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말] 입속의 검은 맛, 그것은… | 최규승 |

[5월의 말] 입속의 검은 맛, 그것은… | 최규승 |

choigyuseung  손님 중에, 계세요?

  그때까지 내 이름이 그렇게 낯설게 들린 적은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잠깐 동안 당혹감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낯익은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이 부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 나를 부르는 소리는 귀를 통하지 않고 온몸의 신경을 통해 내 머리에 전달되는 듯했다. “손님 중에 ○○○ 씨, 계세요?” 내 이름이다, 부연 담배연기를 뚫고 들려온 것은. 콧소리가 약간 섞인 말랑살랑한 목소리, 분명 나를 찾고 있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그 목소리가 다시 찾는다. 순간, 나는 손을 번쩍 든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다방 안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몰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소리. 얼굴이 발개진다.
  검은색 수화기를 양손으로 받쳐 든 여자는 입가에 웃음을 살짝 얹고 내게 오라고 고갯짓을 한다. 나는 그 여자를 찾아오기라도 한 듯이 부끄럼에 몸을 싣고 그곳으로 간다. 걸음은 서툴고 시선은 무겁다. 겨우 도착한 다방 카운터. 건네받은 수화기의 온기를 느끼며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다. 늦는다, 기다리라는 말이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 풀린다. 수화기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엉거주춤 앉아 있다. 여자는 전화를 끊지 않고 그새 아버지와 통화를 한다. 잠시 뒤 여자가 내게 다가온다.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우유 한 잔을 내려놓는다. 이것 마시면서 기다리면 아버지가 곧 오실 거라는 얘기와 함께. 여자의 말은 이미 존대어가 아니다. 한복 자락의 끝을 찰랑이며 여자는 돌아선다. 그때 내 입에서 왜 이 말이 비어져 나왔는지 모른다.
  저기요, 아줌, 마. 저도 커피….” 다방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주문했을 뿐인데,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본다. 나는 그 시선을 슬며시 비끼며 손가락으로 천천히 옆 테이블 위의 커피를 가리킨다. 여자는 내게 얼굴을 숙여 “누가 아줌마야?” 하면서 목소리를 살짝 올린다. 그렇다고 아가씨라고 부를 수는 없다. 여자가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러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가리킨 손가락에 힘을 준다. 여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는다.
  커피가 내 앞에 놓여 있다. 잔 속 검은 액체의 표면에 내 모습이 떠 있다. 까까머리 1학년 중학생. 조심스럽게 커피 잔에 입을 댄다. 한 모금, 목으로 넘긴다. 한약보다 쓴 커피는 내 양 미간을 구긴다. 이런 모습을 누가 볼까봐 짐짓, 여유 있는 표정을 만든다. 다리미로 얼굴을 펴는 것처럼 눈 아래 살이 살짝 떨린다.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담는다. 이번에는 바로 넘기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목으로 흘린다. 쓴맛이 입속에 꽉 찬다. 매운 고추보다 더 자극적인 맛. 두 번째 마신 한 모금은 참을 만하다. 점점 다방이라는 공간에 익숙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내 등은 이미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다. 아버지가 왔을 때 나는 이미 그 다방의 손님이 돼 있었다.

  국제다방

  그때 아버지가 왜 나를 다방으로 불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어머니의 심부름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전해지는 물건을 가져갔거나 가져왔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침에 가져가지 못한 중요한 서류일 수도 있고, 어머니에게 전해져야 할 급한 생활비일 수도 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그 다방이 세종로 네거리 국제극장이 있던 빌딩 지하의 국제다방이었다는 것, 그 빌딩 앞에서 바라본 이순신 동상이 참 멋대가리 없이 어두웠다는 것, 그리고 처음 마셔본 커피….
  입속을 가득 채웠던 검은 맛은 지금도 온전히 느껴진다. 그때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입안이 부푼다. 아직까지 그때처럼 충만한 ‘풀 바디(full body)’의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지극한 쓴맛.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어른의 맛.
  그 맛에 가까운 커피를, 내가 마셔본 커피 중에서 고른다면 터키 식 커피가 아닐까 싶다. 밀가루처럼 미세하게 분쇄한 커피를 이브리크에 넣고 끓이다가 설탕을 넣어 다시 끓여내는, 쓰고 단맛의 끈적임을 즐기는 커피. 터키 식 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차라리 죽에 가깝다. 터키 식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마신다면 아마 기억 저 끝에 자리한 검은 맛에 다가가지 않을까? 물론 그때의 커피를 지금 마신다면 이처럼 특별한 맛은 아닐 것이다. 인스턴트커피(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흘러나온 소위 미제 폴저스Folgers 커피, 또는 1970년부터 생산된 한국산 맥스웰하우스커피?)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맛은 기억을 더할수록 짙어지는가 보다. 그때의 장면은 점점 흐려지는데 검은 맛은 자꾸 농도를 더해간다. 기억의 왜곡은 바라던 것을 마치 겪은 것처럼 만들지만, 감각의 왜곡은 덧칠을 하는 것처럼 짙어져 절대치까지 나아간다. 가끔 그 왜곡된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골목길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였을 때 골목은 왜 그리도 넓어 보였는지, 길 끝까지 뛰었을 때 왜 그리도 숨이 목에 차 헉헉댔는지.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 다시 찾은 그 골목은 초라해져 있어 어린 날의 여러 기억이 현실에 없었던 것이 돼버린다. 담벼락과 전봇대는 왜 그리도 낡아버렸는지…. 가방을 던지고 축구를 할 정도로 넓었던 골목은 지나가는 자동차를 피해 비켜서면 담벼락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좁아져버렸다.
  기억 속에 자리한 골목은 이미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그 골목, 그 길에 와서야 내가 커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 다시는 콧물을 날리며 고무 축구공을 쫓아 뛸 수 없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낄 때에야 깨닫는다. 아이들은 뭔가를 알아가지만, 어른은 깨닫는다. 능동과 피동의 차이가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이때부터는 더 이상 꿈속에 어린 나는 보이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기억이었던 어린 날의 골목길은 이때부터 무의식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추억이 된다.
  길은 잔인하다. 고속도로, 왕복 몇 차선의 큰 길뿐만 아니라 좁은 골목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좁고 구불구불한 길일지라도 길 끝은 새로운 곳을 향해 있다. 목적 없이 걷는 발걸음조차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방향이 생기고 목적이 정해진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몸의 피로가 쌓이지 않으면 절대로 느려지지 않는 속도. 그 빠르기를 골목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골목의 어떤 모습이다. 골목길은 항상 낡아가는 듯 보이지만, 내 기억에서 빠져나오면 새로움으로 끊임없이 바뀌어간다.

