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자기 집 없이 맞는 이상의 100번째 생일 |함돈균|

최근에 가수 조영남씨가 죽기 직전에 꼭 써보고 싶은 책이었다며, 이상의 시 해설서를 출판하고 북콘서트까지 열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상이라는 텍스트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늘 논쟁 중인 텍스트이며, 조씨의 사례에서 보듯 이 논쟁과 호기심의 주체는 전문연구자를 넘어 일반 독자까지를 포괄한다. 불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제한적인 양의 작품만을 생산하고 간 한 젊은 작가가, 지식인과 대중독자 모두에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계속적으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이적인 일이다. 그것은 이상이라는 텍스트가 “박제된 천재”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며, 심지어는 너무 일찍 도달한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시인과 소설가가 시대의 선각자 역할을 자처하던 근대 ‘계몽기’에, 이상의 텍스트는 오히려 자신의 삶과 시대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는 히스테리적 질문만으로 일관함으로써, 일말의 계몽의식도 발견할 수 없는 “이상한 가역반응”이 되었다. 이상은 역사와 계급의식을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포섭하지 못했지만, 도시와 성(性)과 병(病)과 과학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함으로써, (식민지) 모더니티와 세계의 균열상을 증후적으로 노출하는 문제적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선각자’ 최남선이 이후 태평양전쟁을 위한 학병(學兵)을 호소하러 돌아다니고, ‘민족주의자’ 이광수가 [무정]의 말미에서 나라 잃은 시대를 진보의 낙원으로 묘사한 반면, 민족(어)에 대한 자각이 없어 일어로 시를 즐겨 썼던 이상은, 병마에 시달리고 연애에 실패한 무산지식인의 병적 무의식에 강박적으로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地球儀)”([AU MAGASIN DE NOUVEAUTES]), ‘가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1910년 음력 8월 20일(양력 9월 23일)에 태어났다. 1910년 8월 22일이 한일병합조약이 선포된 날이니, 그는 조선의 망국과 더불어 태어나서 올해 9월 23일로 꼭 100살을 맞는 셈이다. 그의 출생지는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지금의 사직동) 4통 6호이다. 4세가 되던 1913년에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하던 백부 김연필의 집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에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이곳이 그의 본적이 되었고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상은 1917년에 경성부 누상동에 있는 4년제 신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1년에 견지동의 동광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보성고보에 동광학교가 해체 편입되면서 보성고보 학생이 되었다. 1927년 동숭동에 있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고, 1929년 1등으로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상은 1929년에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으며, 그 해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은 1933년과 1935년 종로1가와 인사동에 잇따라 다방을 열기도 했다. 이때 이 다방을 드나들던 그의 친구들이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같은 1930년대 문단의 이름난 댄디들이었다. 1936년 [날개] 등의 소설과 많은 시를 집필 발표하던 이상은, 그해 11월 동경으로 간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일경에게 ‘불령선인’으로 검거되어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동경제대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4월 17일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마지막 ‘여인’이 된 아내 변동림이 화장한 그의 유골을 동경에서 가져와 6월 10일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렇듯 이상은 생애의 마지막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시와 소설을 쓰고, 서울에서 교우하고 연애했으며, 서울의 한복판을 자신의 텍스트로 삼았던 서울 토박이었다. [날개]에서 가출한 주인공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경성역의 시계탑이었으며, 주인공이 부활의 날개를 퍼덕이다가 다시 스며들어간 “회탁의 거리”는 본정통(명동)의 미쓰꼬씨 백화점 옥상과 그 앞의 거리였다. [운동]이라는 시에서 이상은 미쓰꼬씨 백화점의 옥상정원에 올라가 경성의 휘황찬란한 거리를 사방으로 둘러보고선 “(여기엔) 아무것도없”다고 독백한다. 그가 바라본 곳은 조선은행과 경성부청과 조선우체국 같은 경성의 랜드마크가 줄지어 서있던 선은전광장(한국은행 앞)이었고, 식민지 모더니티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완성되어 가던 남대문통과 본정통 사이의 거리였다. 그는 식민지 정치권력의 핵심공간이었던 광화문 근처에서 태어나, 식민지 고등교육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동숭동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가외가전]이라는 시에서 경성은 거대한 매춘굴로 그려졌고, [파첩]에서는 “상장(喪章)을 붙인” “사멸의 가나안”으로, [조감도]에서는 “알카포네”가 접수한 타락한 화폐도시로 묘사되었으며, 그 유명한 [오감도-시제일호]에서 경성의 거리는 “무서운아해”와 “무서워하는아해”가 구별되지 않는 공포의 도로로 파악되었다. 모더니티에 대한 동경과 불신을 동시적으로 노출하는 이상의 아이러니한 텍스트들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구축된 식민지 경성의 은폐된 이면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한국문학사상 가장 ‘병적’이고 불온한 기록이 되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디자인 서울’을 한다면서도 이러한 기념비적인 서울의 토박이 문화자산을, 자신의 유산으로 포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서울시의 무신경과 몰역사성이다. 대신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야심찬 ‘디자인 서울’은 광화문 앞 큰 도로에 매 계절 수억원이 드는 꽃밭을 조성해서 심었다 뽑기를 반복하고, 분수대를 만들고, 뜬금없이 남산에 물길을 파기도 하며, 서울 시내 곳곳의 도로를 파헤쳐 전시성 자전거도로 만들기에 집중된다. 멀쩡한 한강공원 전체를 거대한 예산을 들여 파헤치기를 1년, 마침내 모든 한강지구의 풍경은 동일한 모습의 유원지가 되었다. 내가 보기엔 개별 공간이 지닌 특수성을 무화시키고, 특정 공간에 스민 기억-시간성을 도려내며, 시민의 귀한 세금을 물 쓰듯 탕진하면서 도시 공간 전체를 천박한 놀이공원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 이 ‘디자인 서울’의 본질이다.
정작 그 ‘디자인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 옆 골목,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전위인 이상의 본적지와 생가는 시인의 흔적도 살펴 볼 수 없이 방치된 채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되어 있다.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타지 동경에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었다 죽은 이상은, 100번째 생일에도 생일상을 차려줄 자기 집이 없어 여전히 서울에서도 불령선인인 셈이다.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 서울’ 하에서 그의 집터에 소박한 문학관 하나를 디자인 해주는 일을 소망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을 소망하는 일일까.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