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BCAA’DE |오은|

1983년 5월의 어느 날, 돌잔치를 맞아 B가 처음으로 연필을 손에 쥐었을 때, 누군가는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 아기가 훌륭하게 자라나 삼십 년 뒤에 학자가 된다면, 거기에는 저 흑연과 점토의 혼합물이 단단히 한몫했을 거라고 지레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지 B의 형도 B였을 때 연필을 쥐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B의 어머니는 B의 선택을 조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두둑이 쌓여 있는 푸릇푸릇한 돈다발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B는 멋모르고 잔치 내내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그게 세상의 모든 B들이 잘하는 짓이었다. 잔치가 끝나자, B는 더 이상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이 참을 수 없어 결국 비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B들이 잘하는 또 다른 한 가지, 바로 세상이 떠내려갈 정도로 시원하게 울어 젖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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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B의 아버지는 사진기를 들어 B의 앙증맞은 동작 하나하나를 렌즈에 담는 데 여념이 없었다. B의 형도 여전히 B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B는 B의 형보다 한 살 어리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더욱 사랑 받았다. B는 세상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더 열심히 걸음마 연습을 하고, 바닥을 기어 다닐 때조차 이따금 시선 처리를 분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B의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B의 부모님은 결국 B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B의 이기심을 누그러뜨릴 뾰족한 수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B는 이미 쓸 수 있는 카드와 떼를 다 써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부모의 결정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형이 몸담고 있는 세계가 자못 궁금하기도 한 터였다.
B가 유치원에 입학하고 마침내 C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C를 B였을 때처럼 돌봐주지 않았다. B는 불만이 많았지만, 아직까지 그 불만을 발설하는 데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서툴렀다. 고작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없이 늘어지거나 밥 먹기를 거부하고 문간에 앉아 버티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C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었다. C는 제풀에 치맛자락을 놓고 잠들었으며 배고픔에 지쳐 어깨가 축 처진 상태로 밥상 앞에 앉아 고분고분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수법 역시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C는 이럴 바에야 작금의 상황을 즐겨야겠다고 꾀를 부렸다. 당당하게 C로 거듭나는 게 C의 새로운 미션이 되었다.
유치원에 가니, 이제 막 C가 된 또 다른 B들이 많이 있었다. C는 친구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이 새로운 관계에 지나치게 열광했다. 친구들과 함께 글자를 배우고 노래를 부를 때면 모종의 뿌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처음부터 C에게는 글자들이 너무 예쁘게 보였다. 기역을 그리며 기억을 더듬고 니은을 쓰며 나이가 뭘까 난생처음 헤아려보기도 했다. 방과 후에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C는 그들과 함께 아버지가 되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불량식품을 이용해 혓바닥을 인공 색소로 물들이는 법 역시 터득했다. 어느 날, C의 친구 중 하나가 대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자, C는 다시 B가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신체의 한 부위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C의 살이 몰라보게 빠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첫 이별이었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첫 다이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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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이별을 더 겪고 나니, C의 키는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어느 날, C는 무심코 턱을 쓰다듬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C는 자신이 더 이상 C로 머물 수 없음을 직감했다. 머물 수 없다는 것은 곧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C는 자란다는 것에 대해, 몸이 어떠한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과 자신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몸을 뺀 사물들을 헤아리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 속에는 걱정과 설움, 모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 모두 담겨 있었다. C는 불현듯 우울해졌다. 전에도 우울한 적이 여러 번 있었을 테지만, ‘나는 우울하다’고 스스로 의사봉을 두드리며 진단을 내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C는 발바닥에 주홍 글씨 A를 새기고 A가 되었다. A가 되자, 이상하게도 불안은 더 가속화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A는 자신이 왜 과거에 B였는지, 왜 알파벳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는지, 왜 삶은 알파벳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A에게 아무도 시원한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입을 다문 자들은 소위 A’이라 불리는 또 다른 A들이었다. A는 마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종이배가 된 기분이었다. A가 된 것이 일종의 끔찍한 퇴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A는 예쁜 것만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A가 다시 글자들과 친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A는 글자들을 가슴에 품고 그 시기를 간신히 견뎌냈다. C였던 시절, 매일같이 보던 친구들은 더 이상 A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사실조차 별로 슬프지 않았다. A는 그저 종일 책에 고개를 파묻고 더 단단해졌다. 종잇장 귀퉁이에 손을 베는 날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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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A는 또 다른 A, 그러니까 A’이 되었다. 처음에 A에서 A’의 가면으로 바꿔 쓰는 일은 근사하게만 보였다. 술을 마음대로 마셔도 될 것 같았고 담배를 피우거나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A’은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임이었다. 더 이상 일을 저지르고 나 몰라라 방 안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A’은 몇 개월 전으로 되돌아가 원래의 A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예 평생을 B나 C의 상태로 살면 마음 편할 것 같다는 불가능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A’은 나이를 먹는 것이, 누군가의 형이나 오빠가 되고 나아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또 다른 A이되, 원래의 A대로 살 수는 없을까. 그러나 A’는 결코 피터 팬이 될 수 없었다. 그건 C 시기에나 품을 수 있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A’는 결국 또다시 글자들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그가 입때껏 살아오면서 내린 가장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그에게 글자들은 여전히 예쁜 장난감 블록처럼 보였다. 그 블록들을 직접 조립해보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제까지 계속 해왔던 일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A’은 연필을 굴리며 그 블록들을 붙였다 뗐다 반복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머지않아 그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블록들을 조립할 때에는 친구가 없어도 외롭지 않았고, 성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었다. 그저 블록들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간혹 맞지 않는 블록들이 나올 때면 속이 상하고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다시 블록들을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지만, 그 좌절마저도 뭔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A’에게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사실은 그 어떤 모험보다도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블록들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모형의 가짓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A’이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너무 많은 모형들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모형들은 결코 허물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개중 어떤 것들은 심지어 기상천외하거나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러나 A’은 여기서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당한 A’으로서 무언가를 책임져야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글자들이 되어야 했다. 어느덧 A’은 학자와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푸릇푸릇한 돈다발과 이별을 고한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아주 가끔, 돌잔치 때 쥐었던 연필의 감촉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불분명한 감촉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위안이었다. D를 예정보다 일찍 만날 운명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만의 모형이 완성될 때까지 A’은 사는 것을, 노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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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먼 훗날 언젠가, A’이 자신만의 모형을 만들었다고 치자. A’은 그제야 비로소 B가 가장 잘했던 예의 그 행위를 또 한 차례 선보일 것이다. 바로 시원하게 울어 젖히는 것. 그 울음 속에는 정말이지 많은 성분이 들어 있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 하루를 위해 지금도 A’은 눈물을 삼키며 다짐을 거듭하고 있다. 철이 들지 않은 채로 D를 맞이할 때까지, 결코 노는 것을 그만두지 말자고. 블록들을 쉽사리 손에서 놓아버리지 말자고. 그 블록들로 말미암아 A’은 자라날 수 있었으므로, 스스로를 껴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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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를 맞이한 A’은 마지막으로 외친다. “E!”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앙코르.

<등장인물>
B: Baby
C: Child
A: Adolescent
A': Adult
D: Death
E: Encore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