  말이 낡아가는 것만큼

  어느 날 광화문 뒷골목을 걷다가 나무전봇대가 베어진 자리를 본 적이 있다. 바로 옆에는 시멘트 전봇대가 무심히 서 있고 노란색 선이 길섶을 표시한 자리. 옛날과 지금의 전봇대를 피해간 휘어진 곡선은 골목의 여유가 느껴질 정도로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베어진 나무 전봇대는 이미 기능을 잃고 옛날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한때 문명의 첨단이었을, 타르를 검게 바른 나무전봇대의 밑동. 지금은 시멘트 전봇대가 그 옆에 당당히 서 있지만 시간은 이마저도 낡은 것으로 만들 뿐이다. 골목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데 내 눈은 언제나 옛날의 골목에 머물러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사라진, 동아일보 맞은편의 국제빌딩. 그 자리에는 지금 동화면세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국제다방도 국제극장도 국제빌딩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사라진 것은 빌딩뿐만이 아니다. ‘국제화’란 말은 아직 사어가 되지는 않았지만 예스럽다. 당국의 허락을 받아 해외여행을 하던 시절의 말처럼.
  ‘세계화’라는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시멘트 전봇대처럼 굳건히 사람들의 언어 속에 박혀 있다. ‘인터내셔널’의 자리에 ‘글로벌’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신작로(新作路)’라는 말이 이 모든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새로 만든 길인데, 이를 듣는 지금의 귀는, ‘참 낡은 말’이라고 받아들인다. ‘새로운 낡음’이나 ‘낡은 새로움’이 가득한 세상, 햇살 눈부신 골목 구석에서 본 세상에는 새로움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눈만 부실 뿐이다.

  골목 안 커피 집

  광화문 근처, 신문로 2가의 골목과 흔히 서촌으로 불리는 경복궁의 왼편, 통인동 일대의 골목 그리고 청와대 뒷산 언덕바지에 있는 부암동 골목을 걷는다. 골목길 산책은 생각을 피어 올린다. 이제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어른들의 산책로가 되었다는 생각. 아이들은 더 이상 골목에서 놀지 않는다. 학원에서 허덕이는 아이들이 아니라 해도 그들은 골목을 누비며 지내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골목 안 구멍가게도 함께 사라졌다.
  구멍가게가 있던 자리에 한때 어린아이였던 어른들의 놀이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골목 안 커피 집은 어렸을 때 그 어른들이 드나들던 구멍가게를 대신해 길모퉁이나 구석에서 커피 향기를 피어 올린다. 그 어른들이 어렸을 때 ‘뽑기’와 ‘달고나’의 향기를 쫓아 구멍가게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그 향기는 자못 매혹적이다.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에 어른들이 느릿느릿 걷는다. 어쩌』면 골목에서 유일하게 낡은 것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으로 조금씩 옷을 갈아입는 골목보다 더 느린 사람들. 골목만 벗어나면 ‘세계화’되는 사람조차 골목에서는 나무전봇대만큼 낡아 있다.
  골목 안 커피 집들은 낡은 사람들의 이정표 같은 곳이다. 꼭 어디를 향해 가지는 않지만 거기에 멈춰 서서 여러 갈래로 뻗은 길 끝을 확인하는 그런 이정표. 거기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에서, 어릴 적 침샘을 자극하던 소위 ‘불량식품’에 매혹되었듯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쉼표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 오늘도 커피 볶는 향기는 골목을 싸고돈다. 느닷없이 커버린 어른들이 그 향기에 사로잡혀 다시 아이가 된다. 그 눈에 골목은 다시 축구장만큼 넓어진다.

* 2000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무중력스웨터』『처럼처럼』『시간도둑』『끝』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