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조금 우울한 발견 |윤효|

영화 <시>를 컴퓨터로 다운받아 봤다.
영화는 괜찮았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하녀>보다 훨 나았고, 이창동 감독의 전작 <밀양>보다도 좋았다. <밀양>에 대해선 호감 보단 꺼림칙한 느낌이 강했었다. 쉴 새 없이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전도연의 연기도, 절대 약자인 살해된 아이의 존재가 끊임없이 환기되는 것도 불편했다. 심지어 소도시 골목 어디에서나 마주칠만한 중년 아저씨 같기만 한 송강호도 재미없었다.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영화의 결말을 끌어낸 주인공 미자의 선택이었다. 평범한 중년 남자들이 아들들의 미래를 위해 그들에게 성폭행 당하고 자살한 소녀의 엄마에게 위로금 삼천만원을 만들어주자고 합의를 한다. 그 모임에서 별 이견 없이 앉아만 있을 때도, 뜻밖에도 매춘과 협박으로 오백만원을 구해 건네줄 때도 난 그녀가 타협하는 줄 알았다. 또 타협한다고 해도 가혹하게 비난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자는 손자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이고 깨끗이 씻긴 뒤 경찰에게 내준다. 아마 다른 소년들도 잡혀갔을 갓이다.
그녀가 천착한 것은 영혼의 문제다. 자신의 죄를 실감 못하는 손자의 영혼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처리해야만 할 트러블로 여기는 중년 남자들의 영혼을 위해, 상처투성이로 죽은 소녀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 죽음을 내장처럼 담고 살아가야 하는 소녀의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감독은 열린 결말이라고 했지만 난 미자가 소녀처럼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코너에 몰린 상황이어서만은 아니다.(그녀는 치매에 걸려 세상을 깜빡깜빡 잊어가는 중이다) 손자와 그의 친구들의 인생을 집어삼켜버린 자신의 폭력도 용서할 수 없을테니까.
그렇게 그녀가 영혼 쪽으로 결론을 내렸을 때, ‘시’가 탄생한다. 소박한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형이상학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솜씨는 놀라웠다.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의 센 스토리를 봤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난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상처를 갖고 있다. 아니면 자신의 성격 안에 완고한 모순을 갖고 있거나 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누구도 예술가만큼 인생의 여러 얼굴들에 대해 예민하게, 어쩌면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생래적으로 결벽증을 앓는 자들이다. 시를 쓰고 싶어 했으나 한 줄도 쓰지 못했던 미자가 소박하지만 울림이 큰 시를 쓰게 되는 순간도 결벽에의 욕구에 순응했을 때이다.
영화 <채식주의자>를 볼 때 새롭게 느꼈던 건 딱 하나였다. 세상의 폭력을 비난하는 예술이 인생에 대해선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 원작 <몽고반점>에서 슬럼프에 빠진 한 화가의 처제에 대한 갈망이 아내의 삶의 결정적인 부분을 붕괴시켜버리는 모습을 보며 폭력 외의 어떤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물론 그 폭력은 질환을 낳을 수도 있고 예술을 낳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어도 예술가들의 인생은 서서히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만의 아집과 집중이 통속적인 삶의 템포, 관계의 패턴과 심각하게 불화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굴려가는 여러 바퀴들 중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문득 느끼지만 과연 그 작업을 할 만한 패기가 내게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