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칼럼] 0과 1 사이 |유희경|

0. 오전엔 뭐라도 쏟아질 것 같더니,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 공중은 그저 적막한 예감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있다. 따뜻해 보이는 구름이 조금씩 몸집을 민다. 짧게 햇살이 잠시 창가를 비춘다, 사라진다. 며칠 전 폭설의 흔적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창가 어디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그리고 긴 긴 침묵. 아무 일도 없었지만 무언가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1. 그렇게 잠이 쏟아져온다. 소파에 기댄 채 절반쯤은 졸고 절반쯤은 자다가, 몸이 뜨거워져오는 것을 느낀다. 뜨거워지는 몸을 따라 조금씩 불규칙해지는 심장 박동. 당연한 것처럼 두통이 찾아온다. 미간으로 머리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는 것 같은 이런 통증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통증이 더, 묵직해질수록 나는 기를 쓰고 잠을 찾아간다. 깊지 않게 그러나 조금 더 멀리.

0. 이런 날은 통째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 날아간 새는 날아간 것이 아니다. 지구가 그런 것처럼, 이날이 새의 곁을 날아간 것이다. 구름이 흩어짐 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것도 이렇게 설명된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러니까 몸에 간신히 붙들려, 꿈과 현실의 미묘한 곳을 아슬아슬 흔들리고 있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그러니까 나는 이 날의 방향과 관계없이 떠가고 싶은 것인데.

1. 지금, 나는 몸통과 의식의 몇 조각만 남겨놓은 채 짧은 햇살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나와 내 몸의 작별은 이렇게 간신하다. 나는 뒤척이듯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간다. 그러나 없던 길을 만들며 점점 멀어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분열의 의지이다. 나 이외의 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그래야 헤매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서서히 강렬한 통증이 된다. 움직이는 것만이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도 길을 만든다. 의지의 파폍들이 나의 몸뚱어리, 토르소 주변에 둘러서서 나를 배웅하고 있다. 손이 사라져버린 나는 내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조금 미안하다.

0. 아니다. 나는 끝없이 부정하는 사람이지만, 부정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짐승이다. 반대편을 보고 있지 않은 반편을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몸통 중 입이 없다는 것은 그래서 참 다행인 일이다. 있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변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른쪽 손목과 그 아래 달린 더듬이 같은 손가락들이 사라진 것도 다행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1. 혹시 저기 둘러 서 있는 의식 중 한 조각이 수치심은 아닐까. 그러나,

0.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서도 연유하지 않는다.* 몸이라는 커다랗고 흉측한 상처 이외에도 이미 수치감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다. 아니 수치감마저 사라지고 없다. 오히려, 수치감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공포와 관련된다. 내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 중 나를 괴롭히는 것은, 죽어도 말 못할 당신의 존재다. 나는 당신을 나의 뒷모습으로 정의한다.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뒤가 궁금하고, 두렵다.

1. 또 한편으로는 나는 정면이 두렵다. 정면에 섰을 때 사람은 그제야 제 크기를 보이는 법이다. 나는 어깨가 굽은 구부정한 사람이다. 늘 큰 키를 숙이는 법만 배워왔다. 그것을 가르친 것은 볼품없는 눈과 귀였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사실은 진짜가 아닐까. 여전히, 나는 나의 정면을 외면한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 지금, 방과 창문의 사이, 그리고 그 너머는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0. 침묵은 조용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의지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침묵은 사실 관계에서 무의식의 공간까지 확장된다. 침묵은 보통의 시(時) 관념에 구속되지 않는다. 침묵의 길이로는 그 무게를 감당해낼 수 없다. 침묵은 한없이 밑으로 쏟아지는 절대적 시공간. 아득해져온다. 이것은 갑자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몸의 밖에서 침묵을 ‘의지(意志)’하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침묵을 의지한다,라는 이 명백한 비문(非文) 속에서 잠식 허우적댄다. 끝내 눈이 내리고 있는 지금 창밖처럼 분명히, 불분명하다. 쌓이면서 지워지는 생각들을 거푸 들여마시다가 손가락의 한 끝이 움찔거린다. 지금 저 손가락의 한끝은 분명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다시, 침묵. 이 침묵은 나에게 많은 상념들을 불러온다. 그것들은 대부분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를테면, 어제 내 옆자리에 앉았던 한 여자의 날씬한 발에 꼭 맞는 구두. 세련된, 그러나 코끝에 상처가 난, 그 구두가 내 침묵을 질질 끌고 간다.

0-1. 텔레비전 소리, 희미한 지린내, 체념 섞인 숨소리, 작은 창문을 통해 슬며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 그 위에 달린 희부연 형광등 불빛, 아 할머니. 풍을 맞은 할머니는 반신불수였다. 20년도 넘게 당신 발로 걸어보지 못한 할머니가 나를 불러서 작게 그리고 부끄럽게 말한다. 나도 뾰족구두 하나 가지고 싶으다, 다음에 내려올 때는 하나 사다주련?, 잠시 자신의 감각 없는 마르고 작은 발을 어루만지는데 침묵의 뼈가 손등에 어려 있었다.

0-2. 아니 아니, 그것 말고 포근한 베갯잇, 따뜻한 이불, 그 속에 지금은 완전히 망각되어버린 나의 작은 발.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의 손 내 발을 어루만지던, 그리고 쏟아지던 잠. 아니 그 직전의 1초 그 순간의 절대로 완전한 침묵에 대해서 나는 아니 나의 침묵은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1. 그래서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내 정면의 길이를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할머니와 내 어머니로부터 나로 구부러지는 그 이상한 역사. 그러므로 나의 몸은 내 어머니에게 배운 완전히 침묵하는 법에 대해 필사적으로 골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저 위태한 고독을 응시하는 일, 침묵에 대한 학습을 바라보는 일.

0. 그러나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지쳐 있다. 깊은 한숨만이 떠도는 곳에서 나는 버려져 있다시피 존재하기 때문이다. 긴 사이. 나의 근원에 대한, 평온함은 사라지고 공포가, 공포만이 남아 있다.

1. 이제 무게만 남은 나의 자리가 뒤척인다. 존재의 무게만큼의 깊이, 그것을 나는 무덤이라고 말한다. 나를 둘러싼 기억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가치의 부분에 불과하다.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것. 그것은 목적도 과정도 아니다. 땀으로 젖은 등이 낮은 온도를 찾아 돌아눕는 것처럼 그런 일이다. 그리고 이 실재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당신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다.

0. 눈이 내리더니 지금은 긴 바람소리가 지나는 저 공간을 뭐라 이르면 좋을까. 차들은 빗소리를 흉내 내며 흘러가고 있다. 나는 듣고 있다. 이것은 침묵의 종막. 멀리 개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한꺼번에 짖고 한꺼번에 우우 슬픈 목소리를 낸다. 나는 듣고 있다. 그 사이를 미끄러져 나의 몸이 빛을 머금고 돌아오는 소리. 아직 무게를 가지고 있는 그것은 땅속 깊이 들어갈 만큼 무겁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눈구멍이다. 문 안으로 핏기 어린 눈동자가 밀려든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두운지 잘 보고 있다. 따라오는 것은 없다. 무섭지 않다. 무서운 적 없다.

*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