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학·판』을 창간하며

–편집인의 첫마디
이렇게, 우리는 <<문학·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이곳의 문학 공간 속에서는 비어 있으나 비어 있기에 오히려 가능성으로 가득 들끓을 수 있는 어떤 자리들을 끊임없이 찾아가며, 새로운 문학적 ‘판’ 한 마당을 벌이려 한다. 우리 앞에 닫혀 있던 자리를 열어주는, 그리고 그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워주는, 그러나 그곳에 충전된 에너지를 다시금 동력으로 태우며 또다른 빈 자리를 향해 움직여가는, 그런 판을 펼치고 또 짜나가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빈 곳에서 빈 곳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미래에의 활로로 전화시켜주는 판, 더불어 그곳에 다른 자리들과의 관계 고리를 걸어 전체 속의 부분으로 활성화시켜주는 판!
‘판’이란 원래 어떤 ‘짓’ 즉 행위가 벌어지는 자리를 뜻한다. 그런데 이 뜻은 곧 이중적으로 패인다. 우선은 어떤 행위를 부추기며 그 의미가 길어올려지도록 펼쳐진 하나의 상황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행위 작용에 의해 다르게 바뀌어가는, 새롭게 짜여져가는 시간적·공간적 맥락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판’은 ‘짓’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맺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이 살아 움직임은, 동음이의어인 또다른 두 ‘판'(한자어로 盤/板)을 비유로 빌려 쓰자면, 무엇인가가 펼쳐지며 뛰놀 텅빈 틀로서의 판–이를테면 바둑판–과 무엇인가가 짜여지고 새겨진 의미체로서의 판–이를테면 현판–이 등을 붙이고 맞댄 채 서로를 뒤집으며, 비워지면 채우고 채워지면 비우며, 저 자신을 거듭나게 만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우리의 ‘판’은 그러므로 역동적 운동의 장(場), 운동장을 지향한다. 거기서는 ‘판’을 위해/통해 ‘짓’의 주체들이 벌이는 두 근본 행위, ‘펼치다/짜다’라는 두 이항대립적 동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펼치는 것이 개방이라면 짜는 것은 구성이다. 전자로만 기울 때는 아무나 제멋대로 날뛰는 난장-판으로 화하고, 후자로만 기울 때는 저 홀로 목청을 높이는 독장-판으로 화한다. 결국엔 방기나 폐기, 아니면 독선이나 위선만이 남을 것인데, 어느 쪽이든 문학의 이름에는 값할 수가 없다. 문학처럼 문학판도 그 두 동사를 한몸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문학이 본디 그러하듯, 그 완전한 구현이 불가능하더라도 불가능을 끝내 밀고나감으로써 실패의 궤적을 예기치 못했던 가능성의 길로 뒤집는 역설의 상상력이 문학판에도 필요하다.
언젠가 이런 믿음과 그에 기초한 활동이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그때 우리의 ‘판’은 단순한 ‘장’을 넘어 어떤 자력을 띤 ‘자장(磁場)’이 되리라. 사실,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적 활동의 ‘장’인 한, 모든 판은 ‘자장’이 될 수밖에 없다. 판들 사이에는 끄는 힘과 미는 힘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여, 그 모두가 얽혀 흐르는 이른바 ‘판도’라는 것이 그려지도록 만든다. 이때, 그 와중에 놓인 판들은 자칫 그 얽힘을 정치적 방식으로 풀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적 패배를 담보로 삼아 세계의 상상적 재구성과 반성을 꿈꾸는 문학은 그 근원에서부터 반권력적이라는 또 한번의 역설이 우리를 이끈다. 문학적 판에 문학과 어긋나는 짓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을 경계할 것이다.
단연코 문학적 판은 ‘판가름’이나 ‘판내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거꾸로 문학적 판은, 어떻게 모든 길항하는 힘들을 모두어 제3의 에너지로, 모두를 함께 일으켜 세우면서 더 넓고 자유로운 세계를 여는 그런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자리이다. 문학의 궁극적 가치 역시 그러한 역학을 발견하려는 연금술적 상상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문학적 판들 사이의 토론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더욱 생산적일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물론 이 진술은 현실태라기보다는 이상으로 제시되어 있는 길잡이이다. 그렇더라도 그 이상을 다잡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전체 속의 부분으로, 죽임이 아니라 살림을, 다르면서도 더불어, 주체적인만큼 이타적으로……
우리가 이 잡지의 제목을 정하며 ‘문학’과 ‘판’ 사이에 사잇점을 하나 찍어 놓은 이유도 이상과 같은 성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현실 사회의 다른 무수한 판들처럼 ‘문학’과 ‘판’은 아무 의식 없이 한 단어로 결합될 수가 없다. ‘문학·판’도 판은 판이되 전혀 다른, 다를 수밖에 없는 판인 것이다. 이 사잇점에는 ‘판’을 ‘문학’으로 견제하고 ‘문학’을 ‘판’으로 견인하려는 우리의 의도가 들어 있다. 우리는 언제나 문학 그 자체로 돌아가 모든 것을 되새김질하면서 문학을 판 위의 활기로 이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이 잡지가, 점점더 교묘하게 다가오는 온갖 억압과 온갖 안일에 저항하고, 달콤한 망각 대신 쓰디쓴 각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문학적 체험장으로 제공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잡지(雜誌)란 잡스럽다. 그러나 어찌 보면 문학은 잡스러움에 어울린다. 잡스러움을 통해, 잡스러움의 바닥을 쓸며, 잡스러움을 가로질러, 문학은 솟아오른다. 삶의 가장 낮으면서도 구체적인 곳이 문학의 토대인 까닭이다. 우리는 이 잡지가 그런 의미의 잡스러움에 밀착하려 노력할 것임을 약속한다. 덧붙여 우리는 인정한다, 그 잡스러움 탓에 잡지란 매우 한시적이라는 점을. 영원의 환상에 빠진 잡지는 추하다. 조금만 솔직히 생각해 보면, 편집자의 지성이란 것이 얼마나 잡스럽게 한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다. 한 시대의 문학적 판이 다음 시대의 문학적 판에 녹아 들어가면 문학 잡지의 소명은 끝난다. 우리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이 잡지를 시작하고자 한다.
