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말] RE.미적체험 | 김미정 |

[8월의 말] RE.미적체험 | 김미정 |

kimmijung  1. 다시 읽는 1980년 여름의 평론 하나
  “평론가들은 왜 유독 페미니즘 작품에 대해 평가가 엄격하죠?”라는, 수업 중 학생들의 볼멘소리가 종강 이후에도 내내 맴돌던 차에 『세계의 문학』 1980년 여름호에 실린 김우창의 평론 「문학의 발전」을 다시 찾아 읽었다.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나 ‘관조’ ‘미적판단’ 같은 칸트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도, ‘문학의 보편성’, ‘심미적 체험과 자유’ 등, 김우창 평론 고유의 개념어나 사유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필자의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는 문체나 스타일이 지금 시대의 그것과 사뭇 다른 낯섦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문학의 발전」은 (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조건 하에서 문학 또는 예술이 가장 활발하게 피어날 수 있는가”를 논증하는 글이다. 그 흐름을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이렇다. ① 예술·문학의 ‘보편성’은 “부분적으로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가능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는, 통일의 힘”이다. ② 이 보편성의 체험을 ‘심미체험’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족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여러 대상들의 존재방식과 관계한다. ③ ‘심미체험’은 대상의 ‘형식’과 관련된다. ④ (형식이)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⑤ 중요한 것은 ‘합목적적’ ‘유기적’ ‘자연발생적’ 인상이다. ⑥ 그런데 ‘관조’의 상태에서도 대상의 ‘형식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예술적 충동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억압이 없어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⑦ ‘자유’란 서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⑧ 즉, “예술의 개화는 오로지 참다운 민주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1980년 여름이라는 시점, 그리고 당시 양대 계간지 ‘문지’와 ‘창비’가 강제폐간을 맞은 상황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이 글 속의 ‘심미적 체험’ ‘자유’ ‘민주적 사회’와 같은 말들의 추상성은 좀처럼 체감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참여/순수’ ‘정치/문학’ 식의 이분법적 논쟁이 변주·반복되어온 한국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그 양쪽 사이의 곡예처럼 보이는 이 글의 포지션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컨대, 이것은 축약된 사정 많은 ‘1980년 여름’의 시점에 놓여 있는 글이다.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의미에서 ‘미적체험의 조건’을 떠올리게 하는 2018년 여름,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

  2. ‘예술과 자유’에 대한 논리적 곡예
  1980년의 필자는, 예술·향유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당시 정치적 억압이라는 명백한 조건과 관련되어 요청된 ‘자유’였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2018년 예술을 창작·향유하는 조건과 관련된 ‘자유’는 어떻게 놓여 있을까. 페미니즘과 퀴어의 문제의식은 왜 많은 이들의 심상을 강력하게 추동하고, 실제로 문학 안에서 개화하고 있나. 그리고 한편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화하는 것은 왜 유독 각별한 미적판단의 대상이 되곤 하는가.
   앞서 말했듯 「문학의 발전」은, 심미적 감각을 도야·고양시키는 미적체험이란, ‘자유’가 체현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원리를 강조한다. 김우창이 원리적으로 상정하는 좋은 예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향유자가 그 대상작품에 대한 선이해, 편견, 개념, 정보 등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말해, 대상의 개념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판단만이 순수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산물의 형식에 있어서의 합목적성은 임의의 규칙들의 일절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어서, 마치 예술의 산물은 한갓된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I. 칸트, 이석윤 옮김, 『판단력비판』, 박영사, 1974, §45, 185쪽.)라는 칸트의 구절과 겹쳐 읽어도 좋다.
   종종 이것은 창작하는 측에게도 어떤 요구로 작동해왔다. 즉, 어떤 ‘형식’을 통해 그것이 ‘예술’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연발생적이고 유기적인 인상을 주도록 창작되어야 한다는,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막연한 통념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의견들에 따르면, 창작자의 의도나 목적성 등이 두드러지는 형식은 불순하다. 사심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좋다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목적, 의도가 문학을 앞서거나 압도해 버리면 곤란하다는 암묵적 우려가, 지금의 페미니즘 관련 예술 다수에 호의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게 하는 주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칸트를 경유하는 김우창은 이러한 플랫한 논리로 귀결되지 않게끔 논의를 복잡화한다. 그가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할 상황(관조의 상태에서 무심코 좋다고 감탄케 하는 예술의 의미)을 강조하면서도, ‘외부세계’와 ‘나’와 ‘대상’의 관계성과 조건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앞의 ⑦⑧의 논리를 과감히 비약하자면 그의 글은 2018년 시점에서 이런 질문이 이어지게 한다. ‘사심없는 상태’라고 할만한 그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 무엇에 의해 어떻게 조건지워진 자유인가.
  칸트 역시 앞에 인용한 진술 이전에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의 당위는 아무리 판정에 필요한 모든 여건에 따라서 진술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조건부로 진술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앞의 책, §19, 100쪽)라며, 이른바 ‘공통감’(sensus communis)에 대한 논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즉, 사심없는 상태란 한편으로 “조건부로 진술”되는 보편적 좋음의 감각, 즉 ‘특정’ 공동체적 원리로서의 ‘공통감’의 전제 하에서 자유로운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이 ‘특정 공동체적 원리’란, 지금 2018년 시점에서라면, 기울어진 젠더·섹슈얼리티 역학을 ‘자연’처럼 여겨온 공동체의 원리라고 과감히 바꿀 수 있을 말이다.

