있었다. 마침 권오룡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왔고, 김주연 선생이 소개한 성민엽이 문지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래서 우리는 4집(1985)부터 이성복․이인성이 빠지는 대신 권오룡․성민엽․정과리를 편집동인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들이 기본적으로 문학사회학에 기반을 둔 비평가들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6집(1987)에서, 실증주의에 충실한 홍정선을 영입했고(그는 그때 <<문학의 시대>> 편집동인이었다), 문학상상력을 연구한 진형준이 합류했다. 마침내 <<문학과 사회>>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정규 계간지 시대로 접어든 후, 어느 시점에선가 진형준이 <<상상>> 쪽으로 떠나고, 임우기는 ‘솔 출판사’를 차려 독립하고, 철학자 김진석이 잠시 합류했다 이탈하는 등의 부분적인 변화를 겪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문지 2세대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우리 세대의 문학>> 1집의 개별 제호는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였다(정기간행물의 혐의를 피하고자, 4집까지는 개별 제호도 따로 내걸었었다). 앞선 이야기를 통해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바지만, ‘만남’은 우리의 최초의 화두였다. 창간의 말에서 엿보이듯, 우리는 “나뉘어져 있는 여러 문학적 탐색들 사이의 길트기, 종합에의 의지”로 충만했다. “지난 세대가 겪은 모순으로서의 뜻 없는 대립을 지양하고, 진정한 나뉨과 묶임의 자장을 형성해” 보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이 의지를 현실화하는 1차적인 작업은 서로 문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진영의 작품들을 한 공간 속에 모아 그 차이와 위상과 전체적 구도를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예컨대 하종오 홍일선 박영근 등의 시가 청탁되어 최승자 최승호 이문재 등의 시와 나란히 대조 효과를 자아냈다. ‘세대’ 대신 ‘시대’ 개념으로 확장된 5집부터는, 김지하 시인과 정현종 시인이, 신경림 시인과 황동규 시인이 자리를 나란히 했는데, 이는 이전의 문지 간행물에서는―창비 간행물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연극 장르로도 확장되어, 이현석의 희곡을 소개하는 가하면 당시 노동현장에서 중요한 문화적 몫을 담당하던 집단창작극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3집부터는 비평 분야도 미술․음악․대중매체 영역으로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적 나열은 말 그대로 ‘1차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작업은 당연히 그 충돌과 중첩의 공간으로부터 수직적 전망을 길어 올리는 단계로 심화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구상은 2집에서부터 조금씩 구체화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토론다운 토론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여러 경향을 대표하는 12명의 시인․소설가들에게 비교적 상세한 질문 항목들을 전달한 후, ‘우리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답변의 글을 부탁했다. 정과리가 권두 발제로 <소집단 운동의 양상과 의미>를 쓴 것도 같은 기획 하에서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적 대화의 ‘코드’를 마련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매체들이 분화되어 있던 그만큼이나, 문학을 논하고 주장하는 언어 체계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대화의 토대를 다지며 문제의 틀을 구축해나가려는 이 시도는 3집에서 보다 구체적인 주제들로 수렴되어, 문학적 대화에서 작가의 상대 항을 문제 삼는 ‘독자란 누구인가’와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기본 개념들을 우리 상황에서 따져보는 ‘소설 논의를 위한 몇 가지 검토’가 기획되었다. 다분히 추상적일 수 있는 이 논의는, 문학 토론의 진정한 출발점은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다음 호에서 10명의 작가를 통해 한국소설의 실제적 성과를 검토하는 ‘80년대 소설이 가고 있는 길’ 특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본격적으로 우리의 관점을 제시하는 ‘한국사회와 문학적 인식의 문제’라는 주제가 5집에서 권두 특집으로 다루어진다. 미래의 <<문학과 사회>>를 이끌어갈 다섯 비평가가 모두 참여한 이 특집은 우리 활동의 중간 결산이자 새로운 전환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간략하게 말해, 우리의 입장은 문학 역시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제도이자 생산물이지만 그 생산 동력이 상상력임으로 인해 독특한 자율성과 특수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 문화 양식이라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후 이 명제는 동인 각자마다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나타내고 또 변모해나가기도 하지만, ‘문사’ 1세대이자 ‘문지’ 2세대인 ‘우리’를 묶고 유지시켜 나가는 문학관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얼핏 문지 1세대 동인들이 지켜온 인문학적 전통으로부터 이탈해 사회학적 영역으로 옮겨간 듯이 보일 수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식의 단순 판단에서 비롯된 뜻밖의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우리의 근본적 태도가 1세대와 동일한 ‘문학주의’―이 묘한 용어를 여기선 긍정적으로 사용하겠다―임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문학의, 문학에 의한, 문학을 위한 사유를 전개했고, 이를 위해서만 사회학을 흡수했던 것이다. 자평을 하자면, 당시의 전체적 문화 지도를 조감해 볼 때, 우리는 당시 한국사회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던 ‘사회학적 제국’의 바깥에서 그 제국과 동등하게 지식을 교역하던 문학 독립 국가와도 같았다고나 할까.

‘세대’를 ‘시대’로 확장시킨 것이 <<우리 시대의 문학>> 5집부터라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었다. 이 전환은, 우리로선 이제 여건만 조성된다면 본격적인 정규 계간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나름의 의욕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실상 편집 내용도 이때부터 일반 계간지 형태로 정비되었다. 5집과 6집은 특집과 창작 란 외에, 주목되는 신작들에 관한 리뷰와 시의적인 논문․비평 란을 기본 골격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과 사회>>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지 1세대 공동체와의 관계 정립 문제가 선결되어야만 했다. 그때까지 문지 활동의 주류를 형성해온 동반자 집단(범 4․19세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아직 문지의 한 모퉁이에 괄호 쳐져 있는 존재들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 괄호를 풀고 두 세대를 통합하는 새로운 공동체 구도와 위상을 그려내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세대 갈등 현상 같은 것이 없을 수 없었다. 정확히 하자면, 그 갈등은 문제 1세대 동인들과 직접적으로 빚어졌다기보다는, 서로 교류가 충분치 않았던 그 동반자 집단과의 관계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조금 전에 우리의 기본 태도에 대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점을 흘렸었는데, 그분들은 아직 ‘우리 세대’에게서 어떤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분들의 우려가 노출된 대표적인 경우가 계간지의 복간 혹은 창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던 무렵이 아니었나싶다. 그분들은 기본적으로 문지 1세대 동인들이 다시 편집을 맡는 <<문학과 지성>>의 복간을 바라고 있었고, <<문학과 사회>>의 창간 쪽으로 흐름이 잡혔을 때는 그 제호에 대해―‘사회’를 내세웠다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당연했지만, 그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