먼 미래의 눈으로 보면, 뛰어난 문학 작품들을 체로 걸러내고 난 뒤에 잡지가 남길 수 있는 것은 아주 앙상한 흔적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흔적의 의미가 역사화되면 ‘판본(板本)’의 역할을 하는데, 이 잡지가 훗날 이 시대에 의미 있었던 문학 활동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판본으로 참조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시작의 자리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우리 문학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 특히 새로운 형태의 허울을 쓴 패배주의와 그 이면을 이루는 맹목주의 혹은 허무주의이다.
이 시대의 문학적 패배주의는, 외적으로는 디지털 문화로 웅변되는 새로운 문화 상황 속에서의 문학 위기 논의에서 비롯된 것이나, 내적으로는 문학 행위의 주체들이 문학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해 보인다. 원칙적으로 의심은 소중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태가 왜 심각하냐 하면, 그 의심이,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무엇이 문학이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산적 질문으로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문화 양식들에 대한 열등감 속에서 흔히는 그저 거기에 기대고 기생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패배주의는 문학의 시대적 위상을 재정립하며 자기 중심을 바로 잡을 때 극복될 수 있다. 우리도 앞으로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인바, 타 문화 영역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양분을 나누는 바람직한 통로를 뚫기 위해, 다른 쟝르의 주체들과 평등한 시민권을 나누어 갖는 문학-주체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을 것이다.
패배주의로 함몰되어 있는 곳엔 일종의 맹목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솔직히 우리는, 새로운 문화의 감각적 현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울 때가 많다. 어쩌면 새로운 문화의 음험한 배후 조정자들이 그렇게 조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문화의 깊이를 구하려는 지성적 노력들은 갈수록 터전을 잃고 있는 듯하다. 반면, 많이 읽히는 작품이 걸작이다, 대중문학이 곧 문학이다, 문학은 오락일 뿐이다라는 식의 단세포적 발상들이 어지럽게 깃발을 세우고 있다. 문학에서 대중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대중이 절대적 척도는 아니다. 문학과 대중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따지고 거기서 문학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해나갈 것인가가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문학도 어떤 측면에서는 오락이다. 그러나 단순한 심심풀이는 아니다. 문학이 어떻게 심오한 오락이 되어 왔는가를 성찰함으로써 지금은 단순한 오락인 다른 것들에 어떻게 감성과 사유의 깊이를 부여하는 참고틀이 될 수 있는가가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진정한 문학적 질(質)이다.
문학적 자포자기는 때로 지적 제스츄어들 속에도 숨어 있다. 가령 이즈음의 패러디 남용 현상이나 문학 권력 논란이 그렇다. 패러디가 매우 유용한 문학적 방법론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패러디를 세계관의 전복과는 무관한 문화 조립품 생산 기제로 삼으며, 애당초 독창적 창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무책임한 명분으로 치장하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장렬한 문학적 실존으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학 권력 문제 역시, 문학 언어 속에 담겨진 정치성 분석의 차원에서든 문학 제도를 다루는 사회학적 차원에서든 긴요하게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문학과 권력 사이의 정당한 논리적 고리는 설정하지 않은 채, 구체적 문학 작품들에 대한 의미 분석은 도외시한 채, 문단의 인맥이나 따지고 자의적으로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는 무용하다. 그것은 결국 문학을 정치의 단순 부산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허위에 맞서려면 언제나 문학적 실존체로서의 작품 자체를 논의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지극한 당위를, 우리는 재확인해 둔다.
그렇게 볼 때, 지금 우리에게 참으로 절실한 것은 대중으로부터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폭넓게 휘덮고 있는 무지 및 편견과의 싸움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체적 작업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할 능력은 없다. 때로는 이슈가 되어 떠오르는 주제로, 때로는 문학론이나 문학사에 대한 재검토로, 때로는 특정 작가의 집중 탐구로 다양한 관심이 전개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작업의 초점은 먼저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연결시키는 데 맞춰질 것이다. 예를 들어 창간호의 특집인 ‘엽기적 상상력’의 경우, 이 용어가 그토록 널리 퍼져 회자하면서도 그 개념 정의나 인식틀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그토록 미미했다는 점은 놀라울 지경이다. 그래서 더욱 모호해지고 물신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이 개념의 뿌리를 찾아 역사적 문맥을 확보하면서 현재적 해석의 테두리를 그려보는 것–그런 류의 시도가 우리의 일차적 목표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미리부터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밑바닥을 훑듯 나아가며, 우리는 하나하나 쌓아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곧 새 길로 닦여 우리의 다음 단계 작업이 열리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갈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의 힘을 모아 가볼 것이다.

2001년 늦가을에 겨울을 열며
* 계간 <<문학·판>>은 11월 17-19일경 간행될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