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의 「달로」에 대한 단속적 독후감

나는 힘이 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의 야만이 이젠 논리의 가면조차 쓰지 않고 다시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 포격에 두 팔을 잃고 한꺼번에 오십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허무의 동안(童顔) 앞에서, 나는 그저 망연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볼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더러운 전쟁의 억지 이야기들이 거창하게 만들어지는 이 세상 속에 사는 게 지겹다. 어디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을까? 갓 스물을 넘긴 젊은 소설가의 작품 속에서는 혹시 한 가닥이나마 그 의미의 싹이 피어나고 있을까? 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읽었던, 그런데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자꾸 뒤적여온 한유주의 <달로>(<<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라는 소설을 다시 펴본다…
I
단 한편의 짤막한 소설을 놓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한유주는 체질적으로 ‘이야기’에서 자유로운 것 같다. 그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편의 소설을 썼다. 이때, ‘체질적으로’나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은 일종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이야기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체질이나 자연,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가는 어린 혹은 젊은 날의 어떤 결정적 계기를 통해 그 체질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지 모르겠다.
여담을 적자면, 이 소설을 되풀이 읽다가, 나는 혹시 작가의 남자 친구나 가까운 누군가가 자살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 치명적 순간부터 행위가 생성되는 시간-이야기가 멈춘 건 아닐까, 막연히 상상했었다(작가를 만나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사실로서가 아니라 상상으로라도 그와 유사한 어떤 체험의 순간이 이 작가 속에 깊은 심연을 파놓은 듯하다.
아무튼 이 점이, 이야기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다른 작가들과의 일차적 차이점을 만든다. 가령 나는 끊임없이 내 앞을 가로막는 이야기들과 싸운다. 싸우면서 지우고 가라앉힌다. 그러나 한유주는 ‘이미’ 이야기를 벗어나 있다. 이야기를 ‘비껴’ 나아가는 방법을 일찌감치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가까운 선배 작가로는 배수아가 비교적 이야기를 잘 비켜서는데, 배수아가 이야기 없음의 무중력(?) 상태를 감당하기 버거운 듯 자주 잠언 투의 글들로 무게 중심을 잡으려 하는 데 반해, 이 작가는 그런 무중력도 그리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정희를 자기 식으로 소화해 낸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전해주기를, 이 작가로부터 오정희를 열심히 읽었었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정희를 정말 잘 읽어냈다. 우선 오정희 티가 전혀 안 난다는 면에서 그렇고, 그러면서도 오정희의 언어에 대한 고도의 의식과 집중력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성과가 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다.

II
“… 이야기를 알고 있다” “…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 …” “먼 옛날의 이야기로…” 같은 표현들의 빈번한 개입은 거꾸로 이야기 비판에 기여한다. 한유주는 신인답지 않게 이야기와 자기 식의 소설쓰기에 대한 투철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 작가는 “지겨운 이야기들, 처음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이야기들과 빛바랜 수사와 다닥다닥 붙은 행간들”[354]을 거부한다. 그리고 “사슬처럼, 영화의 장면들처럼, 소설의 페이지처럼 무수한 점이 모인 선이 아니라”[355], 뭔가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동시에 그 전체로 존재하면서 “구부정한 나선”의 “궤적”[355]을 그리는 그런 소설을 원한다.
왜? 이야기가 “가짜의 기억”[361]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탓이다. 작품의 8번 매듭에서, 작가는 영화를 통해 이 점을 비판한다. “새로운 직조 기술”로 영화는 “꿈의 공장”이라는 극장에서 가짜 기억을 주입하며 인간을 획일화하고, 그로부터 “(진짜) 기억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361-362]. 아마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리라.
진짜 기억이란 무엇인가? “소리로, 체취로, 뿌연 영상으로” 기억되는 “말 아닌 모든 것”이다[359]. 여기서 ‘말 아닌’은 ‘이야기로 조작된 것이 아닌’이란 뜻일 텐데, 이는 이 구절 앞에서, 진짜 기억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말을 잊고는”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말을 잊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으로부터 잊혀진 것이었다”고 지적하는 데서 은연중 드러나고 있다[358]. 말하는 방법,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진짜 기억을 간직하고 표현하려면 이야기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의 해설 제목으로 쓰인 <기억을 위반하는 망각의 상상력>이란 말은 일반론적인 관점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작가의 진의를 충분히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작가에게 기억과 망각은 말이라는 동전의 앞뒤와 같기 때문이다: “기억은 망각의 뒷면이었고, 망각은 기억의 뒷면이었다”[359]. 작가가 지향하는 바는, 어떻게 진짜 기억을 가짜 기억의 “차가운 뒷면”[362]―죽음―에 파묻히지 않도록 보존하는, 즉 형상화하는 말의 방법을 찾느냐는 것이다.

