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심연의 감각’이 쓴 단장들

새로 번역된 <<벌거벗은 내 마음>>을 되새김질하며

두께가 없는 휘발성 감각과 감정들로 지저분하게 화장된 ‘산문’들이 쓰레기처럼 거리에 널려 있는 이즈음, 새로 번역되어 나온 보들레르의 <<벌거벗은 내 마음>>(이건수 역, 문지스펙트럼, 문학과지성사, 2001)은 새삼 다이아몬드 같은 결정체의 언어로 빛난다. 그의 생전에 “자기 나름의 고백록”으로 구상되었으나 사후 20년만에야 출간된 이 단장(斷章) 모음 형식의 산문집은, 미완의 상태로 정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연의 감각'[61]으로부터 솟아오른 그의 언어가 정녕 어떤 고통/황홀의 양성체인가를 잘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단장들 속에는, 초고수의 검객이 광속보다도 빠른 듯 순간적으로 날렵하게 보여주는 칼부림에 비유될 만한 어떤 면모가 숨어 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났는지 알 수도 없게 그저 환각처럼 스쳐지나가는 그 칼부림-말부림 앞에서, 뭔가 섬뜩했지만 멍청해진 상태로 한 동안 정지 상태에 놓여 있던 독자들은 뒤늦게야 천천히, 너무도 얇으면서도 날카롭고 선명한 날빛 한 켜가 자신의 캄캄한 몸안으로 가로질러 갔음을 깨닫게 된다. 때로 그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이때까지의 자신을 그 자리에 그대로 썩은 고목처럼 쓰러뜨려야 할 정도로.
그러나, 자기 반성적 의식과 주체적 사유를 위한 최소한의 기제를 갖춘 독자들에게, 단장은 또한 자유로움과 즐거움의 형식이기도 하다. 직관적으로 툭툭 내던져진 듯한 단장의 언어들은 기본적으로 단장이라는 어휘가 뜻하는 바 그대로 조각진 글들로 산개하기 때문에, 우선은, 그 하나하나를 개체로 부리며 그 조각들 사이를 자유롭게 건너뛸 수 있게 하고, 그 넓은 행간과 단어들의 큰 진동 위에 자기를 맘껏 풀어놓을 수 있게 해준다. 가령 <<벌거벗은 내 마음>>에서 손 끝에 걸리는대로 옮겨본,

1) 삶은 오직 하나의 진정한 매력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도박에의 매력이다. 그러나 만약 따고 잃는 것이 우리에게 도무지 무관한 것이라면? [27]

2) 약간 기형이지 않는 것은 얼른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그 결과 불규칙적인 것, 즉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일이나 놀람은 미(美)를 이루는 본질적인 부분이자 특성이 된다. [32]

3) 모든 변화에는 수치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기분 좋은 그 무엇, 배신과 더불어 새 집으로 이사하는 것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 프랑스 혁명을 설명하는 데 이것으로 족하다. [76]

4) 사랑을 없앨 수 없자, 교회는 적어도 그것을 소독하기를 원해서 결혼 제도를 만들었다. [105]

등의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글조각들의 말-맛을 그 자체로 음미하며, 나아가 그 기묘한 말-거울로 세계를 비춰보고 삶·미·역사·사회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과 성찰을 일종의 놀이처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런 향유를 열어주는 열쇠는 굳은 관념을 흔드는 ‘아이러니’이다. 꼭 보들레르에서뿐만이 아니라, 아이러니는 단장식 글쓰기의 초석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라도 보들레르가 ‘심연의 감각’이라 부른 것에 밑받쳐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토록 끝없이 그의 단장들 앞에서 배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심연의 감각을 떠올리는 저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문학의 근본적인 두 특질: 초자연주의와 아이러니”[39]라는 한 마디를 통해, 보들레르는 아이러니의 전제로 초자연주의를 내건다. 그가 말하는 ‘초자연’이란 “보편적 색조와 어조, 즉 시공간 속에서의 강도, 반향, 투명도, 진동, 깊이와 울림을 내포하”는 무엇, “시간과 공간이 더욱 깊어지고, 자신의 존재감이 무한히 증가되는 삶의 순간들”[39]에 체험되는 무엇이다. 그를 ‘상징’으로 이끄는 것도 이것이다.

