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요나’의 붉은 상상 (III)

((앞에서 계속))

VI
김혜순의 시 세계에서, 푸른색은 청색과 녹색을 두루 아우른다. 하늘․바다 등과 연결될 때는 청색의 느낌이, 식물적인 것과 연결될 때는 녹색의 느낌이 당연히 더 강하지만, 그 두 색은 자연이라는 하나의 본류로 통합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푸른색이 이번 시집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푸른색의 중요한 역할은 지난 두 권의 시집에서(더 정확히 말해, 그 전의 <<나의 우파니샤드, 겨울>> 끝부분부터 시작하여), 특히 <<불쌍한 사랑 기계>>에서 이미 수행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푸른색은 “새파란 처녀”[1-77] 같은 관용적 표현이 으레 환기시키듯이 일차적으로 싱싱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생명력이 늘 슬픔과 짝을 이룬다는 게 문제이다.

내 몸속에서 너와 다니던 길들이 터져
검은 피, 흐르기 전에
슬픔의 푸른 상자는 못질해 저 공중에 감춰둔 채 [1-42]

이 시에서, 푸른색이 슬픔과 결부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검은색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덧붙여 우리가 저 앞에서 읽은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라는 시를 상기하자면, 그때 “푸른 종이 상자”에서 “튿어지던” “희디흰 크리넥스”는 검은색―저녁 어둠― 속으로 “날개 없는 새”처럼 가라앉았었다. 두 시를 합쳐 읽자면, 검은색을 피해 감춘 푸른색에서 흰색이 나와 검은색 속에 가라앉는 것이 된다. 푸른색을 감추게 하고 흰색을 가라앉게 하는 검은색은 어디서 오는가? 푸른색은 왜 “슬픔의”라는 수식어를 다는가?
위 인용의 첫 행은 이 모든 것이 과거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검은 피”는 과거에 “너와 다니던 길들이” 덧난 추억의 상처처럼 “터져” 흘러나온다. 그 과거는 필시 관계의 파탄이 오기 전, “저 세월의 바다에 잠긴 내 푸른 사진들 / 푸른 이끼 퍼진 얼굴이 껴안은 푸른 내 애인”이 있던, 젊고 행복했던 “청색시대”[3-14]였을 텐데, 지금은 상처가 되어 있고, 그 “상처받은 사랑”[5-102]이 덧나지 않게 하려면 감추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저기 저 먼 하늘”의 “푸른 고막” 뒤에 “두꺼운 자물쇠로”[1-117] 잠가 두자면, 동시에 ‘나’는 자신을 얼음처럼 얼려야 한다. 이미 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래서 늙은 “백설 어머니” “하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근본적으로 보아서, 슬픔은 그 “백설 어머니”가 “새파란 처녀”를 보는 시선 속에서 산출되는 것 아닐까?

나는 왜 나이 먹어서도 그 새파란 시절로,
그리로 자꾸만 돌아가는지 [2-18]

그렇다, 그 시선은 일찍이, “울트라마린 블루”를 “사색과 슬픔의 빛”이라 부르며 “저 바다는 무서워 저 푸른 하늘은 더욱 무서워요 / (…) / 저 짙푸른 바다는 끓어요 독약처럼 끓어요”[4-116]라고 울부짖었을 때, 요컨대 그 “짙푸른 바다”를 “독약”으로 절감했을 때, 이미 극단적 역설로 나타나 있었다. 검은 어둠 속에서 흰 얼음으로 버티는 ‘나’에겐, “블루의 이 소름끼치는 역류”[3-63]가 차라리 악몽이었던 것이다.