III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써야) 하는가? 작가는 문제를 독서의 차원으로 전이시켜 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중에 단어를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무언가 먹고 있는 사람들, 같은 문장의 낱낱의 음들은 입안에서 잠깐 구르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 계속 읽다보면 글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혀끝에 문자의 감각만이 남았다. (…) 흐트러진 채로 휘발된 글자들은 공기 속을 떠돌다가 바다로 갔다. (…) 소리들은 햇빛이 부서뜨리는 바다의 흰 포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고요함은 때때로 바닷바람을 타거나, 비구름에 묻어 육지로 되돌아갔다. (…) 생활의 잊혀진 틈마다 빛처럼, 어둠처럼 고요함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도 고요함의 긴 울림을 떨쳐낼 수 없었고, (…).” [351-352]

여기서 먼저 그려지는 것은 언어 하나하나, 낱낱의 음들이 음미되는 글, 문자의 감각만이 남는 글이다. 이런 글들은 그런데, 휘발되어 바다로 간다는 표현에 기대자면(이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바다 이미지는 죽음의 끝자리라는 이미지로 읽힌다) 잊혀지기 쉽다. 이는 이야기라는 강력한 기억 기계가 제거될 때 쉽게 예견될 수 있는 바지만―이야기야말로 얼마나 기억하기 편한가―, 정작 중요한 점은 잊혀진 듯 죽음의 자리로 건너갔던 그 글이, 그런데 죽음(같은 고요함)을 데리고 더욱 진하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야기 같은 표피적 자극 대신 삶 속에 죽음처럼 고요히 스며들며 ‘긴 울림’으로 남는 글!
작가는 그런 글(소설)을 “뇌의 한 주름 속에 곱게 개켜져 있다가, 어느 순간마다 틈을 비집고 나와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생되고는”[353] 하는 진짜 기억의 저장 장치로 보며, 이런 관점을 그대로 <달로>의 창작 방식에 적용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 틀을 구축하는 열 두 개의 매듭 사이, 그리고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서사적 연계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화시키며 말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돌리게 만드는 침묵의 여백들이다. 그 빈 공간은 때로는 한낮의 빛처럼 눈부시고 때로는 한밤의 어둠처럼 캄캄하다. 우리는 이야기의 몸을 벗어나, 명상 혹은 상상으로 그 빛과 어둠 속을 우주처럼 유영한다.
도대체 나는 몇 번이나 이 소설을 읽었던고…

IV
이런 공간이 조성되기 위해서는 말과 말,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넓히고 깊이를 파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사이의 긴장감 혹은 침묵의 밀도를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시적인 서술 방식이 유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한 예로, 다음 구절들을 읽어보자.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은 고개를 떨구었고, 일들, 은 세탁된 빨래처럼 곳곳에 가볍게 날렸다. 누구나 단 불로 삶은 빨래 같은 생활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런 청정한 일상의 뒷면에서는 아무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바다를 찾지 않았다.”[353]

이 문장들의 동사들은 이야기 전개 행위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첫 문장의 주어도 행위 주체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 일종의 추상화된 사태들이다. 그 주어 ‘슬픈 일들’은 다음 문장에서 ‘슬픔’과 ‘일들’의 두 주어로 분리되고 병렬화되는데, 놀랍게도 이 분리는 단순한 언어 자체의 분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언어 그 자체가 주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언어 주체들은 시처럼 이미지를 타고 흐른다. ‘일들’은 빨래의 이미지에 매개되어 ‘일상’과 연결되고, ‘일상’은 바다 이미지와 대비되어 죽음의 대립 개념이 된다.
내가 읽기에, 작가는 시 애독자를 넘어 시 중독자 쯤 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성복의 시는 거의 자기 살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또는 이성복의 세례를 받은 기형도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들 사이의 큰 진폭, 언어가 흘러가는 리듬, 문장 구성법 등에서 이성복 시의 체취가 도처에서 배어나오고 있다.