  3. 다시 미적체험을 이야기하는데 필요한 자원들
  좀더 나아가 「문학의 발전」의 요지를 ‘우리의 미적체험은 언제나 무언가에 조건지워져 있다’라는 문제틀로 바꾸어 본다. 이와 관련하자면 ‘삶을 위한 예술/예술을 위한 예술’ 식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의 통념이나 논쟁의 역사를 지우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삶/문학’의 문제를 차라리, 예술을 둘러싼 미적체험의 문제틀로 밀어넣어보자. 예컨대, 삶 속의 정치적 억압은 분명, 문학을 자유롭게 창작·향유할 수 없게 하는 조건이다. 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 삶의 핵심문제 역시, 문학의 자유로운 창작·향유에 구속이 되는 조건이다. 한편, 재현할 삶·세계 일반과 ‘언어’의 관계 자체도 많은 예술가들을 구속하는 문제적 조건이다. 이 각각의 조건들에 맞붙어 고투해온 많은 예술들이 사조, 운동, 논쟁 등의 형태로 예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지금,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주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젠더 역학이, 문학을 자유롭게 창작·향유할 수 없게 하는 조건이라고 자각하고 질문하는 이들의 문제제기 역시 ‘예술(사), 미학(사)적으로’ 온당하다. 페미니즘, 퀴어 관련 작품에 왜 유독 엄격하냐고 묻는 젊은 세대의 불만 역시 지극히 온당하다. 젠더·섹슈얼리티의 역학은 ‘자연’으로 착각될 뿐이지, 이 세계 구성원 모두의 ‘자유’를 담보해주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간 그 조건이 미학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즉, 「문학의 발전」은 지금 ‘왜 이것이 자연인지’, ‘왜 나는 덜 자유롭다고 여기는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글로 다시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미적체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의 새로운 탐색과 그것에 대한 대화(합의)의 과정이다. 미학에서 ‘보편’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1+1은 2이다’ 식의 객관적, 개념적 보편이 아니라, 비율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민주적, 대화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미적체험은 언제나 무언가에 조건지워져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개별적 정체성에 근거하기 쉽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개별적 정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페미니즘 예술이 설득하기도 한다. 지금 페미니즘(예술)의 문제의식을 본질주의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만으로 치환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다양한 정체성의 요인들이 어떤 구조 속에 놓여 있고 어떤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존재하는지, 그리고 개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조건들이 서로 교차적으로 맞물려 있음에 대해, 지금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이야말로 예술의 새로운 공통감, 미적체험의 원리를 재구축하는 데 기여할,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다.
  즉, “민주적 사회”를 요청하며 맺는 김우창의 글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1980년 여름의 맥락을 담은 글이어서가 아니다. 상투적으로 읽힐지도 모를 그의 마지막 요청은 지금 나·우리 안의 다원성들이 서로 대화해야 할 이유를 새삼 환기시키기에 중요한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에서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는 갈등을 조정하고 대화하는 과정이 곧 넓은 의미의 ‘정치’다. 이것이 ‘정치vs.문학’ 식의 구도로 환원될 수 없음도 물론이다.

