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매트릭스」를 거창하게 논하지 말라

요즘, 영화 <매트릭스>가 화려하게 ‘뜨고’ 있는 모양이다. 내 주변에도 그게 괜찮은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신문에선 문화론과 철학의 시각으로 이 영화에 접근하는 책이 두 권이나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심지어 <<교수신문>>에마저 “<매트릭스>로 강의를 하려면” 운운하는 기사가 실리는 걸 보고 아연해진 나는, 이 여름에 개봉된 제2편을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또 놓친 후(이 게으름!), 어느 날 제1편 비디오를 빌려와 다시 보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별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매트릭스>가 재미있는 오락영화라는 데, 나는 얼마든지 동의한다. 두 번을 되풀이 봐도 신기한 영상적 착상들이 거듭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이 영상적 재미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판단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조금 화가 나기까지 한다. 우선은 이 영화가 인문학적 사유를 단순한 포장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지식인들이 이런 영화에 기대어 자신을 팔아먹으려는 점에 대해.
도처에서 갖가지 심각을 떠는 언술들이 거의 설교조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에 인문학적 색체를 입히려 애쓴 게 분명히 느껴진다. 소크라테스에서 불교나 장자까지 온갖 종교적·철학적 잠언들을 동원하고, 성서를 큰 바탕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잠자는 미녀 에피소드까지 온갖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장치들을 짬뽕처럼 섞어 놓은 후, 그런 면모를 일부러 드러냄으로써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그걸 통해 도대체 어떤 효과를 창출하고 어떤 결과에 이르렀느냐는 것이다.
먼저 영화를 분절시켜 보면, 각 세부 국면들에서 위와 같은 언술들과 실제 행위를 그리는 영상 이미지들의 결합은 아주 단순하다. 가령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가”라는 투의 말을 던지고 나서는, 구별할 수 없는 가상 시뮬레이션 속의 모습과 현실 속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때로는 그 역의 방식을 취한다. 초능력자 소년이 숟가락을 휘고 나서는, “숟가락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도사 같은 언술이 덧붙여진다.
세부 국면들의 진행은 거의 시종일관 그런 식으로, 명제적 언술과 그 증명으로서의 영상 이미지를 1:1로 대응시킨다. 물론 그 단조로움을 감추는 온갖 요란한 활극 장면들이 오히려 더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오갈 데 없는 오락영화다), 아무튼 그런 방법은 예의 언술들―이 영화의 메시지들(?)―을 물신화시켜 그대로 주입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소지가 있다. 디지털로 조작된 기막힌 환영의 세계에 빠진 관객들로선 즉각적으로 그 둘을 하나의 전체로, ‘진실’로 받아들이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책을 되풀이 읽듯이 두 번 세 번 반복해 보면서 점점 객관적 거리를 취하게 되는 관객에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저 언술과 저 영상 사이의 결합은 정말 필연적이고 정당한가? 나아가, 관객의 상상력을 박탈하고 저렇게 영상을 일의적인 언술에 고스란히 종속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우릴 움직이는 건 질문”이라는 이 영화 속의 언술을 이 영화에 되돌려 적용하자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할 공간을 박탈하는 게 아닐까? 이 영화가 내세우는 명제적 ‘자유’를 이 영화 자체는 배신하는 게 아닐까?
마치 그런 의문에 대한 대비인 듯, 그 세부들을 통합하는 구성적 차원에서, 이 영화는 이제, 어떤 ‘절대적 진리’를 지향하는 거대담론들을 끌어들인다. 실은 이 역시 너무 뻔해서 언급한다는 게 민망스럽기조차 한데, 그걸 무릅쓰고 적자면, 이 영화의 종합적 구성 방식에 대해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차원을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이야기의 맨 밑바탕에는 아주 전통적이며 전형적인 입문 혹은 입사(initiation) 구조가 깔린다. 둘째, 그 위에는 기독교 성서의 메시아사상이 덧씌워진다. 셋째, 그것들을 기반으로 표층에서는 공상적 미래사회의 통제 체제가 구체적 문제로 제시된다.
미국식 영화답게 특이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그 영웅화를 강화시키는 입문 구조의 도식을 교과서처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떠남, 안내자의 만남, 새로운 깨달음을 위한 고행 혹은 단련의 길, 이때까지의 나의 죽음, 새로운 나로서 거듭나기… 인류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밑받치고 있는 이 보편적 얼개는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나 당연히 예수의 행로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건 거의 ‘영원한 진리’와도 같으니 얼마든지 공상과학적 미래를 꿰뚫는 장치로도 가능하리라.
실은 여기에 처음부터 모순이 숨어 있긴 한데(1999년으로 착각되는 상황과 2199년이라는 실제 상황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를 설정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냥 단순화하자면, 그렇게 들이 내미는 카드들의 거창함에 비해, 그 실제 전개 양상이나 마지막으로 남는 알맹이는 너무 초라하고 황당하다. 주인공 네오의 수행은 생존을 위한 전투 기술을 컴퓨터로 머리 속에 직접 입력시킨 후 그걸 가상공간 속에서 연습해보는 것이고, 그가 마지막에 죽었다가 살아나서 보여주는 것은 총알을 피하거나 멈춰 세우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을 파괴하는 초능력뿐이다. 그게 전부인 것이다.
