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해설

* <<동아일보>> 기획 연재: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55)
한없이 지루한데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연극, 근원적인 비애와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막연하고 야릇했다.
그럼에도 조만간 이 낯선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이 세계로 번져나갈 것이었고, 차후 베케트는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때, 사람들은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부조리’의 인식에서 이 연극을 이해하는 단서를 구했다.
‘부조리’의 개념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 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철학적 주제를 제기한 사르트르와 카뮈 이후, 철학자이기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였던 부조리 ‘작가’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 부조리답게 보여주느냐는 것이었다.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 촉발된 베케트의 도전은 “혼돈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 그 자체로 빚어진 이 형식은 당연히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다. 즉, 이성의 명령으로 짜여진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과론적 서사구조의 해체일 것이다. 기승전결 식으로 정형화된 ‘이야기’의 선적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에서는,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 이 작품 속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이다.
거기서, 등장인물들은 마치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과도 같다. 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할 일’ 즉 ‘역할’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올 것인가? 과연 그럴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고도>>는 그 순환구조를 통해, 끝없이 유예되는 기다림 속에서 끝없이 피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은 우리를 어떤 역설적인 악몽 속으로 이끌어가는 듯하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동아일보, 2005. 6. 7.]

단행본판 수록 원고 (확장본)

한없이 지루해도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듯한 연극, 낮게 깔린 어떤 근원적 슬픔과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1월,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그처럼 모호하고 야릇한 느낌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이 독특하고 낯선 연극적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은 전염병처럼 전 세계로 번져나가고, 오래지않아 이 작품은 20세기가 낳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보수적인 더블린에서 자유로운 파리로 문화적 망명을 택해 거의 은둔에 가까운 삶 속에서 모국어인 영어 대신 불어로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던 베케트(1906-1989)는,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 아다모프․이오네스코․주네 등과 더불어, ‘반(反)연극’ ‘신(新)연극’ ‘전위 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그의 소설들 또한 ‘신소설’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날 베케트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시대적 조류의 명칭들이 암시하듯,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특히 ‘부조리’의 인식과 형상화라는 관점에서 그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자주 베케트 논의의 출발점을 이루는 ‘부조리’ 개념은,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 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 또한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해명되고 장악되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인물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대한 혼돈”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자문할 때, 베케트가 이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나누어 갖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부조리’ 탐구의 선구자들인 사르트르나 카뮈는 철학적 성찰에서나 그 문학적․연극적 형상화에서나 여전히 이성적 논리 구도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철학자이기 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이고자 했던 부조리 문학․연극 계열의 ‘작가’들은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한 부조리 그 자체로 보여주고 느끼게 할 것이냐는 문제에 도전했다.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회의로부터 베케트는 “혼돈에 적합한 형태”라는 명제를 내걸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그 명제를 실천하는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전통의 눈으로 볼 때, 이 혼돈의 형태가 대번에 드러내는 특성은 바로 전통을 강렬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명령에 의해 짜여진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필경 인과론적 서사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리라.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행동’과 ‘갈등’이 빚어내는 ‘사건’을 기승전결 식으로 정형화한 이야기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파편화한다.
그 결과, 이 작품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없다는 말이다. 시간은 모래알갱이 같은 ‘지금’ 이 순간들만으로 무수히 분절되어, 제논의 역설처럼 매 순간 속에 그냥 그대로 “멈춰서 있다.” 어떤 변화가 있다하더라도, 그건 그저 ‘문득’ 발생하는 우연일 뿐이다. 이에 상응하는 공간 역시 매순간의 ‘여기’에 불과하다. ‘저기’와 ‘여기’의 “풍경의 차이”를 굳이 분별할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다.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런 세계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마치 아무 ‘역할’도 맡지 못한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과도 같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행위란 그저 순간순간 “살아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늘 뭔가를 찾는” 즉흥적인 모습뿐이다. 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찾는(또는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고도를 되뇌는 것도 바로 할 일을 얻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고도를 만나게 될 때를 그리며, 그들은 자문한다: “그때 우리의 역할은 뭘까?”
고도는 그 의미 없는 세계에서 그들에게 ‘할 일’을, 즉 의미 있는 역할을 부여해줄 존재이다. 고도가 이들 삶의 어떤 희망이나 구원의 상징인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다. 그렇다면 그런 고도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가? 아니, 과연 오기는 올 것인가?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물음일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베케트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다”라며 슬쩍 질문을 비껴나갔지만, 작품의 구도로 보자면, 이 수수께끼 같은 고도의 도래는 끝없이 유예되어 왔고 유예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유예될 것으로, 결국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2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원형적 순환구조는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계속 반복되며 심화되는데, 그 구도 속에 갇힌 인물들은 갈수록 더욱 피폐화지는 마모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 구조는 흡사 나사가 둥글게 맴돌면서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는 것 같은 양태를 띠면서 오로지 바닥 모를 절망만을 향해 하강한다. 그리고 어떤 희망도 끼어들 틈이 없는 그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은 서서히 소멸해간다. 사물과 육체를, 언어와 정신을 차례로 소멸시켜 나가는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력은 문학사․연극사를 통틀어 그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베케트의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악몽을 꾸며 그 장면들을 빤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악몽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과 유사한 체험이랄까. 그때, 너무도 비현실적인 혹은 초현실적인 영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꿈이 어느 순간 현실의 허울을 벗기며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핵심을 곧바로 찔러오듯이,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 삶에 대한 지극한 은유체로 작동한다. 그것은 매우 역설적인 예술로서의 악몽이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베케트 작품들
불문학자 오증자가 번역한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0)가 현재 국내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베케트의 희곡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불문학자 정명환에 의해 최초로 번역되어 <<노벨상 문학 전집(11)―베케트 편>>(신구문화사, 1973)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었는데, 그 책에는 여러 역자들이 나누어 번역한 베케트의 다른 희곡들과 소설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큰 도서관에서나 간신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소설로는 단편집 <<첫사랑>>(전승화 역, 문학과지성사, 2002)을 시중에서 구해 읽을 수 있다.

* 이 확장본 글은 <<권장도서 해제집>>(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에 수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