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와 쓰레기

이사를 왔다. 아니, 이사를 하긴 했는데 아직 다 오지는 못 했다. 이사한지 한 달이 되도록 집 정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짐을 나르는 트럭을 타고 있는 기분이다. 새 집 공간을 이리저리 헤매는 느낌이 먼지가 잔득 낀 구저분한 꿈결 같다.
이사는 삶의 기본 공간을 해체․재구성하는 일이고, 거기에는 이때까지 내 육체의 실존적 조건이었던 여러 물적 요소들의 일부를 쓰레기로 만드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버려야 이 이사가 끝날까. 망가진 가구류를 버리는 건 쉽다. 더이상 뒤적일 것 같지 않은 책들을 내던지는 것도 이젠 과감해졌다(“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정현종 시인을 패러디했던 게 김화영 선생이던가). 마지막까지 버리기 어려운 것들은 실제론 정말 쓰레기 같아 보이는 것들, 서랍장 구석이나 더러운 궤짝 속에 처박혀 시간을 뒤집어쓰고 있던 것들이다. 중학생 때 쓰던 버클, 모표 따위…
지금 버릴까 말까를 망설이는 건 한 종이 상자 속에 담긴 성냥곽들이다. 맙소사, 내가 이걸 여태 간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대학 시절에 모았던 것들인데, 물론 대개는 그 무렵에 내가 가보았던 곳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70년대 초에 “쏠솔이” 친구들과 드나들던 명동이나 무교동의 ‘카이쟈 호프’ ‘뢰벤부로이’ ‘OB’s 캬빈’(캬빈?) ‘쉘부르’, 동네 버스정류장 앞의 음악 다방 ‘사랑방’(<문 밖의 바람>의 소재로 삼았던 곳이다), 좁은 칸막이가 쳐지고 어두운 조명이 은밀하던 신촌의 ‘이프’ 등등이 텅 빈 성냥곽들 속에서 선하게 떠오른다.
지금 보면 조야하게 디자인되고 인쇄된 그 성냥곽들의 여백에는 그곳에 갔던 날짜나 이런저런 메모들이 적혀 있다. “1975. 10. 10. avec elle” 같은 것은 제일 단순한 경우다. “성냥과 담배가 웃는다. 그것들은 언제나 내 어둠 속에 있었다.” “잊어버려! 뭘? 젊음을?” “지구야 서라, 이제 그만 내리고 싶다.” “믿어다오, 허락해다오.” 그런 따위의 유치하고 순진한 낙서들이 어지럽게 얼룩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적던 순간의 정황이 분명하게 되살아나는 건 드물다. 대부분은 그냥, 내 젊은 날의 살냄새만을 막연히 풍긴다. 그것들을 선뜻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 막연한 냄새가 그럼에도 여전히 강렬한 탓이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도무지 아무 기억도 없다. 틀림없이 내가 갔던 곳이거나 누가 무슨 이유로 준 것일 텐데 그 기억이 완벽하게 하얗다. 내가 ‘장위 다실’엔 왜 갔었지? ‘아드리아’가 도대체 어디지?… 이 기억과 싸우다 끝내 지면, 그런 성냥곽들은 결국 버려지리라는 예감이 든다. 아마도 그것들은 조만간 내 살갗에 더럽게 붙어 있는, 무심히 씻어낼 수 있는 때처럼 여겨질 테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버려질 것들이 얼마나 될까? 얼추 헤아려봐도 반은 넘을 것 같다. 반이 넘는다고? 나도 놀랍다. 25-30년 전에 기억을 위해 간직해 두었으나 이젠 완전히 내 시간에서 이탈한 것이 절반이 넘는다니. 그 시간들은 다 어느 허공으로 흩어졌단 말인가? 과연, 프로이트주의자들이 말하듯, 그것들은 무의식의 저 깊고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처럼, 어느 순간 다시 솟아올라 내 과거를 온전히 재구성하는 단서가 되어줄 수 있을까?
이 자문(自問)에 대해 나는 아주 비관적이다. 젊었을 때는, 어느 통속적 시의 한 구절이자 노래 가사로 쓰였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들으며,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는다는 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렇다. 내 첫사랑의 이름을 나도 잊었다. 그게 사실인 것이다. 이즈음의 나는, 이미 완벽하게 잃어버린 기억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어쩌다 그 기억의 작은 부스러기를 찾더라도, 그것으로 내 묻혀버린 과거를 온전히 되살려내지는 못 하리라고.
아마, 어떤 과거가 돌아오더라도 결코 제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필경 그것은 소설처럼 만들어낸 과거일 것이다. 실상 제 모습 그대로의 기억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도 이미 어느 정도는 만들어낸 과거일지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기억하는 게 아닐까. 정 기억하기 싫으면 잊어버리고, 굳이 기억해야만 한다면 자기 식으로 윤색하거나 심지어는 창작해내는 게 기억이라는 생각을, 이제는 자주 하게 된다. 그런 면은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의 회고담을 비교해 보면 잘 느껴지는데, 그건 그들이 꼭 위선자여서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자기 삶이 그랬었다고, 그랬어야만 했다고 믿고 싶은, 피할 수 없는 인간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라 이해하는 게 낫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을 허구로나마 돌이키고 완성시키고 싶은 그 절실함! 그런 의미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가장 완벽한 허구, 말 그대로의 소설인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성냥곽의 일부를 간직해 둔다면, 그걸 빌미로 내 과거의 허구를 만들고 싶다는, 아직 써야할 소설이 남아 있다는, 허구에의 희망에 뭔가를 걸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