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말] 절반정도 동물인 것, 절반정도 사물인 것 | 유계영 |

[3월의 말] 절반정도 동물인 것, 절반정도 사물인 것 | 유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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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겐 이상한 경험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것 하나를 쓸 것이다. 책에서 읽은 것이 아니고 꿈을 꾼 것도 아니며 벌어진 일에 상상을 보탠 것도 아닐뿐더러 불리할 때 함구증이 찾아올지언정 습관적 거짓말쟁이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유감이지만 증명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믿는다고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득 볼 리도 만무하다. 선택하기는 쉬울 것이다. 어쨌건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횡단보도 앞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실제의 구청에 가기 위해서였다. 실제의 수요일이고 실제의 한낮이었다. 이 같은 시공간의 사람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평일 한낮의 사람들. 물론 가상의 수요일과 가상의 한낮, 가상의 사람들. 대부분은 일터나 학교에, 마땅한 테이블에 놓인 탁상시계처럼 잠자코 놓여있기 때문이다. 수요일 한낮의 거리에 이토록 많은 실제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음 주 수요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일로 주민등록 초본을 떼러 가듯이, 예상치 못한 이 행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실제의 신호등을 멍청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급한 걸음걸이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정장 차림의 그는 종이쪽지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러다 돌연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쪽지에 적힌 무언가를 읽으려다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다는 듯이 말이다. 웅덩이나 구멍 따위에 발을 빠뜨릴 뻔한 사람이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는 얼른 가까운 거리의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고 있었다. 지척에 있는 병원의 위치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이 길로 곧장 가면 바로 보일 거예요’ 하고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질문을 받은 사람도 똑같이 대답했다. 상대의 검지가 가리킨 방향으로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가상의 쪽지에 적힌 병실 호수나 그것을 휘갈긴 볼품없는 필체를 상상하다가…… 그제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상이 길을 헤매는 사람의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 이질적인 데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이목구비와 골격을 가졌는데 그럴 리 없지. 이 동네에서만 삼십 년을 살았다. 그렇다면 방어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을지 모른다. 내가 꺼지라는 무표정에는 일가견이 있지. 이쪽 가능성이 농후하다. 별 거 아니네. 신호 되게 길군.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실제의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나일론 장바구니를 든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의 진실성을 위해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여자는 이쪽을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입모양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반갑다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국내정서에 맞지 않으므로, 저 여자도 분명 무언가 질문하려 할 것이다. 질문을 기다렸다. 나는 이 동네에서만 삼십 년을 살았다. 질문이 무엇이건 간에 동네와 관련한 것이라면 대부분 말해줄 수 있다. 질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건 간에 지름길부터 걷기 편한 길까지 상세히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보기 좋게 피해갔다. 소화전이나 주차고깔을 피하는 정도의 예사로운 몸짓이었다. 여자는 방금 전 병원을 알려준 사람에게 가까운 은행을 묻고 있었다. 그거라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데. 질문자의 거래 은행에 따라 수수료를 물지 않게 해줄 수도 있는데. 왠지 모를 실망감에서 빠져나왔을 때 여자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 나를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진 않았는지 꼼꼼히 따져보았다. 골몰한 사람에게는 길을 묻지 않는 것이 미로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멀리서부터 여자와 교감하고 있다고 믿었다. 길 찾으시죠? 제가 이 동네에서만 삼십 년째 삽니다. 여자의 눈빛은 분명, 반갑다고 오늘 날씨 참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질문이 다가오기를 지나치게 기다린 나의 눈빛이 미세한 호전성을 띄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소화전이나 주차고깔을 피하듯이 나를 피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질문을 독차지한 그 사람에게 괜히 말을 걸고 싶어졌다. 그때 실제의 보행신호가 켜지지만 않았더라면 무엇이든 물어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으나 수요일 한낮의 구청사거리 사람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보통의 나는 일터나 학교에, 마땅히 놓여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처럼 놓여있었을 뿐이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시작한 이 이야기가 매우 시시껄렁하다면, 사실이 그렇기도 하나, 이 이야기가 가진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실제의 수요일과 실제의 한낮에 만난 실제의 사람들.

2.
  푸드홀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음식 내주는 곳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같은 거. 나는 한 사람이 쩔쩔매며 흩어진 사금파리를 쓸어 담는 장면과, 버즈 아이 뷰 숏으로 본다면 푸드홀 전체가 거대한 탬버린으로 보였을 거라는 쓸데없는 견해, 한둘쯤 섞여있을 괴짜들의 중얼거림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딱 하나다. 아르바이트생이 점주의 눈치를 보며 빗자루 질로 정신없었다.

3.
  기차 말인데.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상관없긴 하지. 그래도 기차가 좋겠어. 그나마 평등한 편이니까.
  기차의 꽁무니를 따라 전속력으로 뛰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뛰잖아. 점점 멀어지는 걸 끝까지 보잖아. 나는 가상의 나를 보냈지. 병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남자, 은행이 있는 곳으로 사라진 여자, 그들을 따라가 보라고. 왜인지 그들은 병원으로, 은행으로 가지 않았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며칠째 시달리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시인.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고,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