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퍼즐 |최규승|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이 작업은 시작된다. 그러저러한 안부를 물은 뒤, 시간 날 때 술 한잔하자는, 상투적인 약속을 하고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느닷없이 그것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어떤 사람의 서재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서재에 그것들이 다 모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 사람들의 서재에 산재해 있지 않을까. 수집벽이 있거나 물건을 버리는 일을 좀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서재에서나 찾을 수 있겠지. 그들의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겼을 테고.

그것들은 책이다. 대형서점에 가면 그것들을 모두 찾을 수 있을까? 그건 좀 어렵지 않나 싶다. 아니, 불가능할 듯하다. 한 권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절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발간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그것들은 절판되지 않았다. 절판은 언젠가 판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이름 속에 담고 있다. 끊은 것은 이으면 되니까. 쉽지는 않지만 종종 그런 경우를 봤다.

그것들은 잡지다. 서점의 진열대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폐간된 잡지. 그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문득, 그것들이 떠올랐고 연상되어 헌책방이 뒤따랐다. 혹, 그것들이 모여 있음직한 헌책방 아는 데 없니? 하고 물었을 때, 다행히 그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는 내게 친절히 좋은(?) 헌책방을 안내해준다. 머릿속에 약도를 그려 넣는 동안 내 몸은 어느새 헌 책에 반응하고 있다. 헌 책에서 피어나는 먼지, 누렇게 빛바랜 종이 위를 기어가는 책벌레를 생각하자 몸이 근질대기 시작한다. 내게 있어서 헌 책과 새 책의 구분은 피부의 반응으로 결정된다. 일종의 알레르기인 이 반응은 헌 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일어난다.

그것들을 찾아 나선다. 머릿속의 약도를 따라 들어선 신촌의 골목길.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간 헌책방에서 몸은 요란한 반응을 일으킨다. 다행히(?) 그것들은 헌책방에서도 홀대를 받아 지하책방 입구에 쌓여 있다. 그 속에서 눈에 띄는 몇 종의 잡지를 골라 계산을 하고 재빨리 헌책방을 나선다. 준비해간 에어 스프레이를 책이 든 비닐 백 안에 뿌린다. 일단 이로써 심리적인 알레르기는 극복이 된다. 그 다음 되도록 그것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고 걷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도록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블루스가 좋겠다. 발걸음에 감기는 블루스는 몸을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것들을 쏟아낸다. 마룻바닥에 폐간된 잡지들이 부려진다. 이번에는 파리모기용 살충제를 뿌린다. 새 책으로 거듭나는 여섯 개의 그것들. 이제 내 몸은 그것들에 반응하기를 멈춘다. 그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文學과知性》 1975년 겨울호. | 김현 선생의 〈韓國文學의 展開와 座標〉가 눈에 띈다. 이때는 일조각출판사에서 펴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문학》 1988년 무크(부정기간행)지. | 1회 노동문학상 수상자로 박노해 시인이 선정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노동자다.”로 시작하는 재미있는(?) 수상소감이 실려 있다.

《현대시세계》 1992년 가을호. | 현대시세계 제 3회 신인공모 당선자 발표에 이름을 올린 강정 시인이 눈에 띈다. 지금보다 당연히 젊다. 더 말랐고 날카롭다. 〈항구〉 외 5편. 제목만 보면 그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느낌.

《외국문학》 1994년 가을호. | 40호 특집으로 〈’세기말’의 글쓰기와 21세기 문학의 미래〉가 눈에 띄고 잡지의 제호에 걸맞게 〈레이먼드 카버와 대담〉이 실려 있다.

《상상》 1994년 겨울호. | 〈무협소설의 현단계〉 〈라이언 킹과 한국만화의 미래〉 등의 글이 눈에 띈다(문학이 이런 걱정을 할 때도 있었군). <진흙으로 빚은 시〉는 조소작업 중인 황지우 시인과 대담한 글이다. 표지사진에 진흙 덩어리 앞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지금보다 13살 어린(?) 시인을 볼 수 있다.

《문학판》 2002년 여름호. | 〈특집: 잡종문화의 시대〉가 눈에 띈다. 잡지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 아울러 이준규 시인의 〈망각과〉라는 멈춰버린(?) 제목의 시도 실려 있다.

그것들에게 작업을 ‘걸’ 시간이다. 연장을 챙긴다. 스프레이 풀과 톱jigsaw, 이 둘만 있으면 된다. 거기에 자잘한 것들, 이를 테면 사포와 마스크 정도가 필요하다. 스프레이 풀을 잡지의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뿌린다. 작업을 쉽게 하려고 목공본드를 물과 섞어 묽게 개서 거기에 잡지를 담가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이 불어 울퉁불퉁해진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바로 포기했다.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프레이 풀을 뿌려나가기로 한다. 스프레이 풀이 잡지를 봉인한다. 이제 그것들은 잡지가 아니다. 단단히 굳어가는 그것들. 종이도 아닌, 그렇다고 나무도 아닌 단단한 종이뭉치들.

