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이별할 수 있을까

–<<대학신문>> 기획 시리즈: 나의 작품 노트
나는 지난 90년대를 욕망의 난장판이라 부른다. 오래동안 억압되어 있던 ‘자유’의 봇물이 일단 터지기 시작하자, 정치적인 차원에서부터 성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욕망들은 닥치는대로 넘쳐났고, 그것들은 그대로 오늘을 휩쓸고 있다. 지금 우리가 그 혼돈의 소용돌이에 고스란히 빠져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욕망들의 관계를 제대로 조절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나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지금도 자신이 없다. 때로, 어떤 욕망의 흉포성에 미쳐가는 듯한 내 모습이 내 의식의 눈에 목격되던 기억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현실에 속수무책이었던 내 의식의 눈–그것이 소설가적 자아일까–은, 그럼에도 집요하게, 그 “욕망이라는 놈”의 정체와 비밀을 투시하려는 시선의 초점을 모으며 핏줄을 세웠던 것 같다.
소설가이므로 나는 상상의 힘을 믿는다(또는, 상상의 힘을 믿으므로 나는 소설가이다). 상상으로나마 욕망의 유기체적 구조와 운동 방식을 그려낼 수 있다면, 새로운 억압으로서의 욕망에 어느 정도 맞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욕망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는 것도 또 하나의 욕망이 아닐까? 욕망으로 욕망을 가늠할 수 있을까?…
번지며 두터워지는 의혹 속에서, 90년대의 나는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과 <<강 어귀에 섬 하나>>를 썼다.
전자는, 주체로서의 욕망이 대상으로서의 욕망을 추적하면서 뒤얽히는 일련의 과정을, 지극히 구체적인 실존 양태 속에서 그려보려 한 작품이다. 거기서, 희망이자 절망인 욕망은, 광태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한다. 그것을 통해 나는, 한 욕망이 어떻게 다른 욕망과 관계를 맺고 변신하며 끝없이 살아 움직이는가를 내 방식으로 추적하고자 했다.
반면 후자는, 욕망에 대한 일종의 ‘인류학적’ 탐색이었다. 실존적 개별자의 입장에서 자기 욕망의 뿌리를 캐보는 작업과 병행하여, 보다 보편적 차원에서 인간 욕망의 근원적 증식 형태와 그 금기 체제를 드러내보려 한 것이다. 가령 처용 설화에서부터 처용무를 거쳐 하회탈춤으로 이어지는 어떤 내적 맥락에 대한 상상은, 실증적으로 맞든 틀리든, 욕망의 사회화에 대한 인식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도 여전히 모자라다는 느낌이다. 소설쓰기에 충족이란 없는 법이지만, 나는 다시 ‘욕망’을 문제 삼는 세 편의 연작을 구상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더 근원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욕망과의 ‘이별’은 가능한가? 욕망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 자칫 괴물이 되기 일쑤지만, 욕망이 없으면 이미 삶도 없다. 불교의 대선사들이 역설적으로 증거하듯, 욕망은 인간의 증거이다. 그러니까 나는 불가능한 명제를 소설적으로 실험하려는 셈인데, 실패는 자명하되, 실패의 과정 속에서, 비워져가지만 끝내 비워지지 않는 극소화된 욕망의 어떤 미세한 질감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막연하다. 지금 써나가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내 욕망의 분비물로 빚어지기 시작하지만, 언제나 저 스스로를 헤쳐나가는 또 다른 욕망체가 된다. 그렇게 되고야만다.

■ 글 뒤에
문득 이런 생각이 겹쳐진다. 내가 과연 소설 쓰기의 욕망과도 이별할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욕망인데, 이 욕망은 아이처럼 단순하다.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뒤따른다. 이번엔 가능한 한 좀 가볍고 분절된 문체의 색조를 띠고 싶은데, 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모르면서도 그러고 싶다는 게 내 야릇한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