악몽이네, 하늘색 부처를 든 그녀가 벌써
(…)
내 어리신 그녀가
이내 몸에 또 한번 깃드시겠다고 계단을 올라오네 [2-34]

그럼에도, 어느새(라고는 하지만, 이 미묘한 변화의 간격은 김혜순 시의 역사 속에서 6년이나 된다), 그런 자신을 한 발자국 떨어진 듯 바라보는 위 싯구의 어조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다시 그 푸른색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느낌마저 풍긴다. 실제로 나는 “내 피부에 이끼가 돋는가보다”[2-91]―이끼는 푸르다―고 느끼기도 한다.
얼음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밖을 차단하고 밀폐된 자기 속만을 차갑게 응시하던 시선이 문득 하늘을 향하며 “그러나 고개 들어 쳐다보니 아, 푸른 거울!”[3-42] 하고 감탄-한탄하는 순간들을 통해서이다. 생명이 순환하는 자연의 거울에 비추어진 주검 같은 자신을 내던지고 싶은 순간들. 더구나 자연의 거울이 시의 가장 근원적인 원천이기도 하다면, 특히 시인으로서의 ‘나’는 자신이 스스로 몰고 나간 그 모순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구절은 그런 ‘나’의 심적 상황을 모순-결합적으로, 모순-복합적으로 드러낸다.

흑고양이 뮤즈의 눈빛은 유리를 뚫을 만큼 파랗게 얼음
불꽃이었다
새로 산 냉장고 뮤즈도 밤새도록 무서워 떨었다 [3-96, 원문은 고딕체임]

고딕체로 시인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구절의 이 흑고양이는 <사색과 슬픔의 빛, 울트라마린 블루>에서 “어둠 속”의 “도둑고양이”로, “어두운 얼굴에 푸른 빛 별을 두 개씩 매단 그림자”[4-118~119]로 등장했었다. 그때의 그 고양이는 단지 어둠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뛴다 난다 넘는다”[4-119]― 밤의 무법자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밤-어둠이 애당초 억압적인 것이라면, 그 억압을 헤집는 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시란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아마도 그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흑고양이는 뮤즈가 되는 것이리라. “이사 올 때” “버리고 왔(던)” “눈이 파란 / 흑고양이”[3-96]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 실은 그 이전에 이미 “파란 인광을 내뿜는 내가”[4-23]라는 표현을 쓴 적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어둠 속에서 어둠에 물들어 몸은 검어지고 어둠을 견디려는 마음은 흰 얼음이지만, 파란 뮤즈의 눈빛은 그 얼음이 곧 불꽃이게 만든다(“파랗게 얼음 / 불꽃이었다”는 ‘파랗게-얼음’, ‘얼음-불꽃’, ‘파랗게-불꽃이었다’는 삼중의 모순어법을 한 묶음으로 보여주는 교묘한 수사법이다). 그러니, 얼음의 마음으로 시를 쓰게 하는 “냉장고 뮤즈”도 있기는 있으나, 이 파란 눈빛 앞에서야 어찌 벌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 시집에서 시인으로서의 ‘나’는 그 푸른색을 온전히 복원한다. “하느님이” “바다의 목장”에서 “길렀(던)”, “유유히 풀을 뜯으며 잘도 자랐(던)” “바닷소”[1-83]를 먹고서.

이번엔 하는 수없이 내가
그 푸른 소 한 마릴 다 드셨다.
내 몸에 푸른곰팡이가 확 슬고
나는 도통 추위를 못 느끼고 영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1-84]

‘나’는 더 이상 얼지 않는다. 그리고, “어딜가나” “바다가 내 두 귀를 잡은 채 하루 종일 철썩거(린다)”[1-84]. 자연이 내 속에 함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집 전체가 이런 상태로 고스란히 유지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시적 자아로서의 ‘나’에게, 이 힘은 이제 다른 어떤 힘과도 맞설 만큼 강하다.
이처럼 시적 정신을 되살리는 푸른색이 하늘이나 바다 같은 대자연의 청색에 가깝다면, “새파란 처녀”처럼 구체적 실존을 형용하는 푸른색은 상대적으로―그 구별이 선명한 건 아니지만― “일일이 제 몸 저며 낸 나뭇잎들”[1-22]의 그 식물적인 녹색 쪽으로 쏠린다. 간단한 예로, 동물임에도 “연초록 병아리떼”[3-33]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녹색에 친연적인 것들이 이번 시집에서는 붉은색에 훨씬 더 많이 감싸여 있는데, 실은 지난 시집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지난 시집의 종반부에 배치된 <柳花>라는 시에서 동일한 이름을 가진 설화 속의 여자가 “타오르는 능수버들잎”이 될 때, “초록 불꽃” “초록으로 끓는 용광로”[2-138~139]의 이미지가 번질 때, 우리는 이 푸른색이 붉은색으로 진전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불꽃, 용광로 등은 붉은색의 환유체들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청색시대>라는 시에서, 푸른색(“청색시대”)으로부터 붉은색(“장및빛 시대”)으로의 이런 변모 혹은 이동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었다.