   4.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삶을 질문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장의 민주화 요구는 젊은 세대에만 특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어떤 위계 내에서 아랫사람이 의식·무의식적으로 윗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려 애쓰는 것에 대해 ‘해석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했다. 이는 주로 가부장 문화 내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자 개념이지만, 이제까지의 많은 이들의 미적체험(혹은 독서)과 겹쳐 생각해보아도 이상할 것 없다.
  잠시, 일본의 독문학자 다카다 리에코(高田里惠子)의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한국에는 저서 『문학가라는 병』(김경원 옮김, 이마, 2017)으로 소개된 그녀는, 도쿄(東京)대학 독문과 출신의 1958년생 연구자이자 모모야마가쿠인(桃山学院) 대학의 독문과 교수다. 지금 그녀의 신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의 작업들의 필연성과 그것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문학가라는 병』은 서구(독일)문학을 매개로 하는 교양주의와 일본 엘리트 남성들의 심상구조를 규명하는 책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파시즘 진군이 본격화하던 시기, 문화통합 관제기구였던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의 주요 멤버의 계보와 그들의 교양주의에 골몰한다. 이 책은, 독일교양주의로 상징되는 ‘청춘’과 ‘교양’이 독일 나치즘, 대정익찬회, 토다이(東大) 일류주의를 관통하며 일본식 교양주의를 완성하고, ‘교양’ 안에 또다른 내부식민지(일류-이류)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실증적으로 검토한다. 제국대학 출신 학도병들이 배낭에 넣고 다녔다는 헤르만 헤세 책의 번역자들, 그리고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인적·미학적 계보를 이루는 동경제대의 엘리트들. 그런데 한편 그들을 매료시킨 독일교양주의에 동시에 매료된 바 있는 다카다 리에코.
  즉, 그녀의 연구는 단지 일본의 남성동맹 엘리트와 교양·문학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원서(원제: 文学部をめぐる病い-教養主義・ナチス・旧制高校, ちくま文庫, 2006)에는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斎藤美奈子)의 해설이 실려있다. 사이토 미나코는 “교양주의나 남성동맹적인 결속을 혹독하게 규탄하는 것 같은 이 책의 배경에 실은 저자 자신의 자학이 숨겨져 있는 것 아닌가”라고 썼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앞서 말했듯 다카다 리에코는 구제(旧制)고교, 제국대학의 피라밋 구조가 표면적으로 해체한 전후민주주의 세대이지만, 전전(戰前) 교양주의의 편린을 간접적이나마 알고 있는 ‘마지막’ 세대이며, 또 한편으로 그녀가 이후 연구자로서 만나게 된 독문학은 그녀의 다른 저작(『グロテスクな教養』, 2005)의 표제어처럼 ‘그로테스크’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작 자기를 형성해오고 지금 그 자리까지(도쿄대학 독문과 출신 연구자) 떠민 동력은, 자신이 비판한 남성 엘리트, 그리고 그들을 정점으로 하는 구조 속 내부식민지의 모방욕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사이토 미나코가 그녀의 책을 읽고 느낀 “어떤 고통, 아픔”은 다카다 리에코의 작업을 접한 ‘나’ 개인의 복잡한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문학가라는 병』은 단순히 남성동맹 교양주의, 문학주의 비판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일류, 주류문학자는 될 수 없었던 여성문학자의 자기 기원에 대한 탐색이자, 그 운명을 넘어서기 위한 고투이기도 했으며, 그것은 국경이나 언어를 달리해서 공감될 것이기도 했다.
  ‘좋은 예술’을 판단하는 논의 속에서 암묵적으로 구획되곤 하던 일류와 이류, 거기에 개재되는 여러 요소와 기율들. 그러므로 어떤 이들에게는 일종의 ‘해석노동’이었을지 모를 미적체험의 과정은 지금 다시 섬세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나’의 좋음과 지금의 ‘나’를 구축한 요소들이 어떤 구조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알아차린 후의 씁쓸함(혹은 통탄)과 그에 대한 양가적 심정은, 일본 전후민주주의 세대 엘리트 여성의 그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녀와 비슷하게 ‘문학이라는 병’을 앓았을 이곳의 어떤 세대, 젠더, 계급의 독자들은 이전과 같이 문학의 좋음을 손쉽게 말하는 것이 곤란해졌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볼멘소리와 고민은 어디에서나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미적체험과 그 조건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국면에서 다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이유는 지금 너무도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1980년 「문학의 발전」에서 김우창이 역설했던 ‘미적체험과 자유’의 문제는, 지금 2018년을 지나 언젠가 또 다른 의제와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에 질문된 미적체험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란 정치적 민주화와 직결되는 자유였다. 그리고 2018년에 다시 질문된 미적체험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란, 이 세계의 젠더·섹슈얼리티 역학을 둘러싼 민주화의 요구와 관련된다. 그리고 언젠가 또 미적체험의 조건으로서 자유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주제를 달리해야 하므로 이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04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현재 『문학3』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다.