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말] 백지와 나 | 함기석 |

[4월의 말] 백지와 나 | 함기석 |

hamgiseok백지는 무수한 질문의 책이자 우주다
하나의 말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죽음을 인간의 눈으로 기록하는 순간
우주는 백지 속의 바닥없는 해저로 가라앉고
침묵의 말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어 바다 멀리 흩어진다

그렇게 나는 표류 중인 어부다
미약한 인간의 언어로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는 죽음의 낚시꾼
태초에 달아난 나의 시간 나의 우주
나의 피와 살과 꿈, 나의 유골을 건져 올리는 밤의 낚시꾼이다

그렇게 백지는 내 임사(臨死)의 침실이다
백지는 내가 한 장의 창백한 백지임을 각인시키는 거울이다
백지는 세계를 기다리는 갈망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곧 무(無)라는 공포임을 공증하는 견딤과 황홀의 세계다

죽음은 시간이 고용한 서기관(書記官)
그는 인간의 서책인 육체에 먹으로 낙서하길 아주 좋아한다
그 낙서를 어떤 이는 시(詩)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병(病)이라 부르고

나도 이 서기관을 벗으로 곁에 두고 있으나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날이 많아 그는 몹시 서운해 한다
그래서 가끔 연락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와 술자리도 함께 하고
2차를 가자며 자기 집으로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그가 사는 집터 이름 또한 백지(白地)
백지의 집엔 없는 게 없어서 온 세상과 우주가 다 만져진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다 보인다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다 보여서 나는 황홀한 장님이 된다

그렇게 눈 뜬 자는 눈이 멀고
그렇게 눈 먼 자는 광대한 암흑의 시야를 얻는다
그렇게 시인은 기존의 세계에 눈이 멀거나 스스로 눈을 태워버린 자이다
미지의 암흑, 미지의 시공, 미지의 빛과 감각을 찾기 위해

백지는 눈의 실종 장소이자 감각 너머의 세계다
인간의 두 눈은 세계를 볼 때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세계를 확신한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억이 사산된 망각의 발자국이라면
망각은 구름에서 쏟아지는 푸른 빗방울이다

그렇게 기억은 무수한 점(點)으로 망각은 굴절된 선(線)으로
그렇게 인간의 몸에 시간은 야만의 족적을 남기고
그것이 인간의 언어라는 허명으로 백지 위에 깔릴 때
백지는 수사적 허위에 전율하니

백지는 인간의 개입이 없을 때 백지 자체로 아름다운 신이다
시인은 신의 혀를 도절하는 낯선 이방인들
백지는 말의 무수한 선(線)과 색(色)의 분할 공간이자 결합 공간
인간의 눈이 닿는 순간 파들거리는 투명 생물체

백지는 추상을 구현하여 대상을 무화하는 절대 극지이자
그 도구적 추상을 물질의 세계로 환원하는 생명의 땅, 광야다
백지는 백지의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는 나의 검은 육체
나의 무덤이자 자궁이고 천국이자 지옥이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밤의 태양을 기다린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장미의 가시 돋은 하늘을 부른다
나의 백지는 오늘도 기나긴 팔을 뻗어 달의 허리를 만지고
나의 백지는 영원한 어둠이고 영원한 미지다

미지의 형식이란 반역적 숨쉬기이자 죽음이 낳는 배설물
나의 똥과 피와 땀과 오줌이 내 시의 유일한 실재일 것이니
하하하! 시는 없고, 이 없음의 환멸과 유혹이
나를 다시 언어의 바벨탑으로

가도 가도 결국은 헛것일 이 무자비한 유희
그러나 나는 혼신으로 사랑한다 세계의 허(虛)와 무(無)를
그것은 간절하고 절박한 나의 육체이지만 결코 나의 망명지는 아니니
나의 백지여! 백지는 백지를 찢고 다시 백지를 시작하라!

시인.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착란의 돌』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등과, 시론집 『고독한 대화』,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