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요나’의 붉은 상상 (II)

((앞에서 계속))

III
이번 <<한 잔의 붉은 거울>>에서, 다른 모든 색들을 빨아먹고 뒤덮고 가두던 검정색이 극도로 축소되고 있는 현상은 붉은색의 확대에 반비례하여 나타나는 너무도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다. 지난 시집들에서 검정색의 지배력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다시 읽으면 <<불쌍한 사랑 기계>>부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며 천천히 농도가 희석되어 오긴 했으나, 바로 앞 시집에서도 검정 혹은 어둠은 여전히 기세등등했었다.

어둠은 너무 깊고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
깊은 바닥 어디에 발을 놓아야 할지
검은 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버렸네
(…)
이 밤은 대낮과 내통한 나를 용서 않나봐 [2-115]

낮-빛과 내통한 나를 감시하고 감금하고 억압하던 밤-어둠의 오랜 폭정 체제는, 그런데 이번 시집에 이르러 붕괴된다. 그렇다면 ‘나’는 드디어 해방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억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억압의 주체와 형태가 바뀌었달까. 이제부터 이 밤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그 까만 아저씨들 다 어디에 갔을까”[1-124]라고 자문할 때의 그 어둠의 하수인들이 아니라, “환한 광자”라는 빛의 하수인으로 “태양 나라에서” “파견 나온” “홍위병”[1-123]이다.

그 모든 내가 밤이면 밤마다 단체로
학교로 자술서 쓰러 간다
光子에게 검열 받으러 간다 [1-125]

<내 꿈속의 문화혁명>이란 제목에 의하면 바야흐로 무슨 “문화혁명”인가가 일어났고, 빛의 홍위병인 광자는 “반동”[1-123]으로 몰린 ‘나’의 밤을 환히 밝히며 잠도 재우지 않고 자아비판을 강요한다. 이 빛은 칠흑의 어둠 속에 밀폐된 자아의 악몽을 투사하던 영사기의 한 줄기 빛과는 근본이 다르다. 이 빛은 잠 속의 어둠마저 송두리째 몰아내고 그 자리를 혁명적인 공공의 문화를 학습하는 “학교”로 만드는, 새로운 지배자․억압자로서의 빛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시인의 새로운 자의식이 극단화되면서 만들어졌을 이 상황이 시집 전체의 상상적 서사를 구성하는 것에 맞물려있는 한, 대답은 유예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극단적 반전을 직조한 상상 기계의 새로운 작동 원리는 포착된다. 위의 시에서는 유독 부정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지만(위의 시에서 유독 그렇다는 지적에 밑줄을 그어둘 필요가 있다), 일단 그런 가치 판단도 괄호 속에 묶고 이미지를 구성하는 상상 방법만을 읽자면, 김혜순 시의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진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光子’는 일차적으로 빛의 입자라는 뜻을 지닌 일반명사이다. 그 빛의 입자들이 지금 밤을 장악하고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전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자연스럽기로 하자면, 오히려 밤은 어둠이어야 한다. 시인을 그토록 괴롭히던 캄캄한 밤이 환한 밤이라는 혁명적 사태보다 훨씬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무엇보다 주목하는 바는, 시인을 너무도 오랫동안 자연스럽게―‘오랫동안’는 ‘자연스럽게’와 통한다― 괴롭혀온 낮-빛/밤-어둠의 이분법적 상응․대립을 넘어서, 불현듯 밤-빛이라는 모순적 결합의 양태가 전경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제 이 현상은, 김혜순 시에 정통한 독자들은 벌써 짐작했겠지만, 늘 동일한 이항대립으로 맞물려온 남성/여성의 문제로 고스란히 넘어간다.
‘光子’는 빛의 자식 또는 빛나는 자식이란 뜻을 지닌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그 청각적 울림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약간 천시하는 느낌을 부여한, 남자였기를 바라는 느낌이 붙여진―아들 ‘자’ 자가 붙여진― 여자의 이름(영자, 춘자, 말자…)으로 들린다. 그러나 막상 그런 식으로 ‘광자’에게 성적 정체성을 부여하려들면 사태가 꽤 모호해진다. 화자가 “내 애인 광자는 (…) 애인도 많다”[1-123]고 할 때는 오히려 남성인 것 같다가(‘나’는 여성이니까), “교미가 끝나고 애인을 잡아먹는다”[1-123]고 할 때는 다시 여성인 것 같기도 하다(동물의 세계에선 암컷이 그러니까). 후자의 경우엔, 여성이라 하더라도 상대를 잡아먹는다는 살육적 공격성은 상상력의 차원에서 남성적이다(김혜순 식의 예: “아들의 살을 발라먹고 살아남은 아버지들”[1-95]). 아무튼 이런 현상 역시, 김혜순 시의 근간이었던 남/여의 뚜렷한 분리와 갈등이, 남/여이면서 남-여이기도 한 혼성적 양립의 문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양상이 위의 시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필경 그 변화가 홍위병 식으로 극단화되는 데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바랐던 어떤 변화가 정치화(?)되자 어느새 ‘나’는 “반동”으로 몰려 있는 야릇한 사태. 실제로 이 모든 변화가 ‘나’의 내부에서부터 싹텄음은 위의 시 바로 앞자리에 놓인 <눈보라>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선, “아무리 불을 꺼도 불이 꺼지지 않는 이렇게 환한 밤”이 “나 너무 뜨거운가 봐”[1-121~122]라는 자기 진단의 결과로 제시된다. 그러니까 저 부정적 분위기 이면엔 때로는 매우 긍정적이기 조차 한 ‘나’ 자신의 어떤 뜨거운 욕망이 등을 대고 있는바, 그 근원적 뿌리는 새롭게 눈을 뜨고 싶다는 욕망, 특히 ‘나’의 어둠과 악몽을 벗어나 ‘너’를 다르게 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눈을 뜰래 [1-9]