그것들을 오려나간다. 가위가 아닌 톱으로, 표지였던 곳에 그려진 연필 선을 따라 잘라나간다. 뭉턱뭉턱 잘려나가는 종이뭉치들은 나무토막을 닮아 있다. 거기에 남은 글자들은 더 이상 글자가 아니다. 읽어보지만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다. 소리를 위한 부호, 정도이지 싶다. 오히려 잘려나가고 남은 색깔과 모양이 더 읽기가 쉽다. 더욱이 책 속, 풀칠된 글자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잡지의 거의 모든 것이었던 글자는 이미지로만 남는다.

그것들은 이제 퍼즐이 된다.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이 퍼즐을 맞출 수는 없다. 폐간된 잡지로 퍼즐을 만든 것은 ‘기억의 편린’을 맞추기 위한 것도 ‘잡지의 슬픈 운명’을 얘기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것은 ‘느닷없는 재미’에 가깝다. 다만, 퍼즐을 맞추는 재미는 없고 만드는 재미만 있을 뿐이다. 문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용론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재미를 얻는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닌 듯하다.

choikyuseong20091029

언젠가 블루스 뮤지션이 예술적 뿌리를 찾아 아프리카로 가는 다큐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한 음악가를 만난다. 두 사람은 음악적인 소통을 시도한다. 서로의 눈빛과 기타의 운지를 통해 두 사람은 즉흥연주를 이어간다. 그들은 영어와 불어인 각자의 언어로 된 노랫말에 주목하지 않는다. 노예의 언어와 식민의 언어로 서로 의사전달을 하지만 잃어버린 옛 아프리카 말에 대한 집착도 없다. 블루스 뮤지션은 자신을 미국(흑)인이 아닌 ‘아메리카의 흑인’이라 말한다. 두 사람을 소통시키는 것은 음악언어다. 의사전달 수단이 아닌, 예술언어로서의 음악언어.
시와 소설의 언어를 흔히 언어 이전의 언어라고들 한다. 그 언어 이전의 언어, 언어의 탈을 쓴 예술언어를 통해 수용자들은 비로소 시와 소설을 예술로 인식하게 된다. 그 탈을 벗어던지고 문자 아닌 어떤 것으로 시와 소설을 창작한다면 그것은 문학일까, 아닐까? 그게 문학이라면 더 이상 ‘쓴다’라는 동사가 시와 소설 뒤에 붙지 않을 것이다.

시는 이미지 속에 이야기를 담고 있는 데 견줘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 역류, 소용돌이 속에 이미지를 얹는 것이 두 장르의 일반적인 차이인 것 같다. 이 둘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겠지만 결국 시와 소설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를 걷어내면 남는 것은 ‘문장’이 아닐까. 이때 문장은 모국어, 외국어도 아니고 영어, 일어도 아니다. 어쩌면 파롤이나 랑그도 아닐지 모른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예술언어’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문예文藝’를 ‘문장예술’이라고 의도적으로 오역한다. 그럼 이 문장은 꼭 ‘문자’여야만 할까. 문장이 꼭 문자여야 한다면 그 문장마저 벗어던지면 어떨까.

퍼즐이 된 그것들이 나를 보고 있다. 퍼즐을 이리저리 배치해본다. 뉘어보기도 하고 세워보기도 한다. 잡지였을 때의 발행된 연도 순서로 놓아보기도 하고 색깔대로 놓아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보기 좋은 대로 놓는다. 멀리 떨어져 보니, 글자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야 잘려나간 글자나마 보인다. 또 느닷없이 끼어드는 생각. 각각의 퍼즐에 작은 모니터를 장착하는 것은 어떨까. 잡지였을 때 실렸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을 인터뷰해서 거기에 담는 것. 그리고 이것을 시, 또는 소설이라고 우기면 어떨까.

그것들에게 어린 조카가 다가온다. 신기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제가 갖고 노는 퍼즐처럼 생긴 그것들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집중한다. 진지하다. 하지만 곧 그것들을 흩어놓고 가버린다. 이런 조카를 나는 재미있게 관찰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린 조카가 만지지 못하도록 모빌처럼 방 천정에 달아놓는 것으로 퍼즐의 배치를 끝낸다는 생각.

예술은 완성하는 순간, 이미 시들해지고 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동안 어떤 재미가 있더라도 다 읽으면 그만 시들해지고 마는, 의미도 없고 소장할 가치도 없는 시와 소설. 무용할뿐더러 결국 아무것도 아닌 시와 소설이 예술로서 완성된 것이 아닐까.

어린 조카는 천정에 달린 퍼즐 모빌을 만지고 싶어 하겠지. 그것들은 영원히 미완성될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