피카소는 어떻게 뼛속의 바다를 건너
장밋빛 시대의 암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3-15, 원문은 고딕체임]

문제는 다만, “어떻게”였다. 그런데 대답의 단서도 이미 “고양이 뮤즈”의 눈빛 속에 들어 있었다. 그 “파랗게 얼음 / 불꽃이었(던)” 눈빛. 여기서 얼음을 매개항으로 한 첫 ‘파랗게’와 마지막 ‘불꽃’의 모순적 결합은, <柳花>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론 불이 붉은색과 훨씬 더 가깝기 때문에, 파란색→불꽃→붉은색이라는 상상적 이동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것이다.

VII
김혜순의 시 세계에서, ‘나’가 스스로를 희게 얼리는 동안, 붉은색은 검은색 발아래 밟히며 스러져가는 불과 같았다.

불이 꺼져가는 영혼처럼 헐떡인다. 불이 많이 아픈가보다. (…) 불은 이제 검은 수의의 품속에 혼자 들어갈 거라는 걸 알고 있나 보다. [2-108]

검은색에 갇힌 이때의 붉은색은 그 붉은색이 표상하는 어떤 속성들―단순한 예로 열정 같은 것―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금지시키는, “아니다 아니다 / 붉은 가위표를 치(는)”[4-96] 기호로 작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푸른색과 맞물리며, 붉은색은 순수한 자연과 생명의 색체로 되살아난다. 이번 시집의 붉은색은, 다음 구절들이 보여주듯,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저 푸른 두 개의 거울”[1-98]― 사이에서 태어나는 새벽의 붉은 태양처럼 자연 그 자체로 떠오르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오랫동안 마주 보았을 거야
마주 세워 놓은 두 개의 거울처럼
두 개의 거울 사이로 태초의 비명
첫 태양이 치밀어 오르면 [1-97]

핏덩이로서의 “붉은 아기”[1-60]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흡사 “싱싱한 영양을 퍼 올려”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나무가 푸른 잎의 “초록 비릿내”를 풍기다가 “분홍색 꽃”[3-73]을 피워내는 것, 푸른 나무에서 붉은 꽃이 피는 것과 같은데, 동시에 유념할 점은, 두 색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도는 두 마리 뱀인 양, 그 푸른 나무를 키우는 것이 사람의 붉은 피와도 같은 수액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붉은 물 끌어올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1-85]

이를테면 붉은색이 푸른색을 키우고, 푸른색은 붉은색을 피운다. 이를 ‘나’의 육체적 차원으로 옮기면, 속으로는 붉은 피가 흐르는데 겉으로는 푸르게 보이는 “정맥의 강가에서” 붉은 “열꽃”[1-24]이 피는 것이 된다.
이 순간,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다는 느낌이 물음표를 그린다. 이처럼 붉은색을 끌어올리고 꽃피우는 힘이 느닷없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알코올에 절여진 붉은 나무”[1- 86]라는 표현으로부터 유추하자면, 그것은 술이다. 그렇다면 김혜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 바쿠스로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적어도 이번 시집의 새로운 경지인 붉은 상상에 관한한 그런 것 같다. 그 시들은 그녀가 처음 발견한 “붉은 거울”에 비춰져 나온 것들인데 거기엔 “한 잔의”[1-18]라는 한정어가 붙어 있고, 거기 담긴 것은 술 자체가 이미 붉은 술, “붉은 포도주”[1-17]이다.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라는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쫒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1-18]