이렇게 떠진 눈은 ‘~할래’ ‘~않을래’ 하는 식으로 반복되는 종결어미를 통해 능동적 의지를 표출한다. 그 의지의 밑바탕에는 이미 나/너의 적대적 대결이 없다. 과거에도 드물게 존재했던 희원형의 시편들이 있었으나, ‘너’는 주로 ‘나’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일방적으로 침범해 들어와 ‘나’를 짓밟던 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 스스로가 “내 밖”으로 나가 “네 안”[1-9]으로 들어간다…
점점 더 그런 욕망에 시달리는 ‘나’는 “잠자기는 글렀으니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1-10]며 환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진다. 때로 그 의지가 허해지면, 가끔씩은 이전의 그 “악몽이 배달 온다”[1-49]. 그러나 이번엔 내 몸이 그 악몽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 ‘나’의 몸은 어느새 악몽을 제대로 틀지 못하는 “고장난 영사기”[1-104]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네버 엔딩 스토리의 필름들”을 두고 “그건 이미 너와 내가 다 봐버린 것들, 이미 다 살아버린 것들”[1-103]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악몽들의 구속력과 충격력도 거의 약화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시는 벌써 기존의 악몽을 뒤집어엎은 다른 꿈을 다른 영사기―다른 몸의 감각―로 찍기 시작한다. 밤에도 잠 못 이루는 ‘뜬 눈’의 욕망이 그려내는 꿈, 상황이 역전되어 “밤이 와야만 네게로 갈 수 있다(고)”[1-38] 상상하는 꿈을.
어쨌거나, 이 새로운 욕망 앞에서 그 광폭하던 어둠은 어느새 “팔딱거리는 어둠”[1-25] 정도로 전락하고, 오랫동안 어둠덩어리였던 ‘나’는 그 어둠을 “몸속에서 꺼내”[1-22] 잠재우려 한다.

