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 신작시] 밤의 어둡고 환한 줄기들 |강정|

밤에도 검은 줄기 흰 줄기가 따로 있다
어두운 길을 더듬듯 마음을 박박 긁다가
검은 줄기에서 흰 줄기가 새는 걸 보고 급하게 표정을 바꿔 쓴다
죽음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한다,
라고 순결한 노트를 적신다
정작 입에선 신음만 흐르지만
밤의 흰 줄기 속으로 정신을 우겨 넣다 보니
한나절의 아픔 따위 먼 나라의 슬픈 동화 같기만 하다
돌이킬 수 없는 치정이 있었다
살기 위해서 죽음과도 같은 열병을 겪어야 한다며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꿈속에서
사흘 밤낮을 헤매었다
눈보라와 폭염이 한데 엉킨 극지에서의 방황이었다
검은 줄기를 따라가면 이글거리는 태양 앞에서
왕관을 쓴 누이를 만나기도 했다
흰 줄기의 끝엔 절벽이 있었다
절벽을 삼키는 파도가 있었고
만지면 거품으로 변하는 새하얀 분노가 들끓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오장육부를 해체해
미증유의 인간 품종을 개발하는 사업도 꿈꾸곤 했다
흰 줄기의 물줄기를 끌어
검은 줄기의 황막한 표면을 적시다 보면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 그것들이 그대로 밤의 창공에 봄꽃처럼 흐드러졌다
왕관을 쓴 누이가 꽃을 거두어
파도의 끝에 매달았다
몸이 더 먼 곳으로 실려 나가는 꿈에서 문득 깨어보면
갓 마흔의 이부자리가 기분 좋게 흥건했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볕을 받으니
몸의 뿌리가 이미 창공을 매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