이 시는 ‘나’의 고독과 취기가 새로운 ‘너’를 상상해 냈음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취기에서 깨어나면 다시 고독으로 내쫒기더라도, 취기가 ‘너’를 창조한다. 이미 지적했던바, ‘너’는 실체가 아니어서, 창조된 것이 “너라는 이름”뿐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혹, 시인의 언어유희가 만들어낸 “물구나무”라는 나무―물이 거꾸로 치솟는 분수―의 술주정 같은 “주문”[1-86]에 불과하더라도, 그 이름은 언젠가 실체를 부를 수 있다는 꿈의 현현이자 다른 삶으로의 추동력인 것이다.
그 꿈은 지극히 연금술적이다. 상극인 물과 불(알코올)을 한 몸으로 섞은 술이 애당초 연금술의 한 상징물이듯이, 내가 펼치는 꿈은 이제까지 극과 극이었던 ‘너’와 ‘나’를,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원으로 통합해나간다(벌써 <○>이라는 시를 읽었었다). 마주보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태양이 “치밀어” 오르듯이 “마주앉은 두 얼굴 사이에서 붉은 것이 치밀었다”[1-99]는 구절의 허구적 과거시제―부재하는 ‘너’와 같이 있었다고?―는, 저 앞의 <그녀, 요나>에서 보았던 전도된 상상력의 연장선에서, ‘나’의 그 꿈이 얼마나 절실하게 육화되어 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치밀어 오른 “붉은 것”은 뜨거운 피, 불(열), 꽃 등으로 물질화되며 거침없이 치달린다. “몸 내부로만 꽂힌 붉은 전선들” 때문에 ‘나’는 “냄비처럼 끓기 시작(하고)”[1-10~11], “너무 위태로워 오히려 찬란한 / 빨간 피톨의 시간이 터(진다)”[1-9]. 문득 “희망이 썩어버린 네 뒤통수”라며 “마침표”를 찍으려 해도, 마침표를 “움켜쥔” 손은 “뜨거워, 앗 뜨거, 견딜 수 없(고)”, “피를 가득 머금어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내 심장을 더 이상 이렇게 가눌 수는 없어”[1-32]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두개골 위로 붉은 살꽃이” 닭의 “벼슬”처럼 “핀다”[1-71]. 그 심장, 그 두개골이 한사코 바라보는 것은 “얼굴들이 불꽃 속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껴안은 연인들”[1-89]이다.
오로지 사랑의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이 모습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나’는 애초에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때 보다 효과적이다. 예컨대 앞서 1연을 읽었던 <그녀, 요나>의 다음 2연과 3연을 잇자면,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나’)는 ‘당신’에 의해 어떤 그림 속의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가?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1-12]

“찬 물결 시린 몸으로 왔다가 갔다가” 하기에 지친 “그녀”에게, ‘나’는 “붉은 장미 한 다발”을 갖다 주고 싶어 한다. 아니, 더 나아가 ‘나’는 “그녀가 낳은 알뿌리를 옮겨 심고 / 거기에 꽃처럼 맺혀 서 있(는)”[1-51] 상상을 한다. 알뿌리는 재생에의 꿈 자체이고, 꽃은 분명 장미꽃일 터, ‘나’는 푸른 바다에서 다시 태어난 붉은 장미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건 비너스 아닐까? 지난 번 시집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한 은밀한 이미지가 이런 추측을 뒷받침 한다.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 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 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 올린다 [2-12]