잘 자라 검은 이파리들아
내 비명으로 자라는 내 검은 물결, 그림자들아 [1-22]

이후, 검은색이 부여해온 부정적 이미지의 굴레도 상당 부분 풀려나갈 것이다. 예컨대, 이 시집에서 ‘나’를 “마주 바라보(는)” “네 두 개의 검은 거울”[1-99]은 단지 ‘너’의 눈-심연일 뿐, ‘너’의 부정적 속성을 알리는 지표가 더 이상 아니다. ‘나’의 눈동자와 똑같은 ‘너’의 눈동자, 그것은 동등한 위치에 선 타인이라는 거울, 여성을 비춰 주는 남성이라는 거울, “너라는 이름의 거울”[1-18]인 것이다.
다음 색깔로 옮겨가기 전에 덧붙여두겠다, 그 “너라는 이름의 거울”은 곧 “붉은 거울”[1-18]로 넘어가리라는 것을. 마주보는 두 검은 눈-거울이 보다 관능적인 관계로 발전할 때, 둘 사이에서는 “붉은 것이 치밀(기)”[1-99] 때문이다. 마치 어둠을 “진간장처럼 / 달이고 달이면 /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붉은”[1-28] 입술이 떠오르듯이. 이때까지의 붉은색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1-118] 갔었지만, 놀랍게도 지금부터는 검은색 밑바닥으로부터 붉은색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IV
김혜순 시의 역사 속에서 이번 시집의 붉은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동안 푸른색과 붉은색을 대신해 검은색을 오래 견뎌온 흰색을 거쳐야한다. 어찌 보면 모든 색이 탈색된 인고의 색과도 같은 흰색은 검은색의 대척점이되, 그렇다고 어둠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빛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 색은 모두 나의 육체를 매개로 고체화되지만, 애초의 검은색은 기체에 실려 오고 애초의 흰색은 액체에 실려 나간다. 실려 오는 검은색이 외부적 상황이라면, 실려 나가는 흰색은 그 검은 상황에 맞서는 내면적 반응이다. 검은색에 함몰되면 “검게 썩어서 아스팔트에 문드러진” “여자”[1-67]가 되고, 검은색을 이겨내면 “순결한” “얼음 공주”[1-20]―이는 지난 시집의 “눈사람”[2-10]과 같다―가 된다.
김혜순의 시 세계에서 흰색이 제시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물질적 결정체는 눈이다. 한마디로 하자니 그냥 눈이지, 기실 하늘에서 처음 내려오는 눈에서부터 눈을 뭉쳐 만든 눈사람에 이르기까지, 눈의 내력은 몹시도 길고 굴곡진 여정을 그린다. 한데, 그 여정이 한 바퀴 순환의 원을 그린 것일까, 신기한 것은, 이번 시집에서,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 와요 [1-13]

하면서 내리는 그리움의 눈은, 김혜순 시의 출발점에서 내리던 바로 그 눈과 꽤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차이도 있다. 첫 시집인 <<또 다른 별에서>>(1981)의 <기다림>이란 시에서는, 그 그리움이 상대에 의해 팽개쳐지고 “기다리던” “그 사람이 멀어진다”[8-60]고 마무리됨으로써, 밤을 배경으로 내리는 그리움의 눈은 비극적 드라마의 예고했었다. 간절한 기다림은 한편으론 <<우리들의 음화>>(1990)에 이르도록 계속되지만(이 시집에도 <기다림>이라는 동일 제목의 시가 있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에선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적’이 되어 ‘대결’하고 ‘복수’하는, “욕설과 증오가 반죽이 된” “시궁창 같은 사연”[7-18~19]이 이어지며 돌이키기 힘든 관계의 파탄을 쌓아간다. 그때 내리는 눈, 그리움 다음 단계의 눈은 관계를 가르고 단절시키는 폭설이다.

그 다음 폭설이 우리와 우리 사이에
금을 그었다 [7-56]

이 지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항은, 그리움의 눈이건 단절의 눈이건, 눈이란 것은 영하의 한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눈은 얼어붙은 비다. 그리고 비는, 눈물에 사로잡힌 ‘나’를 “비나무”[2-134]라고 하는 예처럼, 흔히 눈물의 등가물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눈보다 먼저 비-눈물이 있었다. “우리 몸 중 물 4 분의 3 이상 / 그것 전부 슬픔”[5-48]이라는 말은 ‘나’의 몸이 눈물덩어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한동안 ‘나’는 눈물의 “십년 장마에 / 반쯤 녹아 / 키가 줄어든”[5-11] 심리적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래 그래 다 녹자”[5-11]라는 자포자기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런 눈물은 곧 자기 소멸의 첩경이기도 하다.

