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으로서의 소설

평소엔 안 그러다가도–평소엔 주로 시만 읽는다–,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새삼 남의 소설들이 관심을 당긴다. ‘타자’들 사이에서 내 길을 찾고 내 자리를 잡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요즘 그간 모아 놓은 소설책들을 쌓아 놓고 틈틈이 뒤적거리고 있는데, 국내 소설로는 손에 꼭 잡히는 것이 아직 없었다. 대신, 새로 번역되어 나온 두 권의 프랑스 소설이 흥미로웠다: 아주 얄팍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과, 상당히 두툼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두 사람이 프랑스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명성을 상기하자면, 이들에 대한 소개는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에르노 소설은 이미 출판된 것이 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기야 미국식 대중문화가 판치는 요즘엔 문학판에서도 프랑스 소설이 잘 안 팔린다지, 아마…
두 작품은, 책의 외형·부피가 현격히 차이짐에도 불구하고,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글쓰기 스타일에서는 얼핏 유사해보였다. 우선, 두 작가 공히 ‘시적 에세이’ 류의 문체를 구사한다. 이는 최근의 ‘반-소설적’ 경향이 이야기의 해체에 이어 문학/철학, 시/소설의 전통적 구분을 무화시키는 어떤 자리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제목이 암시하듯 불륜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통속적 구도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단장식 서술 양식 속에서 그것이 반사회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욕망의 문제로 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환의 시대에 가장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직시와 성찰이 필요하다는 뜻일까?
그러나 솔직히, <<단순한 열정>>은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불륜의 껍질 밑에 도사린 열정의 극한적 행태나 미묘한 심리 변화가 전율처럼 다가오는 진술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몰래 쓰는 일기의 단편들을 모아 펼쳐놓은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 그 욕망의 깊은 뿌리로 내려가지 않고, 들뜬 표층에만 사로잡힌 채 그러한 자기 모습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뜨거운 알몸이 너무 뜨거워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옷을 훌훌 내던지며 모두에게 드러내는 양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뒤에 숨어서 작동하고 있는 것도 행여 ‘단순한’ 감정, 가령 원망이나 복수심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혐의도 떨치기 힘들다.
그에 비해 <<은밀한 생>>은 기대를 훨씬 초과해서, 오랜만에 ‘진짜’ 소설–아니, ‘진짜’ 반소설–을 읽는다는 감동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요즘 소설답지 않게 길면서도 그렇게 말 하나하나의 밀도로 충만한 작품을 최근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작품은 말 자체가 지니는 육체성 혹은 육감과 그 근원적 의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동시에 말과 말이 맞물리고 퍼지는 파장을 꿈결처럼 따라간다. 그래서 사회적 삶과는 별개인 은밀한 삶으로서의 사랑의 우주, 그 천체도를 짜간다. 거기서 신화적 상상력과 철학적 명상이 하나의 실존 위에 겹쳐진다.
이 우주는 인과론적 이야기 구조와는 정반대의 세계이다. 단장식 글쓰기가 증언하는바, 모든 것은 분절되어 있다. 소설의 구주부터가 그렇다. 모두 53개의 작은 장(章)으로 나뉘면서–어떤 장은 한 문장에 불과하다–, 다시 그 장들은 더 작은 단장 형태로 조각진다. 그러나 희한하다. 그렇게 계속 분절되어가는데, 읽어가면서 그 조각들은 어느덧 전체로 얽힌다. 거기서는, 가장 낮은 성교의 문제가 여행·퇴장의 주제를 거쳐 저 높은 죽음·회귀의 문제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예컨대 46장). 그때, 그 사이를 접착시키는 것은 존재의 심연으로 곧바로 다가가는 시적 몽상이다(가령 38장).
……사랑의 진실은, 그러니까 삶의 진실은, 거듭 확인컨대,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론의 차원에서 언급하자면, 이야기는 어쩌면 삶의 불안정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안주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한 욕망의 알리바이 혹은 허위의식일 뿐이다(이즈음의 ‘판타지 소설’은 그런 단순한 욕망을 신화·모험·과학 등으로 치장한 복잡한 가면일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장편(roman)이 진짜 소설이라는 괴상한 관념도 허물어야 한다.

■ 곁 생각
1) 나는 키냐르가 문학사에 남을 소설가라고 확신한다. <<은밀한 생>>은 거듭 읽을 가치가 있고, 사실 나의 첫 독서도 너무 성급했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다시 읽을 생각이다.
2)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을 에세이라고 부른 건 선택의 문제였다. 그가 그걸 소설이라 불렀다면 소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누군가, 소설이란 글쓴이가 그걸 소설로 부르면 소설이 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약간은 씨닉한 뉘앙스를 풍겼었던가?).
3) 그러고 보면 단장식 글쓰기는 프랑스 문학의 중요한 전통중의 하나였고(물론 프랑스 이전으로 거슬러갈 수 있겠지만), 중요한 역사적 반성의 시기에 출몰했었다. 하지만 그것에 소설이라는 이름까지 부여된 건 20세기말이 처음인 듯하다. 그것은 이런 글쓰기가 이 시대의 소설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