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한 여성성의 시적 방언 혹은 물-소리 언어

심원한 여성성의 시적 방언 혹은 물-소리 언어

bitter_write7 —제4회 김현문학패 선정의 말(시 부문: 신영배)

   2001년에 등단한 이래, 자신의 세속적 모습은 최대한 가둬놓고 오로지 시적 방언을 통해서만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은밀히 흘려 내보내며, 최소한의 그러나 심원한 소통을 일구어내려는 문학적 수도사. 신영배 시인의 시 세계를 일차적으로 특징짓는 그 극도로 비의적(秘意的/秘儀的)인 시 세계가 여성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 물과 그림자—실은 물의 동질이형체다—의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이해가 아니다. 이 일반적 이해는 일단 명백한 참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이 몇 가지 관념으로 도식화되는 데 그친다면 오히려 이 시인의 시 세계를 축소하고 왜곡할 위험이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 마땅하다. 이 시인이 궁극적 목표는 관념적 요약의 거부,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총체적 재구성에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경 언어의 재구성에 이를 것이다.
    실제로 이 시인의 네 권의 시집 속에는 어떤 관념적 진술도 없다. 가령 한국시에 만연해 있는 저 그럴듯한 잠언 (혹은 구호) 투의 구절을 그녀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잠언이란 세상을 규정하고 뭔가를 가르치려는 담론이다. 그에 반해, 신영배 시인은 그냥 자기 자신을, 특히 자기 육체의 반응들을 정밀하게 해부해 보여준다. 그 풍경은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하며 초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재현하는 언어를 또한 해부한다. 언어는 과연 투명하고 진실에 적합한가? 여기서 시인은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는 듯하다. “말은 부어올랐다 / 말은 충혈되었다 / 말은 고름이 괴었다 / 말은 늙어갔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그러므로 이제 말 또한 새로 창조되어야 한다!
    창조의 원동력인 상상력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상상력의 원형들이 문제가 된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 원형들은 해체하기 힘든 도식적 의미들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신영배 시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물의 상상력의 경우가 그렇다. 누구나 알다시피 물은 여성성과 밀접히 관련된 여러 상상력의 가장 원형적인 원소이다. 우리는 그 놀라운 도약을 차후 『물속의 피아노』와 『그 숲 속에서 당신을 만날까』에서 보게 되겠지만, 시인은 왠지 첫 두 시집인 『기억이동장치』와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에서 물을 우회한다. 물이 여성의 본질적 성질이자 이미지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의 현실 속 여성은 물로서 물답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시집의 첫 시부터, 여성의 물은 “마른다.” 동시에 여성은 “지워진다.” “피”마저 마른 여성은 온통 “몸속이 사막이다.” 사막인 여자는 잉태 또한 불가능하다.
    이 여성적 삶의 삭막함은 우선 그들의 존재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 여성이 여성답게 살 만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이에 대한 논자가 별로 없지만, 수없이 되풀이되는 집, 방, 길 등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폭력적 남성성을 은근히 내비치는 부분이 이 지점인데, “남자”가 짓는 집은 “철근 골조” “벽돌” 등으로 짓는 “딱딱한” 남성 중심적 공간으로, “아버지”로 인해 “망가진 가족”이 살고 있다. “부드러운 벽”을 지닌 “공기 방”(나중엔 물의 방이 된다)을 꿈꾸는 “소녀”는 달아나듯 집 밖의 길로 나서기도 하지만, 집 밖에 다른 집은 없다. 자칫 “홍등이 켜진” “여관”에서 더럽혀지고 죽음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물은 오염되고 “검은” 물로 화한다. 거기서 “집들은 어디로 사라지는가”라는 탄식이 터지고, 여자들은 모종의 “이동을 꿈꾼다.”
   그 이동은 물론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으로 아득한 기억을 매개로 한 “환상통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이동을 실현하는 핵심 이미지가 그림자다. 그림자는 애초부터 물과 함께 시작됐다. 첫 시집의 첫 시부터 물과 그림자는 나란히 간다. 그림자는 말라버린 물의 흔적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여자들의 현실적인 존재 양태를 은유한다. 자립적 육체와 말을 박탈당하고 그림자로 처형된 존재. 그러나 시인은 이 그림자의 역설을 발견하고 존재론적 반전의 계기를 포착한다. 첫 시집에서 스치듯 암시되었던, “얼었던 소녀가 풀(려나는)” 그림자 “놀이”가 그 단서이다.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닌 그림자는 어떤 다른 실체의 가상적 징표로만 존재하지만, 문제는 그 가상이 실체를 거울처럼 1:1로 반영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림자는 천태만상의 형태로 변화하여 나타나며 심지어 도상을 조작할 수도 있다(손으로 토끼나 새 그림자를 만들듯이). 시인이 여기에 착상한다. 여자는 아직 현실적 실체를 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그림자들을 부리며 몽상의 세계를 열 수는 있는 것이다. 여자는 이제 자기 몸 그림자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고, 남자들의 도시에 나무 그림자, 강 그림자, 바람 그림자를 펼쳐 놓는다. 그녀가 갇힌 방 역시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으로 바꿀 수 있다.