이게 현재와는 전혀 다른 공상과학적 미래 상황을 전제로 한 이야기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그걸 백 번 천 번 전제하더라도, 게다가 그가 특별히 선택받은 ‘유일자(the One)’라 전제하더라도, 다른 어디에선가도 너무 많이 들었던 영화 대사들처럼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을 열어” “생각하지 말고 인식해서” “나 자신을 알고”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면” 고작 그런 초능력자가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전부가 아닌가! 되돌아보자니, 저 거창한 언술과 유치한 행동 체계 사이에 이 무슨 우스꽝스런 불균형, 이 무슨 허황됨이란 말인가!
그 초능력이란 건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네오(Neo)라는 이름이 유일자(One)의 철자 바꾸기에서 나온 ‘상징’이라면서, 나이 어린 누군가가 순진하게 그런 소릴 했었다. 하지만 상징이란 건 그런 게 아니다. 네오든 에온이든 그가 유일자라는 건 이미 규정되어 있고, 규정되어 고착되어 있는 건 상징이 아니다. 상징은 미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 미지는 해석의 무한성과 초월성, 해석의 자유로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된 단순 기호들에 불과하다. 네오의 초능력 역시 그저 초능력일 뿐, 그 안에 그 흔한 구원의 희망이나 초월의 가능성조차도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의 아이러니는, 세부에서는 억지스러우나마 1:1로 대응 양상을 띠었던 언술과 행위의 결합(이 자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미리 말했다)이 통합적 차원에서는 180도 어긋나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머리는 사이비 철학으로, 몸통은 기계적 무술로 따로 노는 기형체와 같다. 한 ‘작품’으로서의 파탄은 그렇게 엿보여진다. 나로선 더 이상,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 따져볼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 애당초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계속 뭐 하러 굳이 이런 이야길 해야 하나 싶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결국 쓴 이유의 하나는 이 영화가 쓸데없이 심각한 척 인문학적 담론을 함부로 끌어들이는 데서 오는 해악을 우려했던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영화를 두고 지식인들마저 어설프게 편승하려 드는 현상의 서글픔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사태는 우리가 처한 가치의 혼란과 무지, 문화적 빈곤 상황을 웅변한다.
영화든 문학이든, 예술을 위한 작품이든 통속오락용 작품이든, 어떤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의 기본 구조나 기호(혹은 상징) 체계는 동일하게 깔려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출발점, 뼈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과제는 그 다음, 그런 얼개가 어떻게 생생한 살(영상이나 언어)과 더불어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추적하며 그 의미를 가려내는 것이지, <매트릭스>처럼 뻔히 보라고 드러내놓은 주입식 구조나 답들을 대단한 의미인양 떠들어대는 게 아니다.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고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매트릭스>는 가령 <토탈 리콜>이나 <터미네이터>에도 훨씬 못 미치는 영화다. 그것들도 역시 기본적으로 오락용이긴 해도, 아무런 거창한 설교 없이 삶을 한번쯤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측면을 내재한 영화들이다. 비록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상상력 위에 서 있다 하더라도, 보고 나면 가상과 현실의 관계나 실존적 시간들의 관계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매트릭스>는 멋진 말들은 다 인용하면서도 그 말들을 왜곡하고 타락시키기까지 한다. 그런 뜻에서, 이 영화는 아주 교활하게 질 나쁜 영화일 수마저 있다. 보고나서 히히 웃으며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말이다.
혹시 <매트릭스>의 문화적 유용성이 있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기술적 차원에서 성취한 디지털 영상 효과가 앞으로 우리의 다른 상상력에 어떤 자극을 줄 수도 있다는 정도에서일 것이다. 한편으론, 다른 공상과학 영화나 판타지 영화나 무협 영화 등과 더불어, 이 시대 대중의 취향 내지는 집단 무의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지난 20-30년간 수많은 오락영화들은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구조를 되풀이 취하고 있다. 요컨대, 이야기의 ‘입문’ 구조에 인물의 이중성을 전제로 평범한 ‘나’가 초능력을 지닌 ‘나’로 변신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내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나마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영상 한 장면과 대사 한 구절이 있다.
그 영상은, 네오가 인공지능의 기계류에 의해 길러져 태어나는 장면. 온몸에 금속관들이 숭숭 꽂힌 그는 인간이되 이미 반(半) 기계적인 육체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데, 녹물 같은 오물과 함께 하수구 같은 곳으로 쏟아져 내리던 장면은 아무튼 내 악몽처럼 끔찍했고, 그 탄생 자체의 끔찍함으로 나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 대사 한 구절이란, “인간은 포유류 동물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가깝다”는 말. 인간의 생태에 대한 예리한 담론으로, 이 영화에서 그 이야기 진행의 관련성과는 상관없이 거의 유일하게 살만한 한 마디였다. 그런데 이것도 혹시 어디선가 빌려온 말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