하늘나라엔 레인 피플이 사는데요
그들은 너무 울고 울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게 된대요 [4-128]

눈물로 허물어진 나는 지하의 “검은 강”[2-105]으로 빨려들고, “추운 밤” 같은 “깊은 바다”[1-128]로 흘러가 파묻혀 죽음에 이르리라. 그걸 막으려면 ‘나’의 눈물을 흐르지 못하도록 얼려야 한다. “눈물마저 얼어붙도록”[1-106] 만드는 자기응시의 “싸늘한 눈길”[1-14]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그리움으로 내리는 눈마저도, 그리움은 어쩔 수 없되 그리움으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자포자기에서 자기보존으로 넘어서는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빙점의 한기, 마음의 독기가 스며 있는 셈이다(<다시, 불쌍한 사랑 기계>의 “자기 보존 프로그램”[2-137]이란 표현이 생각난다).
그로부터 흰색은 갈수록 더욱 독하게 얼어붙는 마음의 색으로 수렴되어 왔다. 비 대신 눈이 내리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내린 눈이 그냥 쌓였다 녹으면 흙탕물이 될 테니까, 나를 보존하려면 눈 그대로 얼어붙어야 한다. 얼음이 되어야 한다. 이 자기 동결은, 안으로는 욕망을 식히고 밖으로는 관계를 끊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일단, 그리고 거의(끝내 완전치는 못하다는 단서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완성되는 듯이 보였다. 밖을 차단하는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은 “모두 흰 눈뿐”이어서 “흡사 냉장고 속 같(고)”, ‘나’는 “일시에 몸에서 열이 다 달아(난다)”[4-41]. 그리고 “누군가 내게 얼음 조끼를 입혀 놓은 것” 같이 몸이 “얼어붙(는다)”[4-42]. 그렇게 얼어붙은 ‘나’는 차후 “얼음 아씨”[2-10], “얼음 공주”[1-20]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사태는 다시 반전된다. “얼음 공주”인 ‘나’를 돌아보는 시선은 “얼음 나라 얼음 공주 얼마나 순결한가”[1-20]라는 읊조림을 자조적으로 내뱉는다. 무슨 까닭일까?

나보다 먼저 내 발이 너에게로 가려고 하는 것,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 내가 이렇게 참고 있었던 건 내가 내 소유의 냉장고를 갖게 된 후부터인 것도 같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생각해 왔다. 내 머릿속은 얼음으로 꽉 차 있고, 내 발을 만진 사람은 모두 기절한다. 내 가슴속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입술이 얼어붙는다. 그러니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자. 아무에게도 손 뻗지 말자. [1-20]

처음엔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얼렸던 것인데, 이젠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다가가선 안 된다. 얼음이 된 내가 그 사람마저 얼려버리니까. 그렇다면 이 얼어붙은 “눈사람”으로서의 삶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회의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홀로 고립해 지내며 “조난자”나 죽음으로 인도하는 “히말라야 산맥 속 백설 어머니”[2-69]의 삶, “하얀 할머니”[1-61]의 늙은 삶, “가도 가도 희디흰 백지의 삶”[1-61], “희디흰 내 뼈들”[1-126]만으로 부지하려는 삶, 생명을 생명답게 느낄 수 없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쯤 되면 “견딘다는 게 병드는 거”[2-91]란 소리가 나올 만 하다.
더구나, 이 냉혹성―냉장성?―과 부동성은 끔찍하게도 ‘나’를 지켜내려던 적으로서의 ‘너’, 여성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던 부정적인 남성상과 어느새 닮아 있다. “빙산처럼 가만히 떠”[2-48] 있는 ‘나’는 “내 앞에 내 묘비처럼” “섬보다 더 크게 나를 내리누르는 큰 / 돌”[6-38]로 서 있는 ‘너’와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여자 시인인 나”[4-49]는, 처음 얼음 덩어리가 되어가던 그 무렵에 이미, 이렇게 자탄한 적이 있었다.

