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칼럼] 내러티브라는 위안 |정홍수|

편집자로 일해오면서 후회되고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외국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은 그중 늘 앞쪽에서 어른거린다. 요즘이야 많이 전문화되어서 인문서 편집자를 따로 뽑는 출판사도 많고, 아예 처음부터 그쪽을 염두에 두고 편집자 인생을 설계하는 이들도 생겨났지만 특별한 전문성도 없이 편집자 생활을 시작한 나의 경우 어중재비로 그저 목전에 주어진 원고를 장르 불문하고 그때그때 감당하느라 급급했다고 해야 어느 정도 진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런 만큼 간혹 난해한 외국 이론서 교정을 볼 때면 원서를 옆에 두고 머리를 쥐어박기 일쑤였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붙잡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그때뿐, 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작년 연말부터 두 달 넘게 피터 브룩스의 『플롯 찾아 읽기』라는 책과 씨름해오면서 맛보았던 고심참담은 내 허술한 편집자 이력을 증거하는 것일 텐데, 착잡함이 컸다. 이 책은 특히 스탕달, 외젠 쉬, 플로베르 등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텍스트들을 주요한 전거로 삼으면서(물론 그밖에도 핵심이랄 수 있는 프로이트를 비롯 콘래드, 포크너 등의 텍스트가 다루어진다) 논의를 진행해나가고 있어서 소설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 등 그 고유명의 확인부터 만만치 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역자의 수고와는 별도로 편집자가 찾고 검증해야 하는 기초적인 사실 확인의 영역에서 외국어 실력과 문학 교양의 부족은 교정 과정을 장애물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원고의 내용을 따라가며 저자의 논지를 음미하는 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해도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금씩 교정 작업에도 진척이 생겨났고 1월 중순이 지나면서 그 끝이 보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원고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면서 난해하게만 여겨졌던 저자 논지가 희미하게나마 내 둔한 머리 한구석을 두드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대소설의 내러티브는 신의 섭리 혹은 신성한 플롯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 대체재를 찾아 위안을 구하려 했던 인간의 몸부림이라는 것. 그렇다면 선험적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지는 것인가. 그 의미는 내러티브의 끝 혹은 결말에서 회고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그 의미는 회복 불가능한 것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이 흔히 주인공의 야망이나 의도를 무산시키고 참담한 실패로 끝나거나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해답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결말을 향한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지만, 이 결말의 욕망에는 죽음 본능이 겹쳐 있는 것이어서 결말을 향하면서도 결말을 지연시키려는 반복과 일탈의 중간을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내러티브의 권위나 플롯의 자의성을 의심하고 반성하려 했던 모더니즘의 반발 역시 근본적으로는 내러티브가 인간 존재와 맺고 있는 숙명적 상동성을 통해 좀더 풍성하게 해명될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논의는 그 세목을 따라잡기는 힘든 대로 왠지 모를 위안의 내러티브를 스스로 구성해내고 있는 듯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의 전이 개념을 내러티브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에서 보아내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내러티브의 불가피성과 그 동력을 의식/무의식의 인간 욕망에서 찾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내러티브가 인간 욕망의 문제라면,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한 안타까운 몸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착잡했지만, 그 착잡함은 뭔가 마음을 데우는 착잡함이었다.
……며칠 전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선생의 그 돌이킬 수 없는 아픈 내러티브들은 선생 개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간혹 위안의 순간도 찾아왔을까. 알 길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내러티브들이 우리를 깊이 위로했다는 사실이다. 편히 쉬시길 빈다.

[평론가 / 강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