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오늘은 빨간불 |염승숙|

지난 가을, 볕이 좋았던 어느 날에 길을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적이 있었다. 차들은 쌩쌩 달리고, 빨간불이 꽤 길게 이어지는 터라 나는 좀 심심했다. 주위를 아무리 휘 둘러보아도 도시는 발 딛는 곳이라면 어디든 파헤쳐져 공사 중이고, 사람들은 종종거리며 이동하기 바쁠 뿐 멈춰 대화하는 이들은 좀처럼 눈에 띄질 않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는 숨이 막힐 때까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곳에서, 그러나 적막이 아닌 먼지 날리는 소음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가만 멈춰진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러니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고, 사람들 몇이 도로를 가로지르고, 다시 빨간불이 켜지는데도 아랑곳없이 나는 얼마쯤을 더, 먹이를 기다리는 둥지 안의 새처럼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하릴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흰 종이 한 장의 귀퉁이가 새파란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처럼 언뜻언뜻 보인다 싶을 찰나에 나는 컥컥거리며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저린 목덜미를 손으로 주무르며 다시 까치발을 들었다. 눈에 들어온 그것은 누군가 종이에 써서 전봇대에 붙여 놓은 짤막한 글귀였다.

나는 홍콩 사람이고, 자기 엄마가 잃어버렸습니다. 엄마는 돈도 없고, 주소도 없고, 옷은 검은색, 흰색 옷만 입습니다. 신발은 흑갈색 싣었어요. 나는 전화기 있습니다. 찾는 사람 알려주세요.

맞춤법이 조금 틀리고 비뚤배뚤 서투른 글씨라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그것은 호소문과도 같은 전단이어서 마음이 짠했다. 타국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전봇대에 전단을 붙여놓은 홍콩인이라니,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심장이 뛰는 속도로 손톱 밑이 저려왔다. 나는 그가 검은색 사인펜으로 꽤 여러 번 덧칠했을 제 전화번호의 숫자들을 오래도록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고는 조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돈도 없고, 주소도 없고, 검은색과 흰색 옷만 입으며 흑갈색 신발을 신은 그의 엄마가 어쩌면 이 계절이 다 지나도록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 엄마를 찾아 헤매는 이국의 아들을 가엾게 여기며, 나는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그가 전단에 남긴 글귀를 메모했던 것이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횡단보도의 신호등 불빛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전봇대 아래에서 서성였다. 4차선의 도로를 건너 맞은편의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빨간불 앞에 잠시잠깐 머물다 떠나갔지만 전봇대에 매달린 종이 한 장을 말끄러미 바라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까닭에,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질 않았다.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 떠도는 낯모르고 이름 모르는 이방인의 마음을, 나는 언제까지나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아무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채로 가을볕 아래 바작바작 말라갈 전단이, 아귀힘 억센 누군가의 손길처럼 내 두 눈을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매 순간 순간이 빨간불 앞일 텐데, 싶었다.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도, 사방팔방 들려오는 공사 소음도 그치질 않는데, 빨간불은 다시 녹색등으로 바뀌고, 차들이 멈춰 섰다. 천천히 바닥의 흰 선만을 밟고 조심조심 걸어가며 나는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1초 전, 10분 전, 하루 전, 1년 전의 ‘나’에 대해서도 나는 매일 잊고 사는데, 하물며 어렸던 나날에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썼던 친구, 등짝을 맞아도 조금도 아프게 느껴지질 않았던 선생님, 학창시절을 지나 사회에서 스치듯 혹은 즐거운 인연으로 만났던 그 많고 많은, 친밀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오로지 그들의 안부만이 아프게 궁금해졌다. 일상에 쫓겨, ‘내일, 내일’을 중얼거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오늘’만을 사는 동안,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을 줄곧 잊거나 잃어버리고 지내왔구나, 어쩌면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하염없이 발품을 팔 있을 그 사람처럼 언젠가는 나도, 우리도, 호소하듯 글귀를 적어 전봇대 아니 발길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붙여놔야 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씁쓸히 땅만 보며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나는 또 빨간불의 신호등 앞에 멈춰 섰고, 전봇대에 매달린 그의 서툰 글씨를 다시 만나야 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