시적 묘사와 도상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는 능히 이 이미지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겹쳐 놓을 수 있다. 불그스레한 꽃송이들―장미는 아니지만―이 난분분한 초록색 바다를 배경 삼아, 바닷가 짙푸른 나무 아래, 불길 같은 붉은 머릿결을 흩날리며 바닷속 이불인 조개껍질 위로 몸을 솟구쳐 올리는, 곧 붉은 가운을 입을 찰나에 있는 알몸의 비너스! 왼편 아래쪽을 비껴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혹시 그림을 완성하고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는 보티첼리를 마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시 속의 ‘나’가 그토록 애절하게 자신을 그리는 ‘당신’을 보고 싶어 했었듯이…
절대적이고 열정적인 에로스의 화신인 비너스가 ‘나’의 재생의 모델이었다면, 붉은색 혼자만의 상상적 드라마가 끝없이 타오르고 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 열정에는 사랑 그 이외의 군더더기가 필요 없으니까, 그 움직임은 불 보듯 선명하고 직선적인 것이다. 나는 오로지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솔직히, 우리는 이 단순하면서도 도저한 상상이야말로 이번 시집의 가장 황홀한 경지로 느낀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고 여기에 이르는 동안에도 충분히 확인되었듯이, 그렇게 상상하는 ‘나’만이 이 시집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상상하는 ‘나’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나’들이 무수히 포개져 있는 것이다. 다시 그러나(라는 반접으로 한 번 더 뒤집건대), 그 다른 착잡한 시선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헤치고 피어났기 때문에, 이 상상은 더욱 아름다운 꽃이 아니겠는가.

VIII
‘나’의 붉은 상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에필로그로 삼자면, 그 근본은 역시 상상과 현실의 다면적 관계일 것이다. 이 관점은 틈틈이 짚고 넘어온 그대로, ‘나’의 사랑을 완성시켜줄 ‘너’가 실제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부재자”이며 결국 ‘나’는 “부재자의 인질”[1-17]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나’와 ‘너’의 현실적 관계는 “우리의 침대는 서로 다른 대륙에 놓여”[1-37]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붉은 이슬 한 방울”의 방, “나 혼자 너를 사랑하는 방”[1-78]에서 그 모든 것을 상상하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이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현실로 충족될 수 있을까? 더구나 스스로 완벽한 비너스를 꿈꾸는 ‘나’가, ‘너’ 역시 “네 살갗 밑”이 온통 “장미 꽃다발”[1-9]이기를 바란다면, 이 만남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과연, “애타고 애타는 몸짓이 있었을 뿐”[1-26]이라고 느끼는 순간, ‘너’는 무한한 상상의 대상일 뿐이므로 “무한해져서 오히려 사라져 간다”[1-33]고 느끼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나는 오랜 기다림에 화상 입은 몸”[1-117]이라고 느끼는 순간, 끓는 “내 몸에서 내가 쉭쉭 빠져 나간다 / 물이 졸아 붙는다”[1-11]고 느끼는 순간, 상상의 “파도치기 지쳤어요”[1-35]라고 말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마음에 구름이 끼면―그래도 “붉은 구름”[1-42]이긴 하다―, ‘너’도 지우고 ‘나’ 스스로도 사라지고 싶어진다.

이제, 마셔버린 물처럼 그렇게
너를 지워버릴래
(…)
온전히 만나지도 못했던
그 안타까움의 절정에서 그만 사라져버릴래
(…)
너무 가벼워 숨 막힌 그 노래
누군가 채록해가기 전에, 그만
이제 그만 이 몸의 붉은 벼랑에서 뛰어 내릴래
노을이 지기 전에 [1-42~43]

이 시에서 ‘나’는, 상상은 충만해 있으나 그것이 동시에 현실적 결핍임으로 인한 “안타까움의 절정”인 어떤 순간을, “붉은 벼랑”의 끝인 순간을, “단번에 죽기 좋은 순간”[1-85]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노을이 지기 전에”라는 단서를 통해, 자신의 붉은 상상이 일출에서 일몰로 시간의 원을 그리는 자연적 순환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런즉, 이 상상력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에로스의 절대적 원형으로 신격화된 비너스는 불멸이지만, 비너스를 꿈꾸는 인간은 아무리 꿈을 꿔도 그렇게 될 수 없다. 인간은 필사의 육체적 존재이므로.
나아가 이 상상은 여성적이다. 위와 같은 자각은 밤에 떠서 밤에 지는 달을 통해 ‘나’가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의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바이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