V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도 ‘극소량’의 이야기가 숨어 있기는 하다(최승자 시인은 ‘극소량의 시’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 극소량의 이야기는,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작가가 생각하는 ‘진짜 이야기’(‘진짜 기억’으로서의)이다. 그 이야기는 공상적 혹은 우화적 형태로 잠복되어 있는데(의미상으로는 거의 신화적이다), 그 행위 단위를 요약하면 이렇다:

1) 아무도 살지 않는 강 ‘이편’에 ‘그’와 ‘나’는 “모두에게서 잊혀진 최후의 두 사람”처럼 살았다[363];
2) ‘나’는 가끔 강물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곤 했고[356], ‘그’는 강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장대높이뛰기를 하곤 했다[356-357];
3) 어느 날 ‘그’는 결정적으로 달을 향해 장대높이뛰기를 하다가 강에 빠졌다(죽었다)[365].
4) 그 후 ‘나’는 그의 “기억이 지배하는 검은 하늘”을 벗어나기 위해 “강의 건너편을 향해” 걸어가며, 그 기억을 “검은 액자” 속에 담는다(이 소설을 쓴다)[367].

맨 마지막에서야 ‘나’의 현실적 상황이 제시된다. 나는 그가 “스스로를 살해한”[366] 순간 또는 지점을 떠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하염없이 여행 중이다. “떠오른 창백한 얼굴”을 “가는 비”에 적시며, “스스로의 궤적을 떨구면서”[368].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의의로 깊은 슬픔과 서정이 있다.
물론 이 행위의 얼개는 가지를 치면서, 또는 번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면서, 소설의 살아 있는 살을 생성한다. 가령, 그의 죽음은 강에 빠지는 것으로 그냥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가 강에 빠질 때, 강은 달의 뒷면을 비추고 있고, 비춰진 달의 뒷면은 몸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365]. 그는 마침내 달로 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달의 뒷면은 다시 바다와 포개진다. “달의 뒷면에는 앞면보다 아름다울 무수한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350].
이런 중첩과 번짐을 통해야만, 이 소설을 뒤덮고 있는 물의 이미지들―강, 바다, 비―에 대한 이해, 나아가 죽음과 삶, 기억과 망각 등의 교직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시적 이미지들과 이미지들에 밑받쳐져 전개되는 사념 혹은 명상이야말로 이 작품의 실체이다. 읽을 때마다 끝없이 다르게 움직이는,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실체이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총체적 내용은 아주 긴 시를 읽듯 그 모든 이미지들과 사념들의 교직(특히, 몇 가지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이항대립 항들)을 자세히 분석해야만 어느 정도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윤곽에 대해 그저 간단한 스케치를 하고 있을 뿐인 지금의 내게는 거기까지 나갈 여력은 없다.

VI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 가지 지적.
문장 구조 역시 처음엔 얼핏 단문들로 짜여진 듯 보이지만, 이미지와 사념의 체계가 점차 복합화되면서, 갈수록 복문이나 중문, 심지어는 말줄임표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미끄러져 나오는 기묘한 문장들로 전개된다. 최근의 젊은 작가들을 휩쓸고 있는 단문체에서 벗어나 자기 문장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가상스럽다.
다만, 간혹 오문처럼 읽히는 문장이 보이는 게 흠이다. 한 예로, 마지막 0번 매듭의 첫 번째 문장은 여섯 줄에 달하는데, 아무리 읽어도 주어와 술어의 관계, 한 문장으로서의 짜임새가 모호하다[367]. “표현은 정(正)-문법적으로, 그러나 문법의 틀을 문법 안으로부터 내파(內破)시키듯이”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꼭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다.

* [365] 식의 표기는 작품이 수록된 <<문학과사회>>의 쪽수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