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아버지의 유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정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책임을 성실하게 실행하여 자기가 태어날 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로 사람과 사귀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란 원래 약한 존재이다. 마음 속에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여 올바른 생활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
비록 내 육신은 떠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살아서 함께할 것이다.
내 무덤 앞의 작은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2004년 2월 1일
이 기 백

이 짤막한 글은 내 아버지의 유서 전문이다. 그것을 이런 자리에 공개하는 까닭은, 어쩌면 이런 식의 유서를 앞으로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언어’는 흡사 다시는 못 볼 광활한 낙조의 풍경처럼 내 앞에서 붉게 가라앉고 있다. 하관을 마치고 돌아온 자리에서 어머니가 내민 이 글을 읽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참 마지막까지 아버지답구나”라는 일종의 경탄과 함께 “저런 삶의 태도는 이제 아버지 세대가 마지막이겠구나”라는 묘한 회한이 착잡하게 얽혀들었었다. 내겐 그 말들 하나하나가 너무 아뜩했다. 내가 떠나온, 혹은 내가 벗어나려 발버둥쳐온 어떤 먼 자리를 상기시키는 그 말들은 그냥 말뿐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아버지가 한 생애동안 몸으로 살아낸 말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공적 책임을 지닌다고 전제된 삶, 그 책임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으며 전개된 삶!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기독교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성장해, 학병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월남민이 되어 다시 6·25 전쟁을 겪고, 이어서는 4월 혁명과 이후의 군사 독재 시절 등 파란의 세월을 관통하면서도 학자로서의 자신과 학문적 진실을 지키려 했던 한 ‘근대적 선비’ –그것이 아마 대략적인 아버지의 초상일 것이다. ‘근대적 선비’란 표현은 필경 모순 결합적 표현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다. “평안도 상놈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별로 자랑할 만한 재간이 없는 나는 일생 동안 공부나 하며 살기를 원하였다”고 어떤 회고담에 적었을 때, 그 모순은 이미 결합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선비란 원래 양반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 상놈-선비의 역할을 가능케 해준 것은 물론 유교를 대체하는 기독교적 계몽주의였을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마지막 10년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잠재력은 이미 어린 시절에 내장되어 있었을 것이나, 당신은 오랫동안 제도화된 교회를 멀리했었다. 세속적 욕심에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스스로도 세속적 권세의 확장에 욕심을 부리며 형식주의에 빠진 교회 풍경을 아버지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다. 아마 무교회주의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저 엄격했던 순수 이상주의를 추종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도 어려서 겪었었지만 할아버지의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이상하게도 유교주의를 닮은, 때로는 매우 독단적이기까지 한 신앙이었다(아버지도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형식주의나 독단주의를 합리주의로 대체하려 했고 그 실천의 길로 택한 것이 바로 역사학이었다는 게, 내 어설픈 짐작이다.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성적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그 논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과정은 이성적이며 목표는 절대 진리인 사유 구조, 이것은 내게 오갈 데 없는 ‘근대인’의 전형으로 비쳐진다. 철저하고 성실하게 그 사유 구조를 밀고나간 아버지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당신의 삶의 체험과도 무관치 않겠지만, 사실 혹은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이념의 기치 아래 외쳐지는 거짓 구호들의 선동성 혹은 선정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단순히 민족주의 사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사학자가 아닌 내가 함부로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신민족주의 사학’을 이야기했을 때 그 ‘신’이라는 접두어를 쓴 까닭은 철저하게 국수주의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이후 역사학에서의 ‘인간 중심의 이해’를 내세운다). 아버지는 국수주의야말로 식민주의의 다른 가면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당신은 민족이라는 샘플을 통해 보다 보편적인 세계사적 진리를 찾고 싶어 했었다. 묘비명이 이야기하듯, 민족은 가족이나 이웃처럼 사랑의 대상이며, 그 민족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은 진리의 추구를 통해서라는 것이다(“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 과연 그 보편적 진리라는 게 어떤 차원에 존재하는지는 나로선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20세기 한국 지식인의 한 표본 곁에서 성장한 셈인데, 그 과정은 한편으론 혹독한 훈련이었고 한편으로 처절한 도전이었던 것 같다…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위 유서의 어법이랄까 문체의 특징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우선, 첫 문단의 첫 두 문장이 ‘것이다’라는 종결 어미로 끝나고, 첫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의 마지막 서술어로는 ‘바란다’가 씌어지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얼마나 세상과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다음, 첫 번째 문단의 두 번째 문장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쓰는 것은 금방 이해를 하겠는데, 세 번째 문장에서 하필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쓰는 것은 왜일까? 더 나아지려는 노력이나 열정 혹은 욕망이 교만으로 변질되기 쉬우니 잘 경계하라는 뜻을 강조하는 어법이 아닐까?
그 다음, 두 번째 문단에서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이라고 쓸 수도 있는 어휘를 굳이 ‘절대자’라고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신의 실존적 종교는 기독교지만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드러내려는 학자적 사유가 여기에 섬세하게 개입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것은 종교를 달리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다시 그 다음, 세 번째 한 문장짜리 단락에는, ‘누구와’ 함께 할 것이란 표현이 누락되어 있다. 가령 ‘너희들과’라든가 ‘가족과’라는 표현이 왜 빠졌을까? 너무나 당연해서? 아니면, 더 넓게 ‘이 세상과’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은데, 그렇게 쓰면 너무 교만해 보일까봐서? 두 마음은 아마도 겹쳐져 있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묘비명 세 줄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아주 오래 동안 글귀를 가다듬었다는 느낌을 준다. 정형시처럼 간결한 음률을 통해 의미 병렬 및 대조가 느껴지도록 구성되어 있고, 각 행이 모두 8자이며 각 줄의 띄어쓰기도 두 군데씩이라서 시각적 모양새도 단단한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이 기하학적 시각 효과는 얼마 전 묘소에 세워진 묘비를 보며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 전체적 균형감각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글쓰기가 평소 그랬다.

위 유서는, 가로로 푸른 줄이 간 리포트 용지 같은 종이에 자필로 씌어져 있었다. 또박또박 적힌 그 단정한 글자체는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고, 또 마지막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지극히 맑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분명하게 드리워져 있던 어느 날, 병상에 누워 아버지가 말했었다: “착하게 산 사람은 품위 있게 금방 죽는다는데, 나는 착하게 못 산 모양이다. 이젠 얼른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만 주변에 폐만 끼치고, 마지막 순간이 치사하게 길구나…” 그런 순간에 아버지 입에서 ‘치사하게’라는 어휘가 튀어나온 게, 나로선 아버지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순진함을 엿본 것 같아 야릇했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고 고집해온 아버지에겐,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던 마지막 3개월이 아득히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너무도 오랜 세월을 말없이 지냈던–나이 들어서는 그 말없음 속에서도 뭔가 나눈 게 있었다고 믿지만– 아버지와 생애 최초로 모든 속을 털어 놓고 나눈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나중에 한 술자리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나는 아버지 속을 지독히도 썩여드렸지만, 아버지가 내 속을 썩이신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는 너무도 착하게 사셨고, 아버지가 뜻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으셨어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