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말] 술과 글 | 이윤옥 |

[10월의 말] 술과 글 | 이윤옥 |

leeyunok—이청준 선생 10주기에

  10년이 흘렀다. 10년은 곁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들이 제 자리를 잡기에 적당한 시간인 것 같다. 흩어질 기억은 사라지고, 남을 기억은 분명한 얼굴을 얻고. 무엇이 기억들을 분류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 세상을 떠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떠올리면 날이 갈수록 채도와 명도가 높아지는 몇몇 그림들이 있다.
  내게 선생을 가리키는 말은 술과 글이다. 선생에게는 광장의 밝고 따뜻한 술자리와 밀실의 엄격하고 단호한 글쓰기가 둘 다 잘 어울렸다. 그런데 선생이 없는 지금, 선생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술자리와 글쓰기 장면이 뚜렷하게 도드라진다. 기이한 일이다.
  술과 별로 친하지 않은 나는 여럿이 함께 하는 술자리에 거의 가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드물게 경험한 술자리에는 대부분 이청준 선생이 있었다. 나는 홀로 맑은 정신으로 선생을 포함해 적당히 도취된 사람들을 바라봤다. 편견 없는 관찰자의 시선에 비친 그들은 흥미롭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다. 선생은 술을 마시면 조근조근 말도 많아지고 명랑해졌다. 술은 선생을 부드럽게 했다. 부드러운 선생은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그날 선생은 부드럽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의 책을 내기로 한 출판사의 높은 사람과 다른 몇몇 예술가들이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모임이 있었다. 밥술집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 자리한 예스러운 한옥이었다. 술이 몇 잔 돌고, 출판사 사람이 점점 방자해져갔다. 그의 안하무인이 도를 넘을 즈음, 선생이 앞에 있던 자신의 빈 소주잔을 조용히 엎었다. 술잔을 엎은 선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아무도 선생에게 술을 권할 수도 따를 수도 없었다. 나는 창백한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다 밖으로 나왔다. 나 같은 새가슴은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었다. 나와 달리, 선생은 마음속에서 치받치는 무엇인가를 꾹꾹 누르며 힘들게 자기를 견디고 있었다. 모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저 밝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 그림 속 선생은 여전히 무섭게 자신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어느 날, 나는 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년 전쯤 선생은 삶이 2, 3개월 정도 남았다는 기막힌 예고를 받았고, 나는 어쩌다보니 장차 선생의 평전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물어야 했다.
  “「퇴원」이 당선되기 전에 예닐곱 번 낙선하셨다고, 글에도 쓰시고 제게도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요.”
  “그런데 좀 이상해서요. 제대 후에 응모하셨다고 하셨는데, 4학년 때 등단하셨거든요.”
  “그래서요?”
  “언제, 어느 신문사, 어떤 잡지사에 일곱 번씩이나 응모하셨어요? 응모작은 모두 「퇴원」이었나요?”
  “…….”
  선생은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심드렁하게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툭, 내뱉었다.
  “『사상계』에 처음 냈는데…, 그게 됐거든요….”
  “예? 그럼 단번에 붙으신 거예요?”
  “그러시면서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떨어지셨다고 하셨어요?”
  나는 놀라서 선생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연거푸 물었다.
  조급한 나와 달리 선생은 느긋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닫았다. 나도 더 묻지 않고 기다렸다.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선생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여러 번 낙선 후에 「퇴원」으로 등단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랬다. 선생이 한 산문에서 직접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번에 붙었다고?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선생이 잘 쓰는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묘한 배반감이 들었다. 그런데 답은 바로 내가 느낀 배반감에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선생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기운 잃지 않았으면 해서요. 글쓰기를 너무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요. 내가 일곱 번이나 떨어지면서도 매달렸다고 하면, 한두 번 쓴 맛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않겠나,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네요.”

문학평론가. 2003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평론집 『비상학, 부활하는 새, 다시 태어나는 말—이청준 소설 읽기』 『시를 읽는 즐거움』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