    “누구도 그려보지 않은 형상”의 전개는 “초월과는 다른 이(異/移)-현실”(강계숙) 혹은 대체-현실의 생성을 뜻한다. 그것은 아직 실제 현실을 전복시키거나 변증법적 통합으로까지는 나아기지 못한 잠정적인 단계이다. 이 대체-현실 속의 대체-언어가 “그녀의 점자”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림자 세상에서 “그림자로 썼던 문장”은 모두 “검은 점들”이다. 그 검은 점들은 그림자 즉 어둠의 입자들이리라. 그림자로 사는 거기선, 현실의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 부연 입자들의 배열로 돌아간다.” 시인 혹은 여자는 “죽은 말들과 걸어가며” “하늘가 멀리 점 하나를 본다.” 실은 그녀가 먼저 “점을 향해 달려 들어갔(고)” 그 점 속 “깊은 곳에서 말을 버렸(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통해 그녀는 환상적 대체-현실을 체험하지만, 곧 그 한계에 도달하는 듯하다. 오직 그녀 혼자 손끝으로 더듬어야 읽을 수 있는 그 점자는 현실 속의 그녀 몸 위로 기어올라와 “촘촘히 그녀를 파 먹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 놀이의 삶은 그토록 자폐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또한 지니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이 대체-현실/실제-현실의 분리와 괴리를 극복할 길은 없을까?
   두 번째 시집의 끝 무렵에서, 시인은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듯 그림자와의 결별을 암시한다: “(…) 돛단배에 / 우리들의 그림자를 태우자 // 그리고 / 우리들은 고요히 기록을 남기자 / 배를 떠나보내며 // 빛의 자음과 모음으로 그림자를 쓰자” 그림자의 삶을 수장하듯 물로(!) 떠나보내고 하나의 역사로 기록하되, 그 어둠(밤)의 역사를 빛(낮)의 언어로 남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빛(낮)의 언어는 이미 “죽은 말”들이 아니던가? 세 번째 시집과 네 번째 시집의 놀라운 비상은 바로 그 모순을 넘어서려는 또 한 번의 상상적 모험에서 비롯한다. 어둠과 빛을 다 반영할 수 있는 물의 언어를 창조하여.
   세 번째 시집부터 그림자는 거의 완벽하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물이 거의 전면적으로 대신한다. 이 시집은 그림자 세상보다 훨씬 현실과 가까워진 듯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현실 재현적 세계는 전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구체적인 현실을 물의 상상력으로 뒤덮어 재해석하는 세계에 가깝다. 이건 사실, 그림자의 상상 세계를 거쳤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원래 메마른 물의 흔적이었으나, 변형의 상상태 속에서 자연을 불러들이며 물을 재생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자가 물을 머금고 새로운 육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결과로, 현실적 삶의 모든 현상들이 물의 속성과 양태로 유비되고 재구성된다. 그것도 물의 언어로! 점자인 검은 점은 이제 물방울로 대체된다: “책 속의 글자들이 빗방울로 떨어진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이 물의 언어가 딱딱하게 죽어가는 시각적 문자와는 달리 어떤 소리와 함께 새로운 청각적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다(빗소리, 물 흐르는 소리, 파도 소리, 나아가 눈물-울음소리 등등). 흡사 악기를 품은 듯 음악적 울림마저 산출한다면, 그것은 진정 “방금 태어난 말들”이 되어 세상을 다르게 읽게 만들 것이다.
   과연, 신영배 시인은 그 경지로 나아간다. 세 번째 시집에서의 ‘물로’(물로서/물로써/물을-향해)와 ‘물울’(물+울음)이 먼저 그 실례이다. 그러나 정말 경이롭고 신비롭기로는, 네 번째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물랑’이란 특이한 조어이다. 이 어휘를 과연 정의할 수 있을까? 얼핏 ‘물’과 조사 ‘랑’(~와 함께)의 결합인가 싶다가, 어디서는 ‘물’과 ‘낭’(낭자의 ‘娘’), 어디서는 ‘물’과 ‘랑’(신랑의 ‘郞’)의 합성어인가 하는 느낌이 드는가 하면, 다른데서는 ‘물 이랑’의 축약어일까 갸우뚱 거려지기도 하고, 또 달리는 그 ‘랑’이 ‘달랑’에서 온 게 아닐까 싶기조차 하다. 또 ‘물랑물랑’이라고 쓸 때는 ‘말랑말랑’이 연상되기도 한다. 애당초 그냥 한 음절 소리는 아닐까? 혀끝을 입천장에 튕겼다가(ㄹ) 입을 둥글게 열며(ㅏ) 동그라미로 튀어오르게 만드는(ㅇ) 소리. 그 문법적 기능 역시 한 품사에 한정되지 않고, 부사였다가 형용사였다가, 명사인가 하면 동사처럼 활용되기도 하는 이 어휘는 그 음감과 리듬을 타고 음악적으로, 어쩌면 주술처럼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놀라운 시적 고안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전체를 여성적인 것의 우주로 재편하여 형상화하려는 미학적 실험”(이찬)으로서, 이 음악적 언어의 창조야말로 한국 여성시의 가장 뛰어난 시적 성취의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더 되새겨야 할 사항이 남아 있다. 신영배 시인은 이 새로운 언어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사라지는 당신”처럼 “책이 왜 사라지는지 묻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 (…) /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라고 읊조렸었다. 쓸쓸하고 어렵지만, 이 태도야말로 어쩌면 가장 웅숭깊으면서도 강인한 여성성의 발현일지 모른다. 나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겠다는 욕망이야말로 남성성이 가장 추하게 드러날 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영배 시인은 최승자 ․ 김혜순 시인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한국 여성시의 계보에 발 디디고 시작했으나, 곧 자기만의 시적 경지를 개척해냄으로써 하나의 또 다른 이정표가 되었다. 여성성과 그 시적 언술이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결합하는 문학사적 한 장면을 연출한 이 시인에게 이것 다음엔 무엇을 쓸 것이냐고 먼저 묻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먼저 “다음 초대에도 와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쓺―문학의 이름으로』 7호, 2018년 하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