나 아버지가 되기 싫어 큰 소리로 말해도
(…)
강철 커튼 아버지 검정 잉크 아버지 기계 심장 아버지
칼날 같이 갈아진 양손을 모두어야
비로소 제 가슴이 찔러지는 그런 아버지
얘야, 나는 그런 망측한 아버지가 되었구나 [4-50]

아, 이제야 짐작이 간다, 김혜순의 가장 뛰어난 시편들 중의 하나인 <백마>에서 그 말이 왜 까만 말이 아니고 “희디흰 말”[3-19]이었던가를. “방안을 꽉 채워”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 만들던 백마, “몸속으로 들어온 백마를 토하려” “농약”을 먹어도 “나가지 않는”[3-19] 백마의 그 요지부동은 돌덩어리, 얼음 덩어리(빙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 그리고 또 알 것 같다, 애당초 절대 어둠이나 절대 밝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의 존재방식이나 농도는 맞물려 있는 상대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예전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선생님, 낮에는 왜 별이 안 보이지요 / 여기가 너무 밝아서 그러지요 / 선생님 낮에 별이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 어둡겠지요”[4-28]. <백마>라는 시를 다시 언급하자면, 흰색이 요지부동화되면 그에 대비되는 검은색―그리고 그 어둠 속의 악몽―도 극단화된다. 따라서 이렇게 볼 수도 있다, 흰색은 검은색의 요리사라고: “흰 옷 입은 요리사들”[1-100]이 “하늘 가득 펼(쳐진)” “검은 날개를” “밤새도록” “구웠다”[1-101]. 물론 역으로 검은색은 흰색의 요리사라는 명제도 성립할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과정에서 오는 회한 때문이었을까, ‘나’는 “냉동실의 얼음이 아무도 모르게 증발하듯, 그렇게 /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2-48]. 그럼에도 지난 시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나’는 “땡볕” 속에서조차 녹지 않고 “눈사람으로 서 있었(다)”[2-10]. 속으로야 어쨌든 겉보기엔 그처럼 “굳센 얼음”이었는데, 그런데 이번 시집 초반부의 <얼음의 알몸>에서, ‘나’는 다시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되어 녹아내린다.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 먹어본 적 있느냐
그 굳센 얼음이 녹는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1-15]

이렇게 회한을 씹으며 “다 녹아서 흘러가 버린”[1-15] 곳은 어디일까? 결국 바다일까? 이번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나’가 “찬 물 속의 찬 물처럼 나 흐느끼는데”[1-128]라는 지경인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원래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2-151]인 ‘나’는 “너에게로 한없이 흐르고 싶은 이 물이 / 하늘하고 수평으로 나란히 눕고 싶은 이 물이”[2-99] 되고 싶다는, 수평적으로 흐르는 물의 삶을 소망했었으나, ‘너’와의 파탄과 무모한 자기 동결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 수직적으로 하강하는 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바다는 이때까지의 실패한 삶을 묻는 상징적 죽음의 자리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바다는 죽음의 자리인 동시에 재생의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그렇게 바다에 흘러들어 일단 죽는 ‘나’는 요나처럼 재생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녀, 요나>라는 시를 보면, 그 이상이다.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1-12]

다시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태어난 후의 사랑과 사랑의 열매―아기―까지 상상적으로 선취하고 있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그 사랑의 관계 자체이다. 얼마나 절실하냐 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가고 있는 존재부터가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자꾸만 자꾸만” “보고 싶은” “당신”[1-12]일 정도이다. 보지도 못했는데 보고 싶다니! 새로운 ‘나’로 태어나서 새로운 ‘너’를 만나는 게 아니라, 보지도 못한 새로운 ‘너’가 새로운 ‘나’를 그려 태어나게 한다니! 여기서,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 보지 못한 그 여자”―또 다른 ‘나’―를 “구해주는 상상을”[1-51] 하는 이 재생-구원의 상상력은 ‘나’를 죽음-파멸의 상상력으로 이끌었던 것이 관계의 파탄이었다는 뼈저린 자각을 완벽하게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