‘영혼의’ 거의 초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삶의 깊이가 눈앞의 아주 평범한 광경 속에서라도 통째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상징이다. [40-41]

이 관점은 그의 단장 쓰기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일관성에 의해, 이제, 그의 단장들은 ‘조각’의 수준을 넘어 ‘책’이라는 구성체로 다가오게 된다. 사실, <<벌거벗은 내 마음>>은 아무리 게으르게 그 단장 조각만을 즐기려해도, 읽다보면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커다란 공간의 테두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속에서 모든 조각들은 날줄과 씨줄로 얽힌다. 가령 저 위의 4번 인용문은 사랑과 사회적 제도에 대한 실랄한 단상이지만, 이 책의 첫페이지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명제:

사랑, 그것은 매음에의 취향이다. 매음으로 귀결되지 않는 고상한 쾌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15]

에서부터 시작되어, 이 길목 저 길목에 박혀 있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단장들:

1) 사랑은 너그러운 감정에서 파생할 수 있다: 매음에의 취향. 그러나 이것은 곧 소유의 취향에 의해 변질된다. [16]

2) 사랑의 유일하고 지고한 관능이란 악을 행한다는 확신 속에 존재한다. [21]

3) 사랑의 행위에는 고문이나 외과 수술과 흡사한 데가 있다. [41]

4) 사랑이란 무엇인가? / 자신을 탈피하려는 욕구. / 인간은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동물이다. / 숭배한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파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사랑은 매음이다. [120]

등등으로, 때로는 사랑의 한 장면에 대한 지극히 소설적인 묘사[52-53]로까지, ‘사랑’아라는 중심 주제를 놓고 겹쳐지며 이어지는 수직적 날줄의 한 고리를 이룬다.

동시에, 이 사랑의 주제는, ‘매음’이라는 의미소를 매개로,
1) 예술이란 무엇인가? 매음. [15]

2) 가장 매음적인 존재,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인 신이다. [121]

3)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매음의 물리칠 수 없는 취향, 거기에서 그의 고독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다. (…) 영광은 홀로 남아 있는 것이며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을 매음시키는 것이다. [143-144]

에서처럼, 예술·종교·실존 등의 문제로 수평적으로 퍼지며 함께 씨줄을 그려냄으로써, 책 전체의 시공적 구조화를 위해 움직여간다.
그 움직임이 꿈꾸는 것은 앞서 언급한 보들레르적 상징이 꿈꾸는 것과 같다. 이 언어 공간을 하나의 자율적 소우주, 이를테면 “축소된 무한”[132]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악의 꽃>>의 <상응>이라는 시가 그리는 “상징의 숲”을 떠올린다. 그러고보면, 보들레르의 단장들은 거의 지고한 시의 경지까지를 추구하는 모양이다.

한 소리만 덧붙이련다. 보들레르적 단장은 신/악마, 상승/하강, 자비/잔혹, 거만/굴종, 분노/슬픔, 쾌락/노동 따위의 무수한 이항대립적 사유 구도로 짜여져 있다. 그것은 그러나 배타적 이원론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성스러운 매음”[75] 같은 표현에서 보듯,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모순결합적인 역동성의 이원론을 지향한다. 그것은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연결 줄인 신비주의” [75]를 설정할 줄 아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바로 그 상상력이 또 하나의 아이러니로서 “미신은 모든 진리의 저장소이다”[75]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이만 총총……

* [45] 식의 표기는 <<벌거벗은 내 마음>>의 해당 쪽수를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